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선정릉은 사적 제199호로 세 개의 능이 있다하여 삼릉공원으로도 불린다. 조선 제9대 임금 성종과 그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인 선릉(宣陵), 그리고 제11대 임금인 중종의 릉 정릉(靖陵)이 이곳에 모셔져 있다.

이렇게 선릉과 정릉이 함께 있어 선정릉이라 부르는데, 통상 선릉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어렸을 적 기억으로는 이곳 선릉에는 사람들이 쉽사리 드나들고 정비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많이 황폐했던 모습이 두어 번의 소풍을 통해 남아 있다.

그리고는 선정릉 앞을 수십 아니 수백 차례를 넘게 지나다니면서도 잠시 들러볼 생각조차 못하다가, 조선의 왕릉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소중한 유산 돌아봐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이곳을 찾았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선정릉 좌측 재실 옆의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 금빛찬란하다.


은행나무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다.

선정릉은 지하철 2호선과 분당선의 환승역인 선릉역의 8번 출구로 나와 300m 가량을 걸으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강남 도심의 한복판에 허파 역할을 하는 숲이 늦가을인데도 아직 푸름을 유지하고 있다.

매표소를 거쳐 선정릉 안으로 들어서니 아직 남은 가을 빛깔이 나뭇가지에 애처롭게 매달려 있다. 선정릉역사문화관을 지나서 재실로 다가갔다. 이곳 재실은 성종대왕과 중종대왕의 재실로 제사를 준비하고, 제사를 위해 능을 찾은 왕이 휴식을 취하던 공간으로도 사용되었던 전각이다. 평소에는 능을 관리하는 능참봉의 집무실로도 사용되었다.

선정릉의 재실. 본래 재실이 두 채였으나 대한제국 당시 한 채로 모아 지었다.


노란 잔디로 덮인 정릉의 모습. 참도에는 자연석으로 만든 박석이 깔려 있다.

특이하게 이곳 선정릉의 재실은 하나뿐인데 원래는 성종과 중종의 재실이 따로 있던 것을 대한제국 당시 현재의 재실로 합쳐지으면서 하나가 된 것이라고 전한다.

재실 옆 은행나무에 금빛 잎사귀가 무성한 채로 하늘을 찌르고 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보자니 하늘이 온통 금빛이다. 500살이란 나이답게 둘레 넓고 높이 한없이 높아 보인다. 이 은행나무는 능의 보호수로 심어졌다고 한다.

재실을 빠져나와 먼저 중종의 능인 정릉으로 발길을 옮긴다. 가을 빛깔을 털어내기 바쁜 작은 숲을 지나니 금잔디 넓게 펼쳐진 능역이 나타난다. 붉은 홍살문 너머로 참도가 가지런하고, 참도의 왼편은 신도이고 그 보다 높이가 조금 낮은 오른편은 어도이다. 어도는 임금이 제사를 위해 왕래하는 길이다.

정릉과 정자각의 모습. 조선 11대 왕인 중종의 왕릉이다.

참도를 따라 정자각 앞에 올라섰다. 정자각을 돌아서 높다란 둔덕 같은 능침에도 금빛이 가득하다. 이곳 정릉은 문정왕후와 얽힌 이야기가 있다. 문정왕후는 중종의 계비로 중종 12년에 왕비로 책봉된다. 훗날 아들인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하는데 당시는 숭유억불의 시대였으나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문정왕후의 후광을 업은 불교는 조선기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도첩제를 설치하여 승려를 뽑았으며 전국 300여개의 사찰을 공인하였고, 허응당 보우 스님을 봉은사 주지로 임명하여 봉은사 근처인 이곳 정릉에 중종의 능을 옮겨온 것이다. 이런 이장은 문정왕후가 사후에 자신도 정릉에 중종과 함께 묻혀 사후에도 봉은사를 원찰로 삼으려 했으나 지대가 낮은 탓에 잦은 침수로 재실까지 물이 차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공릉동의 태릉에 묻히게 되었다.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조선의 불교는 다시 쇄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고 또한 많은 사찰들이 폐사되고 갖은 훼불이 시작되었다.

선릉으로 걸어가는 오솔길. 도심에 이런 한적한 길이 있다는 것은 복이다.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의 능. 정현왕후는 폐비 윤씨가 왕비자리에서 쫓겨나 왕비가 되었다. 연산군의 계모가 된다.

정릉을 빠져나오면 아름다운 숲길이 이어진다.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노라면 선릉이 나타난다. 작은 고개를 넘어서면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 능의 곡장이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정현왕후는 중종의 어머니이며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가 폐비가 되자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쉽게 말하면 정현왕후는 연산군의 계모가 되는 셈이다.

‘만약 연산군이 성군으로 남았다면 또 역사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 왔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는 것이므로 이런저런 상상은 쓸데없는 것이겠지만, 정현왕후의 능을 따라 내려가는 길목에서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조선 제9대 임금인 성종의 능. 조선초기의 왕릉으로 규모가 웅장하다.


성종의 능에서 내려다본 정자각. 성종의 능과 정현왕후의 능 가운데에 참도와 정자각을 설치한 이런 양식을 동원이강식이라고 부른다. 

잠시 걷다보면, 계곡 건너 얕은 능선 숲 사이로 언뜻언뜻 왕릉 하나가 보인다. 바로 성종의 왕릉이 슬며시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계곡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능선에 좌측에는 왕의 능이 우측으로는 왕비의 능이 배치되어 있는 것을 동원이강의 형식이라고 한다. 이는 산세의 기를 그대로 받기 위함이고 참도 역시 두 능의 사이에 내어 정자각을 지어 서로 통 할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합장을 하거나 아니면 쌍봉을 조성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런 동원이강의 형태는 조금 독특한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얕은 계곡을 건너 성종의 능으로 다가선다. 능침이 크고 병풍석이나 난간석도 장중하다. 아무래도 조선초기의 왕릉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종은 13세에 왕위에 올라 38세에 승하하니 재위기간은 25년이다. 성종은 재임기간 동안 조선 전기의 문물을 거의 완성하였으며 국격의 완성을 의미하는 경국대전을 반포했다.

성종의 능에서 나오다 보니 소나무 숲 사이로 정현왕후의 능이 빼꼼히 보인다.


수복실과 늦가을 왕릉의 숲이 이루는 풍경이 스잔하다. 이 건물은 능과 경내를 관리하던 능지기가 머물던 장소이다.


유네스코 등재 세계문화유산임을 알려주는 표지석. 조선왕릉은 총 44기 중에 40기가 지난 2009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성종의 왕릉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목에 다시 숲 사이로 정현왕후의 능이 빼꼼히 모습을 드러낸다.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어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던 것일까. 왠지 모를 애틋함까지 느껴지고 있으니….

정자각, 홍살문을 지나 선릉의 능역을 빠져 나왔다. 이곳 선정릉의 세 개의 능상 안에는 시신은 없고 의복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왕릉에 욕을 보이기 위해 파헤쳐 훼손을 했기 때문이다. 다시 보수하면서 의복만 묻었다고 전한다.

전쟁의 아픔, 그리고 패자의 역사는 이토록 처참하다. 그런 역사를 들여다 볼 때 마다 가슴 속이 답답함이 밀려온다. 역사는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반성해야 하는 것, 그래야만 훗날 다시는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다행이지 않은가. 이렇게나마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세계의 문화유산이 되었으니 말이다.

선정릉에서 걸어 나오는 길에 숲 사이에 일어난 한 자락 바람이 귓불을 스친다. 바람 맞은 마른 잎들이 이내 오소소 떨어져 내린다. 어느덧 완연한 겨울의 길목이다. 이 길에서도 가을은 가고 겨울이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마치 역사의 도도한 흐름처럼. 제법 찬 기운을 머금은 바람에 여민 내 가슴 속으로 알싸한 바람 한 자락이 스며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