부처의 나라 미얀마의 ‘불신지옥’
“나는 분쟁을 잘 모르지만 그게 지역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아.”
산다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자꾸 떨렸다. 긴 생머리를 ‘히잡(이슬람의 여성들이 머리와 목 등을 가리기 위해서 쓰는 가리개)’으로 가린 산다는 부처의 나라 미얀마에서 온 8명의 청년 중 유일한 이슬람교도였다. 내성적이고 참한 성격이었지만 미얀마의 종교분쟁을 이야기할 때, 그녀의 호흡은 자주 거칠어졌고 목소리는 불시에 커졌다. 큰 동그라미 모양으로 둘러앉은 청년들의 시선이 산다에게 집중됐다.
“불교도가 무슬림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모든 걸 쟁취했는데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어. 우린 3일이 지나서야 그런 폭력사태가 일어났다는 걸 알았어. 정부는 뭘 했냐고? 아무것도. 내가 사는 곳의 무슬림 마을은 이제 한 곳 남았어. 다른 무슬림들은 모두 변방으로 쫓겨났고 지금도 많은 무슬림들이 핍박에 못 이겨 다른 나라로 이주하고 있어.”
산다는 불교와 명상의 나라 미얀마에서 일어나고 있는 치열한 종교분쟁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불교가 주류를 이루는 미얀마 종교사회에서 4% 가량의 비중을 차지하는 이슬람교는 영국 식민지 시절 인도와 방글라데시 등지에서 유입됐다. 종교와 문화, 언어가 다른 주류 사회에 통합되지 못한 채 이들은 지난 1962년부터 2011년까지 지속된 군부 독재 시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불교도들과 유혈 충돌을 빚고 있다.
미얀마의 무슬림 소녀 산다는 종교분쟁 현장의 목소리를 전했다.“분쟁이 발생하면 우리 가족은 아무데도 나갈 수 없어. 난 9일 동안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간 적도 있어. 무서웠어. 우리에겐 지금 평화가 필요해.”
종교분쟁으로 9일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는 산다의 말에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산다가 겪고 있는 종교분쟁은 한국의 길거리에서 소음처럼 울려 퍼지는 ‘불신지옥’이란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이 걸린 생존의 문제였다.
미얀마에서 온 또 다른 청년 야자는 올해 3월 미얀마 만달레이 지역에서 일어난 불교·이슬람 종교분쟁을 언급했다. 이슬람교도 소유의 한 상점에서 벌어진 사소한 다툼에서 촉발된 이 사건은 40여 명이 사망하고 1천여 채의 가옥과 사원이 파괴됐으며 1만여 명의 주민이 이재민으로 전락한 유혈사태로 발전했다. 피해자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였다.
야자가 “무슬림 지역에서 무슬림이 스님을 죽여서 불교가 무슬림을 공격하게 시작했다”고 설명하자 산다는 “불교도가 가만히 있는 무슬림을 먼저 건드렸어!”라며 격앙된 목소리로 반박했다. 강당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이슬람교도에 대한 불교도의 억압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현실이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생명에 대한 폭력은 불법에 위배된다.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배경에 과거 이슬람으로부터 철저하게 파괴당했던, 정체성과 존재감을 위협받을 만큼 공격 받았던 불교의 지난한 역사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 다른 미얀마 참가자 와와는 분쟁을 방관하는 정부에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불교와 무슬림 분쟁은 종교적임과 동시에 정치적이라고 생각해. 정부는 종교분쟁을 적극적으로 중재할 생각이 없어 보여. 심지어 정부 일부 기구에서는 종교간 폭력사태에 개입하거나 암묵적으로 방조하고 있다고도 해. 그들은 그냥 조절하려고만 해. 그들에게 종교분쟁은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문제가 옮아가는 마이그레이션 이슈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8명의 미얀마 청년들이 하룻밤 토론으로 모든 걸 잊고 화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민감한 주제를 함께 토론했고 서로 다른 입장을 경청했다. 캠프에 참가한 모든 청년들 역시 단 몇 시간의 토론으로 미얀마 분쟁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동시대에 살아가는 한 소녀가 죽음의 공포와 맞서며 종교분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솔직히 왜 싸워야 하는지 모르겠어”
인도네시아에서도 종교분쟁은 현재진행형이었다.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 무슬림 국가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와 천주교, 불교, 힌두교 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슬람의 기독교 박해와, 이슬람 내부 종파 갈등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인도네시아 청년 와완은 “인도네시아는 여러 개 섬으로 이뤄진 큰 나라로 모두 개성이 다르고 다양성을 인정받고 싶어 해. 그 가운데 이슬람과 기독교, 이슬람과 불교, 이슬람과 이슬람끼리의 분쟁이 발생하기도 해”라고 설명했다.
“아체 지역은 이슬람 전통 보수파인 와하비 중 하나야. 와하비는 이슬람의 다른 종파인 시아 무슬림을 배척해. 소수 종파는 시아, 아말리아, 따사우프, 수피 등으로 많아. 하지만 와하비는 언제나 아체에 있는 다른 무슬림을 무너뜨리려고 해”
또 다른 인도네시아인 레이라가 말을 이었다. 레이라는 “정부는 이런 갈등이 지역적인 거라고 얘기하지만, 이건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이해관계가 얽힌 정치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녀는 “왜 같은 사람끼리 같은 종교끼리 싸워야 하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라고 덧붙였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와완과 레이라는 타국의 청년들에게 인도네시아 분쟁 상황을 설명했다.
청년들은 사회 정의, 종교분쟁, 환경문제 등 세 가지 의제를 중심으로 토론하고 발표했다.
억압받는 여성 인권과 바람직한 지도자의 태도를 표현한 상황극.
청년들은 낮은 여성인권 수준, 공공연한 계급 사회, 인종차별, 권력의 부패 등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에 대해서도 분개했다. 특히 여성에 대한 성차별과 폭력, 조기결혼과 낮은 교육 수준 등에 대한 문제는 여러 청년들의 공감을 얻었다.
청년, 활동하다
그렇다면 청년들은 이런 부조리에 순응하고만 있는 것일까. 각 나라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한 실제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 청년들이 발표에 나섰다.
인도 오리샤 지역에서는 생태마을 공동체 활동이 활발했다. 마을 공동체가 종자와 곡식은행, 가축과 유기농 농장을 운영하며 공동경제활동을 하는 것이다. 생태마을에서는 여성과 아이들에 대한 사회, 문화, 경제, 환경 분야 교육도 이뤄지고 있다.
좀 더 위로 올라가 인도 북부 라다크 지역에서는 불교정신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 활동이 이뤄지고 있었다. 학생과 승려를 대상으로 리더십 교육과 세계적 이슈에 대한 워크샵을 진행하는가 하면, 척박한 환경에 꼭 필요한 하우스 농사와 의료 봉사를 실시하는 단체도 있다. 활동가 청년들은 어린이를 위한 도서관과 노인을 위한 요양시설 운영 사업을 설명하며, 기회가 된다면 꼭 라다크를 찾아 봉사활동을 해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인도의 눈물’ 스리랑카에서 온 청년은 환경운동에 한창이었다. 위기의 동물을 보호하고 파괴되는 자연의 생태계를 보호하고 있다. 이들은 또 지구에 대한 감수성과 자연을 존중하는 정신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교육하고 청년 워크숍을 실시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삶의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운동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종교와 문화의 차이를 포용하기 위한 민간단체와, 평화를 지향하는 플래시몹 운동을 하는 학생들의 이야기가 눈길을 끌었다.
인도 북부 라다크 지역에서는 불교 정신을 기반으로 한 활발한 공동체 활동이 펼쳐지고 있다.
역린을 품은 씨앗
4박 5일은 세계의 젊은이들이 나를 둘러싼 문제에만 매몰돼있던 머리를 환기시키는 시간에 다름 아니었다. 동상이몽. 각기 다른 의미와 바람들로 시작했던 청년 캠프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는 모두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머리를 맞대 해결책을 찾아보려는 기특한 시도로 치환됐다.
물론 한 번의 청년 캠프가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미얀마와 인도네시아의 종교분쟁 이야기에 울컥 했던 감정도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면 점차 희미해질 것이고, ‘지구를 지키자’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거린 청년도 어느 날은 별다방 창가에 앉아 일회용 용기에 담은 커피를 홀짝일 것이다.
다만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일말의 ‘불편함’이다. TV 채널을 돌리다가 다른 나라에서 발생한 분쟁 소식을 전하는 뉴스에 리모컨을 멈칫거리고 마는 불편함. 번지르르한 새 상품의 포장을 뜯을 때 ‘이거 나한테 꼭 필요한 거였나?’ 반문하게 되는 불편함. 몸의 편함을 추구하면서 못내 불편해지고 마는 마음, 그런 것들.
캠프를 마무리하며 기념촬영을 하는 청년들의 목에 무언가 반짝거린다. 비늘 하나가 거꾸로 박혔다. 역린이다. 이전과 다름없이 지내다 불현듯 마음의 불편함을 야기하게 되는 평화라는 이름의 역린. 자, 이제 역린을 품은 씨앗들은 고국으로 돌아간다. 파종된 37개의 씨앗 중 누구의 씨앗이 어떤 꽃을 피워낼지 기대된다. <끝>
역린을 품은 씨앗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