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차에 몸을 싣고 잠실역으로 가는 길. 휴일 한산한 객차 안에는 앉을 자리가 널렸다. 자리를 잡고 앉아 등산배낭에서 문고판 책 한권을 꺼내 읽는다. 이틀 전 어느 선배님으로부터 받은 선물로 법정큰스님의 '무소유'이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는 양장제본으로 만들어진 책이 한 권 있긴 하지만 크기 때문에 들고 다니며 읽기 불편했었는데 이렇게 문고판으로 되어있으니 소지하기 간편해서 내 여정길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새삼 그 선배님의 선물이 더없이 감사히 여겨지는 순간이다.
몇 개의 단락을 읽자니 벌써 목적지인 잠실역에 도착을 한다. 잠실역에서 다시 하남시 춘궁동 서부농협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탄다.
남한산 벌봉의 지맥이 하남시로 내려와 마지막 객산의 산기슭에 자리 잡은 선법사와 그 능선 길을 찾아나서는 답사 길이다. 선법사는 ‘태평2년명마애약사불좌상’으로 알려진 절집으로 이 마애불은 국가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하남시 서부농협에서 내려 사전에 입수해둔 정보대로 길을 잡아 간다. 버스정류장에서 좁은 도로를 건너니 우측으로 범상치 않은 소나무 군락이 보인다. 그리고 그 뒤로 하늘을 찌르는 고목들 아래 기와지붕이 높고 크다. 혹시나 이곳 역시 절집이 아닐까 싶어 발길을 돌려 들려보기로 한다.
키 높이보다 조금 낮은 담장 앞으로 느티나무며, 은행나무의 고목들이 세월만큼의 높이로 하늘을 이고 서 있다. 전부 수령 400~500년이 넘은 경기도의 보호수들이다. 절집인줄 알고 찾아들었던 곳은 뜻밖에 광주향교였다. 문이 잠긴 광주향교는 목만 길게 내밀어 담장 안 사정만 살펴보고 다시 발길을 돌린다.
사거리를 건너 선법사를 가리키는 표지판을 따라서 한참을 걸었다. 버스 정거장으로 대략 한 정거장 거리다. 정류장 좌측으로 커다란 밤색 이정표가 나타난다. ‘태평2년명마애약사불좌상’이라고 적힌 아래 화살표와 우측으로 700m라고 방향과 거리를 알려주고 있다.
농촌의 민가를 따라 선법사로 향하는 길이 곱다. 벚꽃이며 개나리, 진달래가 피어난 시골길은 이래서 좋다. 시골길을 조금 걷자니 숲길 사이로 연등이 보이기 시작을 한다. 선법사가 지척이렸다.
연등이 걸린 숲길을 조금 걷자니 선법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래도 어느 정도 알려진 절집이라서 제법 규모가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규모는 작다.
계단을 올라 극락보전으로 들어서서 남한산 부처님께 참배를 한다. 큰 법당인 극락보전과 삼성각 그리고 요사채가 선법사 전각의 전부다.
극락보전을 나와 마애불이 있는 곳을 찾아본다. 쉽게 눈에 뜨이질 않는다. 그런데, 웬걸 극락보전 우측 작은 삼각형의 바위에 암각된 마애불이 보인다.
보통 마애불은 크기가 있어 이곳 역시 큰 규모라고 지레 짐작을 했기에 쉽게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판단해버리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지 다시 한 번 깨닫는 순간이다.
선법사의 ‘태평2년명마애약사불좌상’은 약 3m 가량의 바위의 벽면에 연화좌대까지 합한 전체 높이 93cm에 앉은높이 43cm로 부조된 마애불이다. 결가부좌를 한 이 마애불은 왼손에는 약함을 들고 계신 약사불로 보물 제981호로 지정된 국가문화재다.
약사불 좌측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명문에 의하면 고려 경종 2년(태평2년 서기977년)에 중수해, 실제 조성 시기는 그 보다 한참 앞선 것으로 여겨진다. 마모가 별로 없어 고려초기의 불상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도 한다.
또, 이 명문으로 보아 선법사 역시 태평2년 이전에 창건된 사찰로 추측하고 있으나 전하는 기록은 따로 없다.
마애약사좌불 우측으로는 작은 폭포가 흘러내리고 다시 그 옆으로는 바위 이끼 틈으로 흘러내리는 샘에는 약수가 고여 있다. 조롱바가지 가득 약수를 담아 마신다. 약수 맛이 달달하다. 갈증 때문이었을까 약수 맛이 더욱 달게 느껴진다. 이 작은 약수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마셨다는 약수로, ‘어용샘’이라는 이름이 전해내려 온다.
전설이든 아니든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 200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이 작은 약수를 함께 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선법사의 삼성각을 끼고 나타나는 오솔길을 따라 오르니 산행로가 나타난다. 객산으로 오르는 오솔길이 계곡을 향하고 있다.
계곡 사이로 난 오솔길 가에는 진달래꽃이 지천이다. 오솔길 길섶에는 현혹색과 제비꽃들이 무리를 이뤄 앙증맞은 꽃들을 피워내고 있다.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숲이 점점 깊어진다. 소나무가 무성한 솔숲을 지난다. 덩치 큰 소나무들의 가지나 줄기가 부러져 나뒹굴고 있었다. 심지어 뿌리까지 뽑힌 소나무도 군데군데 오솔길을 막아놓기 일쑤였다. 전부 올 봄, 때 모르고 내린 폭설이 저지른 소행이다. 적어도 50~60년생은 족히 돼 보일 아까운 소나무들이 널부러진 모습을 보면서 아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하긴, 그나마 다행이지 않은가. 인간들의 소행이 아니기에…. 만약 사람의 소행이었다면 또 다시 인간에 대한 실망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인간의 소행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인간이 만든 환경오염과 공해로 인해 이상기온이 생겨난 탓이니 말이다. 아아, 이럴 땐 인간이 싫다.
그래도 진달래꽃 무리지어 피어난 풍경을 볼때는 그저 아름다운 풍경에 흠뻑 빠지고 있으니 좀 전의 안타까움은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인간이란 참, 간사한 동물이다.
계곡을 오르고 능선에 이르러 봉우리 하나에 오른다. 이 봉우리가 객산이다. 객산은 남한산의 지맥이 하남시 춘궁동으로 흘러내리다 솟은 마지막 봉우리이다. 저녁에 비소식이 있어서 인지 흐린 하늘에 시계는 짧다.
객산을 지나 기나긴 능선을 따라 오르고 내리길 수십 차례 반복을 한다. 봉우리만도 몇 개를 넘었는지 모르겠다. 근 5km에 달하는 산길을 올라 남한산 벌봉에 도착한다. 벌봉은 해발 522m로 남한산의 최고봉으로 알려져 있다.
벌봉은 병자호란때 청태종과 관련된 이야기 전해지는데 이 벌봉에 정기가 서려있음을 안 청(淸) 태종은 침략과 함께 즉시 깨어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봉우리이다.
벌봉을 지나 봉암성으로 간다. 무너진 성곽을 따라서 걷다보니 이곳 역시 복원공사를 서둘러야 할 듯싶다.
요 몇 해 내리는 집중호우는 무지막지하게 쏟아붓는 경향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순간 폭우를 견뎌내지 못한 봉암성의 새로 복원한 성곽은 역시 많이 무너지고 있었다. 작은 안내판에 폭설과 폭우로 인해 입은 피해로 문화재청의 국비지원으로 조속히 복구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런데 왠지 이 성곽의 복원공사 당시 부실공사를 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자꾸만 든다. 그 단단해야할 성곽이 폭우와 폭설로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기 때문이다. 성곽이란 원래 방어의 수단이기에 견고하고 단단하게 쌓기 마련인데 아무리 성곽의 여장(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장으로 병사들이 몸을 숨기고 공격하기 위한 곳)부분이라고 해서 이렇듯 폭설과 폭우에 쉽게 무너지다니. 쉽게 이해가 가질 않는 부분이다. 봉암성에서 북문으로 이어지는 성곽길 내내 부숴진 여장을 자주 볼 수가 있었다. 초호화 아방궁 같은 청사 사옥 짓는 데만 골몰하지 말고 사옥만큼이나 우리 문화재도 정성껏 복원공사를 해주길 부탁하고 싶다.
북문으로 그리고 서문으로 가는 성곽길. 넓은 성곽길을 따라가는 소나무숲. 남한산성길의 아름다움은 산능성이를 타고 가며 바라보는 성곽과 소나무숲길에 있다. 북문인 전승문을 지나 서문인 좌익문에 이른다. 봉암성에서 서문까지의 거리만도 제법 길다.
서문을 빠져나와 마천동으로 내려간다. 하산길에 있는 성불사에 들러 참배를 올린다. 경내를 흘러 다니는 염불소리가 그간의 피로를 반감시켜준다.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 다시 법정 큰스님의 무소유를 꺼내 읽는다. ‘잊을 수 없는 사람’이란 단락을 읽어 나간다. 스님의 도반인 수연스님과의 이야기다.
스님께서 풋내기 사문시절 지리산에서 홀로 동안거에 드실 무렵 이 수연스님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 졌다고 한다. 그리고 해제가 되면 함께 전국의 절집으로 운수의 길을 떠나기로 했는데 막상 해제가 되자 그만 법정 스님께서 앓아 눕게 되었다고 한다. 며칠 밤을 옆에서 간호를 하던 수연스님이 하루 종일 안보이던 날. 그리고 밤이 깊어서야 돌아온 수연스님은 약사발을 들고 들어와 먹여주더라는 것이다. 아침에 나간 수연스님은 구례까지 산길 40리를 걸어 탁발을 해서 약을 사고 다시 40리의 산길을 걸어 올라온 것이다.
왕복 80리의 산길을 걸어서 약을 지어오신 수연스님의 자비심에 많은 눈물을 쏟으셨다는 대목에서 그만 눈물이 왈칵 고인다. 감정이입에서 오는 눈물이었을까? 마침 40리의 산행을 하고 난 끝인지라 예전 읽던 때와 달리 그 느낌이 가슴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단락이 끝날 때까지 몇 번이고 눈물을 훔쳐냈다. 고개 숙인 채 조용히. 글자 한자 한자가 가슴으로 들어와 박히던 순간의 감동이라니!
좋은 책은 읽고 또 다시 읽을 때 마다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오는 책이 그런 책이다. 이 작은 문고판 책 한 권은 앞으로도 오래오래 나의 길동무로 남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