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날씨를 방불케하는 뙤약볕이 전주향교 마당을 달구는 늦봄 토요일 오후. 노학들의 시조 읊조리는 소리가 향교의 고택과 오래된 돌담을 넘나들고 있다.
향교가 세워진지 400년의 시간이 말해주듯 이곳의 모든 것들은 오래돼고 낡았지만 그 틈새틈새 마다 세월의 흔적들이 서려 더욱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단청 없는 전각들의 검붉은 기둥이며 반질거리는 손때 묻은 툇마루며 담쟁이 넘나드는 이끼 낀 돌담이며 하늘을 찌르고 섰는 마당 한켠의 오랜 고목들은 모두 400년이란 시간만큼의 색과 모습을 하고 있다.
아마도 대성전 마당에서 늙은 은행나무를 올려다 볼 때였으리라. 동편 산기슭에서 하얀 빛이 오후 햇살을 튕겨내고 있던 그 순간. 그 흰빛의 정체가 궁금하다. 눈꺼풀을 오무린 채 흰빛을 따라가니 이건 분명 하얀 미륵부처님의 모습이다. 그리고 주변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는 작은 절집 전각들까지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을 한다. 알고 보니 동고사라는 절집이었다.
“내일 아침에는 꼭 동고사를 찾아봐야 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작은 설렘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고즈넉한 향교의 마당에서 발견한 산기슭 절집이었기에 더욱 그랬지 싶다.
전주로 내려오던 아침. 배낭에 따로 등산화와 등산복을 챙겼으니 이미 마음속에는 산행과 탐방을 작심하고 있었던 터. 내려온 당일 오후 시간은 모조리 전주시내 역사 탐방으로 시간을 보냈다.
풍남문, 전동성당, 경기전, 전주한옥마을과 이목대 그리고 전주향교를 돌아본다.
전주를 교육의 도시라고 일컫는 이유는 전주향교를 돌아보면서 단방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명륜전 한켠의 작은 고택에서 한시를 공부하는 모습과 마주하며 가졌던 느낌이었다. 역시 발품을 팔고 볼 일이다. 이렇게 구석구석을 돌다보면 소소한 것들 까지 그 느낌들이 다르게 다가오고 그런 것들이 때론 큰 의미가 되어서 가슴에 남으니 말이다.
이튿날, 전주객사를 돌아본 후 택시를 잡아타고 동고사 입구로 달려간다. 군경묘지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작은 산행이다. 군경묘지는 한국전쟁 당시 조국을 수호하다 산화한 군경들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설치한 묘역이다.
충혼탑에 참배를 드리고 다시 산길을 따라 오른다. 동고사로 오르는 길은 몇몇의 작은 절집들의 입구와 마주치게 된다. 그중 제일 먼저 눈길에 들어오던 절집이 단군성전 성불사라는 작은 절집이다.
단군성전이라…. 호기심은 내려오는 길에 풀어보기로 하고 부지런히 동고사로 오른다. 삼나무 숲을 지나니 참나무 숲이 이어지고 솔숲이 나타나기 시작하니 길 양편으로 오색등이 길마중을 시작한다.
드디어 동고사 근방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겠다. 오색등이 붉은 연등으로 바뀌고 조금을 더 들어서니 돌탑들이 눈에 들어온다.
돌탑 위로 동고사의 하얀 미륵부처님께서 온화하고 자비로운 모습으로 세상을 내려 보고 계신다. 동고사는 한국불교태고종의 절집으로 876년 신라 헌강왕 때 창건한 사찰이라고 한다. 전주의 동서남북 중에 동쪽에 있다하여 동고사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844년 다시 중건하여 옛 이름인 동고사의 이름을 따서 지금의 동고사가 된 것이다.
1973년 미륵입상을 봉안하고 지금은 법륜스님이 주지로 계신다. 웅장하게 쌓여진 돌탑을 지나니 우측으로 허벅지 굵기 만한 대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대나무 숲을 돌아 오르니 동고사의 전각들이 일렬로 선 작은 마당 가운데 대웅전이 보인다. 대웅전에 들어서서 정성껏 삼배를 올린다. 이제 며칠 안 있으면 부처님오신날인데, 라는 생각에 더욱 정성껏 삼배를 올린다.
대웅전을 나와서 난간에 기대어 전주시를 내려다본다. 전망이 참 좋은 절집이구나. 염불당 뒤로 미륵입상이 장중한 모습으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계신다. 미륵부처님 전에 삼배를 올리고 돌아보니 역시 전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경기전도 한옥마을도 그리고 어제 이곳과 마주친 전주향교도 전부 한 눈에 들어온다.
‘너 여기 꼭 들렸다 가거라!’하고 어제 그렇게 하얀빛을 토해내고 계셨나 보다. 미륵부처님을 뵙고 돌아서니 작은 전각 하나가 바위 밑에 자리 잡고 있다. 산신각이나 삼성각인 듯싶은데 묘하게도 현액이 떨어져나가고 단청만 남아 기이하게 여겨져서 문을 열고 보니 옛날 큰스님들의 진영들이 벽면에 자리 잡고 있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를 비롯한 시대의 대덕고승들의 진영들이 모셔져 있는 진영각이었다.
전각의 자리는 분명 산신각의 자리가 맞는데 스님들의 진영이 모셔진 전각이 조금 이상타고 여기면서 내려오니 마당에 스님 한분이 서 계신다. 스님께 예를 올리고 툇마루에 앉아 말씀을 여쭙는다. 이곳 주지로 계시는 법륜스님이시다.
“스님 저기 위에 미륵부처님 옆에 전각에 왜 현액이 없는 건가요?”
“원래 산신각이었는데 전주횃불사건이 있고 난후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떨어져 나간 겁니다. 그 일이 있은 후 탱화를 치우고 큰스님들의 진영을 모셔두게 되었습니다.”
조심스레 말씀을 꺼내시는 스님의 표정이 어둡다. 전주횃불사건의 내막이 궁금하기는 하나 스님의 표정이 편해 보이지 않아 꺼내 묻기를 거두고 스님께서 이어가시는 말씀에 경청하기로 한다.
“요즘 보면 사찰을 공원으로 아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걱정입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더 그래서 걱정입니다. 이 높은 산중 절집까지 자전거를 끌고 들어와서 경내를 헤집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에요. 그래서 붙들어 이야기를 하면 도통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이곳은 공원이 아니라 스님들이 수행하는 수행처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저렇게 차는 왜 세워놓는지 따지고 있으니 사찰에 대한 인식이 너무나도 부족한 것 같아요.”
스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참으로 갑갑한 현실이 피부로 와 닿는 순간이 된다. 절집을 놀이터나 공원 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보게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불교를 비하하고 업신여기는 현 정부의 사고방식이 시민들의 의식 속에도 작용하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이르게 하는 것 같아 일어나는 갑갑함이다.
“요즘 봉은사 문제로 세간이 시끄럽잖아요. 이것 역시 불교계가 전부 잘못해서 그런 겁니다. 부당함을 바른 말씀하시는 스님이 반대로 궁지에 몰리고 있는 실정을 보면 불교계를 이끄는 스님들이 잘못한다고 봐야 합니다. 불교계에서 불교를 지켜주지 못하고 반대로 정부권력에 기대고 있다면 차라리 환속해서 정치인이 되는 것이 나을지도 몰라요. 불교가 불교를 죽이는 꼴이 되고 마는 겁니다. 얼마 전 열반하신 법정스님께서 세상에 많은 교훈을 주시고 가셨잖아요. 사리사욕에 휩싸인 스님들을 자주보다 보니 법정스님의 남기고 가신 것들이 얼마나 큰 줄 알 수 있게 됩니다. 불교가 중흥을 못하는 이유는 모두 물욕과 공명심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불교의 앞날이 걱정이 많이 되는 거예요”
스님은 산중에 살아도 세상을 꿰뚫어 보는 눈이 대단하다.
“이렇게 산중 작은 절집에서 살다보니 크게 바라는 것 없이 그저 절집이 혼잡스런 공원이 아닌 수행처로 또 문화재의 공간 남아주길 바랄 뿐입니다. 찾아와서 숙연하게 돌아보고 아니 온 듯 다녀가셨으면 들 좋겠습니다.”
마음씨 좋은 이웃집 할아버지 모습을 하고 계신 스님의 작은 바람이 가슴으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스님께서는 또 종교관에 대해 말씀을 해주신다.
“예수님을 믿든 하나님을 믿든 부처님을 믿든 내가 누구인가를 먼저 보고 성찰해야 합니다. 내가 있음으로 예수님이든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있는 것입니다. 나를 먼저 찾고 종교를 찾다보면 타종교에 대해 비하, 폄훼하는 일이 사라집니다.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 같은 지도자를 보세요. 종교는 달랐지만 어느 종교에도 편향됨이 없으셨던 분입니다. 이런 분이 참지도자 이지요.”
현정부의 불교에 대한 폄훼를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신 듯하다. 기린봉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작고 아담한 절집 동고사가 더없이 큰 가람으로 다가온다. 절은 작아도 주지 법륜스님의 말씀이 큰 감명을 주고 있으니, 작은 절집이 대가람으로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동고사를 빠져나오면서 스님의 마지막 말씀이 잔상처럼 머리속에 남는다.
“우리 스님들도 옛날처럼 순교도하시고 자신을 버리는 모습도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불교가 다시 일어 설 것입니다. 또 재가불자들 역시 더 많이 노력하시고 기운들 내셔야 합니다. 불교가 지탱하는 힘이 바로 재가불자들께 있기 때문입니다.”
조심해서 가라는 말씀과 함께 그 여유로운 미소를 보여주시던 스님께 꼭 드리고 싶던 말씀이 ‘스님 꼭 성불하세요’였다. 아마도 스님께 좋은 말씀을 듣고 가라고 미륵부처님이 나를 그렇게 불러들이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동고사를 빠져나와 계단을 따라 오른다. 계단을 마져 오르니 조망이 더욱 시원스레 열리기 시작을 한다. 전주시가 한눈에 들어오는 지점에 팻말 하나가 나타난다. 천주교성지를 알리는 팻말이다.
이곳 기린봉은 다른 이름으로 '치명자산'이란 이름으로도 불린다. 천주교 성지가 있어 불리는 이름으로 젊은 동정 부부가 1801년 천주교박해로 순교해 이곳에 묻혀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은 승암산 또는 중바위산이라는 원래 이름을 갖고 있는데 어쩌다보니 요새는 치명자산으로도 불리는 경우도 있다. 계단 위에서 중바위의 기암을 올려다보니 화강암 석재를 깎아 만든 십자가가 하늘을 향해 세워져 있다.
스님의 고깔 모양을 닮아 중바위산이란 이름이 붙여진 중바위 아래 십자가가 중바위를 향하고 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천주교성지를 지나 중바위에 올라본다. 200m 가량의 길이가 모두 뾰족한 바위들이 늘어선 모습이 장관이다. 이곳의 전망 또한 기가 막힐 정도여서 전주일대와 멀리 전라북도의 자랑거리인 모악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중바위에서 아름다운 풍경들을 한껏 감상하고 내려와 동고산성의 견훤왕궁 터로 발길을 옮긴다. 숲의 오솔길 옆에 자리 잡은 왕궁 터에는 궁궐 대신 잡초만이 무성하다. 발굴 조사된 건물터는 우리나라 단일 건물터로는 가장 큰 규모라고 한다. 바로 이곳에서 견훤왕이 37년간 후백제를 다스렸다고 전한다.
후백제의 중흥을 꿈꾸던 견훤의 꿈은 이제는 세월 속에 묻히고 그 터에는 잡초만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니 무상의 도리를 절로 느낀다.
견훤왕궁 터를 돌아보고 다시 동고사 앞을 지나 중바위산을 내려온다. 그리고 다시 만난 성불사. 단군성전이라고 붙어 호기심을 자극하던 절집이다. 성불사 경내로 들어서니 보살 두 분의 일손이 바쁘다. 좀 돌아봐도 괜찮겠냐고 여쭈어 허락을 받고 경내를 둘러본다.
법당 마당에 먼저 눈에 띄던 십이지신상이 호기로운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잔디 곱게 깔린 마당 너머로 보이는 큰 법당. 법당 현액에 '단군성전'이라고 쓰여 있다. 아마도 단군시조가 모셔진 듯싶다. 자물쇠로 잠긴 법당이 궁금하지만 일반인은 출입금지란다.
법당 옆에 단군석상이 있어 참배를 드린다. 그리고 일손 바쁜 보살께 다시 여쭙는다. 여기도 절 집인 듯한데 부처님은 어디 모셔져 있냐는 질문에 아래 작은 법당 하나를 가리킨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봉안된 작은 법당에서 다시 참배를 드리고 여전히 일손이 바쁜 보살께 너스레를 떨어본다.
두 분의 보살은 햇빛 좋은 마당에 젖은 김을 널어 말리기 바쁘다. 반으로 접은 김에 풀죽 같은 것이 묻어 있다.
“뭘 이렇게 바쁘게 만드시는 겁니까? 어떻게 먹는 건데요?”
보살님께서 설명하시길. “한 장의 김을 반으로 접어서 찹쌀 풀에 담갔다가 말린 다음에요, 햇빛에 바짝 마르면 다시 기름에 튀겨내면 아주 맛있는 반찬이 되는 거예요.”
“이거 정말 맛있겠습니다. 저도 집에서 한번 해봐야겠습니다.”
김 튀각을 만드는 요령을 간단히 전수 받은 다음 성불사를 빠져 나온다.
다시 군경묘역을 지나 동고사가 있던 중바위산 산자락 그늘에서 캔 커피 하나를 마시면서 버스를 기다린다. 한낮의 태양이 벌써부터 한여름 흉내를 내고 있다. 덥다. 더워. 얼굴이 벌겋게 타들어가고 있다. 이제부터 길손의 발걸음은 완주의 모악산을 찾아 나설 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