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봉 줄기가 뻗어내려 오다가 수백 길 뚝 떨어진 벼랑 진 곳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만물상 전망대인 천선대이다. 천선대의 서북쪽 맞은편 벼랑중턱에는 두 개의 둥근 돌확으로 된 천녀화장호(천녀세두분)가 있다. 이 천선대 천녀화장호에는 비단녀와 천계꽃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지금의 온정리 부근에 비단녀라고 부르는 처녀가 늙은 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처녀는 마음씨 착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예절이 밝을 뿐만 아니라 얼굴도 또한 곱게 생겨서 어느 모로 보나 비단녀라는 이름에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소작살이를 하는 비단녀의 집은 너무도 가난하였다. 엄가 성을 가진 악덕지주의 착취가 가혹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년 내내 허리가 휘도록 일하여도 입에 풀칠을 하기 어려웠는데 이해에는 봄부터 큰 가뭄이 들어 손 털고 나앉았다. 동네사람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보리까지 말라 죽어서 사람들이 뒷산의 소나무껍질을 벗겨 먹게 된지도 오래였다.

온 마을사람들이 모두 누렇게 부황이 들면서 하나둘씩 넘어지기 시작하였다. 비단녀의 부모들은 남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대로 지내다가는 온 동네가 다 굶어 죽을 것이 뻔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비단녀는 꿈에서 백발노인을 만났다.

그 노인은 비단녀더러 “천선대 꼭대기에 천계화라고 하는 빨간 꽃이 피어 있는데 그 꽃으로 부모님의 부황증을 고쳐드려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처녀는 하도 이상하여 이 꿈 이야기를 부모님과 동네사람들에게 알리었다. 그러나 천선대에 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앓아누운 그들로서 우선 험한 벼랑을 기어오를 기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마음씨 착한 비단녀는 자기가 가려고 결심하였다.

“죽는 한이 있어도 가보자.” 처녀의 작은 가슴은 효성으로 불탔다. 늙은 부모들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한하계 골짜기로 들어갔다. 천선계 골짜기에 이르니 천선대가 구름위에 아득히 솟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때에는 지금처럼 천선대에 오르는 길이 없었고 날개옷을 입은 하늘선녀들만이 자유롭게 오르내렸을 뿐이다. 골이 깊어지면서 길은 점점 험해지고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때에 누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앞에서 긴 꼬리를 휘저으며 스적스적 걸어가는 것이었다.

처녀는 무서워 움츠러들었으나 범은 뒤를 돌아다보고는 또 꼬리를 휘젓곤 하였다. 자기를 따라오라고 알려주는 상 싶었다. 용기를 내여 범의 뒤를 밟아갔더니 어느새 천녀봉 밑에 이르렀다. 이제부터는 산턱을 기어올라야 하는 것이다. 어디를 어떻게 밟아 올라가야 할지 망설였는데 이번에는 파랑새 한 마리가 날아와 길잡이를 섰다.

비단녀는 파랑새가 앉은 곳을 향하여 바위에 손톱을 박아가며 한틈 한틈 톺아올라갔다. 밑을 내려다보면 만길 나락이요, 위를 쳐다보면 천길 절벽이다. 땀 투성이가 된 온몸은 겁에 질려 오돌오돌 떨렸으나 처녀는 오직 부모님을 살리려는 일념으로 이 위험을 용케 무릅쓰며 나갔다.

어느 만큼 기어올랐는지 해가 중천을 넘어서고 비단녀도 천선대령마루를 눈앞에 보게 되었을 때였다.

기쁜 김에 일어서 안도의 숨을 몰아쉬는데 심한 허기증 때문인지 앞이 아찔하더니 눈에서 별이 날고 주위가 빙그르 돌았다. 그 순간 “앗!” 하는 비명과 함께 비단녀는 그만 그 높은 벼랑에서 굴러 떨어졌다.

이튿날 아침이었다. 동해에 둥근 해가 솟아오르자 금강산의 일만이천 봉우리는 타는 듯 붉게 붉게 물들었는데 하늘에 칠색 영롱한 무지개가 서더니 풍악소리 울리며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왔다. 천선대 화장호에 얼굴치장을 하러 온 것이었다.

그 가운데 한 처녀가 천녀봉 중턱에 유혈이 낭자하여 쓰러져있는 젊은 처녀를 발견하였다. 선녀들은 피와 땀으로 얼룩진 비단녀를 안고 와서 화장호 옆에 눕히었다. 그리고 몇 번인가 화장호의 물을 손에 담아 얼굴을 씻어주었다. 얼마후 비단녀는 “후!” 하고 한숨을 몰아쉬며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소생하였다. 비단녀의 얼굴은 더욱더 곱게 번져 하늘선녀처럼 아름다워졌다.

“아가씨는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어요?” 선녀들이 조용히 물었다.

비단녀는 이 친절한 하늘 선녀들에게 자기가 위험을 무릎 쓰고 이곳까지 오게 된 사연을 자초지종 다 이야기해 주었다.

들어보니 그것은 참으로 기막힌 사연이었다. 선녀들은 비단녀의 효성에 탄복하여 동정어린 눈물을 흘리더니 한포기의 작은 천계꽃을 비단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백년에 한번밖에 피지 않는 하늘위의 천계꽃이에요. 천상에서도 아주 귀중한 것이지만 아가씨의 아름다운 소행에 탄복하여 드려요. 이 꽃을 앓는 분의 코에 대여 냄새를 맡게 하면 그 어떤 중병의 마귀도 도망치고 말아요. 어서 빨리 가서 위급한 부모님이 소생하도록 하세요.”

비단녀는 깍듯이 인사를 하고 천선대를 내려왔는데 어찌된 일인지 벼랑길도 훨훨 나는 듯이 내려올 수 있었다.

마을에 돌아오자 마음씨 착한 비단녀는 생각하였다.

(동네에는 우리 부모님보다 나이도 많고 더 위급한 어른들도 계시는데 그분들부터 먼저 고쳐드리는 것이 도리지.)

처녀는 마을 어귀에 있는 자기 집을 지나 동네에서 제일 나이 많은 노인네의 집부터 찾아갔다. 다 죽어가던 노인에게 천계꽃향기를 맡게 해드리니 과연 그 노인은 잠깐사이에 소생하여 일어나 앉았다. 참으로 신기한 꽃이었다. 비단녀는 이런 방법으로 온 마을사람들을 다 일어나게 하였다.

날이 이미 어두워졌다. 그제서야 처녀는 자기 집으로 뛰어갔다.

구들에는 아버지, 어머니가 나란히 누워있었다.

“아버지, 비단녀가 신령약을 가지고 왔어요.” 하고 흔들었으나 그들은 딸이 온 줄을 알지 못하였다. 급히 천계꽃향기를 부모님의 코에 번갈아 맡게 했다. 너무 늦어졌는지 한참만에야 부모님들은 잠에서 깨어난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비단녀의 얼굴이 너무도 곱게 번졌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나예요. 비단녀예요.”

처녀는 그제서야 부모님들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를 깨닫고 <화장호>에 가게 된 동기와 그 경위를 자초지종 다 이야기해 드리었다.

“내 딸이 참 착하구나. 기특하다.” 아버지는 귀여운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칭찬해주었다. 노인은 자기 딸이 마을사람들의 고통을 먼저 생각하고 이웃의 노인부터 치료해준 일이 하도 기특하여 언제부터 저 애가 저렇게 어엿하게 자랐나 하고 자꾸만 딸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날 밤 비단녀의 일가는 너무도 행복하여 온밤 이야기꽃을 피우며 새웠다.

다음날 마을 사람들은 이른 새벽부터 찾아와 인사들을 하였다. 그들은 비단녀의 부모 앞에서 좋은 딸을 두었다고 칭찬도 하고 부러워도 하였으며 한편 자기네 마을에 이렇게 마음씨착한 처녀가 있다는 것은 자랑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한 청년이 다급하게 뛰어오더니 엄가 놈이 비단녀의 천계꽃을 빼앗으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이때 어디선가 선녀의 당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착한 비단녀, 내일 아침부터 매일 비가 내리고 온정천가에는 무지개가 설 것이에요. 천계꽃이 위험에 처하게 되거든 그때에 그 꽃을 무지개에 던지세요.”

비단녀는 밖으로 나가보았다. 하늘에 먹장 같은 구름이 뒤덮이더니 곧 온 동네가 목마르게 기다리던 비는 물이 쏟아지듯 퍼붓기 시작하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비는 멎어가고 칠색무지개가 곱게 마을 동천에 높이 떴다. 무지개의 한끝은 비단녀의 집 옆 개울가에 내리고 다른 한끝은 하늘가에 닿았다.

비단녀는 선녀가 시키던 대로 천계꽃을 무지개에 얹어놓으니 꽃은 천선대쪽 하늘로 날아오르고 날씨는 맑게 개였다.

동네사람들은 약비를 받은 기쁨을 안고 모두가 집으로 달려가더니 곧 연장들을 둘러메고 들로 나갔다.

이때 지주 집에서는 욕심 사나운 꿍꿍이가 또다시 꾸며지고 있었다.

천계꽃을 탐내게 된 지주가 비단녀를 꾀여 그것을 빼앗아오려 하였는데 꽃이 하늘에 올라가버렸으니 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날부터 엄 지주는 울화병에 걸려 누웠다. 그러던 어느 날 엄 지주는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 딸을 천선대에 보내면 그의 ‘효성’에 ‘감동’되어 선녀들이 자기 딸에게도 천계꽃을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기 딸더러 비단녀처럼 화장호에 가서 천계꽃을 따오라고 일렀다.

엄가의 딸은 목숨을 바치는 일이라 선뜻 나서지 못했으나 자기도 화장호에 가면 비단녀처럼 미인이 될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애비의 분부대로 천선대로 찾아갔다.

그러나 길잡이하던 파랑새도 나타나지 않았고 꼬리 젓던 범도 보이지 않았다. 험한 벼랑을 톺아 오르던 지주의 딸은 그만 발을 헛디뎌 천길 낭떠러지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유혈이 낭자하여 다 죽게 되었으나 하늘선녀들은 끝내 오지 않았고 흉심품은 지주의 딸은 그만 죽고 말았다.

울화병에 걸려 누워있으면서도 딸년이 오기만 기다리던 엄가는 참다못해 가마에 자기 몸을 싣고 천선대를 찾아 떠났다. 그런데 육화암 근처에 이르렀을 때 돌연히 나타난 범을 보자 넋을 잃고 쓰러졌으며 이윽고 피를 토하며 죽고 말았다. (이것은 진짜 범이 아니라 지금도 육화암 동쪽 문주봉 중턱에 있는 ‘범바위’였다. )

이후부터 이 동네사람들은 지주의 착취를 받음이 없이 모두 골고루 다 같이 행복하게 살았고 화장호를 하늘선녀들의 화장못이란 뜻에서 ‘천녀화장호’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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