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양양 땅에 박씨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운명이 기구하여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고 이 고을 어느 양반네 집에 머슴으로 끌려왔던 그는 모진 구박과 고생 속에 늙고 병들어 더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인정 없는 주인은 공밥을 먹일 수 없다고 하며 그를 갈 데로 가라며 내쫓았다.
이리하여 박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나마 고향에 가서 보내려고 금강산 양진마을(지금의 온정리)에 왔다.
한생을 머슴살이하다가 이제 머슴의 신세를 면하고 마음속에 잊지 못하고 그려오던 고향으로 왔으나 정작 오고 보니 살아갈 일이 막막하였다.
일가친척은 하나도 없고 처자마저 없으니 몸을 의지할만 한데가 없었다. 게다가 늙고 병든 몸에 재산이라고는 허리에 찬 곰방대와 담배쌈지뿐이었다. 서글퍼지는 심정을 달랠 길 없는 박노인은 머슴살이로 흘러간 허무한 인생을 한탄하면서 마을을 벗어나 관음폭포 윗목에 있는 골짜기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그곳에는 선친들의 무덤이 있어 한번 찾아보자고 생각하고 나왔던 것이다. 워낙 골짜기가 깊고 숲이 무성한 비탈이여서 톺아오르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박노인은 숨도 차고 다리맥도 진하여 산소까지 미처 올라가지 못한 채 큰 밤나무 그늘아래서 숨을 돌리고 가려고 나무 밑에 털썩 주저앉았다.
땀을 흠뻑 흘리며 비탈길을 올라온 탓에 목이 말라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침 가까운 곳에서 벽계수 흘러내리는 소리가 났다. 한 모금 마시려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노인은 무엇인가 발부리에 탁 걸려 하마터면 엎어질 뻔 하였다.
유심히 발밑을 살펴보니 칼자루만 한 풀뿌리꼭지가 삐죽이 땅위에 드러나 있는 것이었다.
“아니 이게 무슨 풀뿌리일가. 도라지라면 굉장히 큰걸. 잎을 보면 도라지 같지도 않는데....”
박노인은 혼자 중얼거리며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우선 물부터 마시고 나서 그 풀뿌리를 캐기 시작하였다. 뿌리의 몸통은 꼭지에 비해 훨씬 굵고 땅속깊이 박혀있어 한참이나 신고하여 겨우 파냈더니 무보다 더 큰 먹음직한 풀뿌리였다.
노인은 풀뿌리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며 한 끼 식량보탬은 되겠는 걸 하고 정성스럽게 흙을 털었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약초 캐는 사람들이 다가오더니 노인의 손에 들려있는 풀뿌리를 보자 눈이 휘둥그레지며 물었다.
“노인님, 이렇게 큰 산삼을 어디에서 캤나요?”
그 소리에 발노인은 놀랐다.
“뭐? 산삼이라고?”
“이것은 백년이상 묵은 희한한 산삼이야요.”
박노인은 어리둥절했다.
한생을 불우하게 살아온 이 늙은이가 100년 이상 묵은 귀중한 산삼을 캘 줄이야 어이 생각이나 했으랴. 약초 캐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생김새는 삼 모양과 같아 보였다.
다음날 박노인이 희한한 산삼을 캤다는 소문이 양진마을에 파다하게 퍼져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구경하러 왔다.
그중에는 금강산에서 한생을 살며 약초를 캔다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런 산삼을 난생처음 본다며 몹시 부러워했고 금강산에 유람왔던 길손들은 “야, 굉장한데.....”하고 놀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시작된 산삼구경은 어느덧 흥정으로 이어져 갔다.
“이 산삼값이 얼마나 될까요?”
구경꾼들 중에서 누가 물었다.
그러자 역시 구경꾼들 속에서 대답하기를 “원래 금강산 약재들은 효험이 좋아서 그 값이 높게 팔리기 마련인데 약재 중에서도 으뜸가는 산삼이고 보면 그 값이 대단할 걸…”이라고 하였다.
“우선 산삼의 무게를 달아보자구.”
“아니, 이건 만냥돈이 훨씬 넘는군…. 아, 천냥짜리 산삼은 들어봤지만 만냥돈이 나간다는 산삼은 금시초문니요. 허참.”
“그러니 누가 만냥을 낼 작자가 있겠나.”
“아따 걱정두 팔자여. 만냥짜리 산삼이 생긴 건 만냥짜리를 살 사람도 나선다는 말인데 작자가 없을라구!”
이렇게 산삼의 값이 정해지자 때마침 금강산구경을 왔던 어떤 부자가 돈 만냥을 주고 그 산삼을 사갔다.
“박서방, 이젠 그 돈으로 밭을 사고 병든 몸도 추세워 여생을 좀 편안히 살게나.”
“고마우이. 그렇지 않아도 땅을 좀 마련하려네.”
마을사람들은 박노인의 고단한 신세가 펴일 날이 왔다고 기뻐했고 그에게 따뜻한 말을 한마디씩 건네고 갔다.
박노인은 우선 제 힘에 맞게 다룰 만큼만의 땅을 사서 참외와 수박을 심고 과수원도 하나 마련했다. 노인의 참외밭과 과수원은 만물상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땅 한 뙈기가 없어 한생을 남의 집 머슴으로 늙고 병든 몸이 된 박노인에게 얼마나 소박하고 아름다운 소원이 있었는지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박서방, 참외, 수박만 심더니 이번엔 원두막, 정자를 짓는 게 아니요.”
“돈은 두었다가 뭘 하겠나. 정자도 짓고 원두막도 지어야지.”
“그렇지, 이 만물상 길어귀에 정자를 짓고 원두막에서 과일과 참외를 팔면 잘 팔릴게요.”
사람들의 생각은 제 나름이라 어떤 사람은 박노인이 헌 토목잠뱅이를 입고 땀을 흘리며 밭을 가꾸고 있는 것을 보고 사람이 돈이 생기면 인색해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원두막에 정자도 아담하게 짓는 것을 보고 돈벌이를 착실히 하려고 잡도리를 한다고 했다.
이런 억측과 뒷말이 오가는 속에 계절이 바뀌어 여름철에 들어섰다. 박노인네 참외밭에는 향기로운 참외냄새가 풍겨왔고 동이만한 수박들이 소담하게 열렸다.
박노인은 매일 아침 얼굴에 사람 좋은 웃음을 담고 수박과 참외를 무더기 따다놓고 원두막에 나와 앉아 지나가고 지나오는 길손들을 불러 들였다.
“여보게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여기 서늘한 정자에 앉아 땀을 들이구 가라구.”
“야, 여기 원두막이 생겼네. 참외, 수박이 먹음직한데.”
사람들은 너도나도 원두막에 들려 참외를 청했고 정자에 걸터앉아 땀을 들이며 시원하게 수박을 먹었다.
“노인님, 참외가 정말 잘 익었습니다.”
“속 시원히 잘 먹었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며 사람들은 노인에게 참외, 수박 값을 치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노인은 값을 받지 않았다.
노인은 미처 수박, 참외를 따 들이지 못하여 찾아든 길손들이 저절로 따먹게 한일은 있어도 먹은 값을 치르려고 하면 오히려 화를 내고 돈은 기어이 되돌려주곤 하였다.
금강산의 아름다운 풍치가 뭇사람들을 가림이 없이 공정하게 대하고 사람들에게 더없는 기쁨을 주듯이 노인은 찾아오는 길손이 늙은이건 젊은이건, 남자이건 여자이건 모두 반갑게 맞아 그들에게 재미나는 옛 이야기를 해 주기도 하고 또 그들로부터 듣기도 하며 함께 즐겼다. 이렇게 하는 것을 노인은 인생의 보람으로 낙으로 삼았다.
이러는 과정에 처음에 제나름의 생각으로 말하던 사람들도 그의 깨끗하고 선량한 마음에 감복되어 머리를 숙이었고 자연히 혈육처럼 친근하여져서 만물상어귀의 정자에 그 늙은이가 보이지 않으면 허전한 마음을 금치 못해하였다.
그러던 박노인이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임종을 앞둔 때에 많은 사람들이 애석한 마음 안고 찾아왔다. 그는 어느 날과 다름없이 과일을 따오라고 부탁하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한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모진 고생 속에 늙어 말년에 돈 만냥을 얻게 되니 불쌍한 늙은이를 하늘이 돕는다고 좋아들 했는데 제 몸은 한시도 돌보지 않고 남 좋은 일만 하다가 이렇게 간다고 진정을 담아 애석해하니 노인은 그의 손을 잡고 미소의 눈길을 보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내 어려서부터 머리가 흴 때까지 양반집 머슴을 살면서 한세상을 보냈소. 금강산의 아름답고 대바른 풍치와 정기를 부러워하면서도 그처럼 사람들에게 즐거운 일을 한 번도 하지 못하고 한 많은 귀신이 될 일을 생각하니 앞에 캄캄하고 괴롭기만 했었네. 그러던 내가 산삼을 캔 덕에 금강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즐거움을 주고 기쁜 마음으로 저승에 가게 되었구려. 그러니 그 값을 어찌 돈 몇 만냥에 비기겠소.”
그 후 사람들은 뜻이 깊고 선량한 이 늙은이를 회고할 때마다 만냥짜리 산삼을 캔 이야기와함께 돈 만냥으로도 바꿀 수 없는 인간의 순결한 마음에 대하여 절감하였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그 골짜기의 이름도 자연 ‘만냥골’로 불리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