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 위에 꽃처럼 피어난 단풍. 나는 이 것에 단풍꽃이라는 이름을 붙이겠다.

송추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버스 자리가 널널한 종각역 근처 조계사 옆 버스정류장이 제격이다. 기암 아름답고 단풍 풍경이 절정에 이른 여성봉과 오봉 그리고 도봉산을 올라보기 위해서는 일찌감치 버스에 올라 차안에서 몸싸움을 하며 힘을 소진하는 일을 피하는 것이 좋다.

종로타워 앞 작은 광장의 메타세콰이어들도 그 짙푸르던 잎사귀들을 갈색으로 탈색 시킨 채로 떨구기 시작하고 이쑤시개 같은 잎사귀들이 나무 그늘에 소복이 쌓이고 있다.

낙엽침엽교목들은 가을이 되면 점점 초라한 풍경으로 바뀐다. 단풍빛깔 곱게 물들어 가는 활엽수와는 달리 낙엽침엽수의 잎사귀는 변색과 함께 버티지 못하고 그만 낙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 무성했던 푸름은 길바닥을 나뒹굴며 점점 앙상한 모습으로 바뀌어가고 있어 더 초라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등과 허리가 몹시 굽은 노 비구니 스님이 어디론가 지팡이를 짚고 종각 삼성타워 앞을 걸어가고 있다. 어디로 가시는 걸까.

메타세콰이어가 하늘을 찌르는 종로타워의 작은 광장 앞에서 노구를 이끌고 어디론가 느리게 발길을 옮기는 비구니 스님 한 분의 모습이 보인다. 느리게 너무나도 느리게 그리고 한걸음 한걸음을 힘겹게 옮기는 저 스님은 지금 어디로 가시는 걸까. 등과 허리가 다 굽은 스님의 모습은 어릴 적 우리 할머니를 똑 닮았다. 세상의 모든 업장을 당신의 등에 짊어지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듯하다.

갑자기 노비구니 스님께 달려가 “지금 어디로 가시냐고” 여쭙는 다면 뭐라고 대답하실까. 아마도 “어디로 가긴. 살아 있는 곳도 부처님 세상이고 죽어도 부처님 세상이니 부처님 세상에 가고 있는 거지.”라고 하시지는 않을까. 힘겹지만 차분하게 걷고 있는, 늙어 기진맥진한 노비구니 스님은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해서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하나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리라.

조계사 건너편 버스정류장에서 704번 시내버스를 타고 송추로 향한다. 텅 비다시피 하던 차내는 홍재동에 이르면서 콩나물시루로 변하기 시작한다.

정류장 마다 작은 실랑이가 벌어진다. 타고 싶은 사람을 말리는 버스 운전기사, 내리고 싶은데 사람에 부대끼어 소리를 지르는 승객, 텅 빈 시내버스가 극락이었다면 콩나물시루가 된 버스는 지옥 그 자체다. 그다지 멀지않은 송추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극락과 지옥을 경험하는 셈이니, 역시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닌가 보다.

만원으로 아우성을 지르던 버스는 북한산성입구에서 그 많은 사람들을 부려놓고 나서야 다시 한산해 진다.

송추계곡에 가을이 완연하다. 아직 수량이 남은 계곡에도 가을이 흠뻑 잠기어 있다.


여성봉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단풍이 한창이다. 마치 선혈이 낭자한 느낌이다.

드디어, 송추 느티나무정류소에서 하차해서 송추계곡으로 들어섰다. 계곡은 서서히 추색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좋다! 정말 좋다! 계곡 너머로 사패산 봉우리 하나가 아침 햇살을 튕겨내며 찡긋하고 눈인사를 전해온다.

구름으로 가득하던 하늘이 서서히 개이면서 가려졌던 햇살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날씨가 개이어 준다면 단풍 가득 물든 아름다운 가을 산을 감상하기엔 더없이 좋은 날이 될 듯하다. 숲 사이로 난 오솔길로 접어들고 비탈 심한 능선을 몇 차례 오르고 내리니 여성봉이 눈앞에 드러나기 시작을 한다. 길목 마다 붉디붉은 단풍이 그 선혈을 낭자하게 뿌려놓고 있다.

여성봉을 오르는 바위길에 이르면 두번의 까무라칠 만큼의 고비를 만난다. 하나는 숨이 턱으로 차오를 만큼 힘이 들어서이고, 또 한번은 너무나 아름다운 풍광때문이다.


여성봉을 오르는 슬랩에서 바라본 여성봉. 아름다운 풍광이 아닐 수 없다.


여성봉 슬랩에서 바라본 계곡과 능선의 풍경.

드디어 여성봉으로 오르는 길. 가파른 암릉이 길게 이어지는 구간으로 송추에서 여성봉으로 오르는 구간 중에 가장 험하고 기운을 많이 빼는 구간이다. 암릉 가운데로 쇠줄 난간이 설치되어 있지만 오른편 슬랩을 따라 오르기로 한다. 그래야만 중간 중간 여성봉 계곡의 아름다운 단풍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슬랩을 따라 오르다 보면 딱 두 번을 까무러치게 되는데 한 번은 숨이 턱까지 차올라 힘이 들어서 이고, 또 한 번은 계곡의 암벽 사이로 물들고 있는 단풍이 기절할 만큼 아름답기 때문이다.

위험한 장사가 많이 남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조금 더 어렵고 힘들게 오르는 길에서는 그만큼 더 아름다운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계곡을 바라보며 오르다 보면 어느새 여성봉이 그 기묘한 모습을 드러낸다. 여성봉의 ‘V'자 홈이 있는 바위는 작년부터 출입금지 구역이 되어 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밟고 지나다보니 마모가 심해져서 보전을 위하여 우회로을 만들고 출입을 금지 시켜놓은 것이다. 바로 이 ‘V'자 모양을 하고 있는 바위 홈의 모습이 여성의 생식기와 흡사하여 봉우리 전체가 여성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여성봉 정상 바로 아래 브이자 형 계곡의 바위 모습. 흡사 여성의 성기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예로부터 여성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여성봉에서 바라본 오봉의 풍경. 산불이 난듯 단풍이 절정이다.

예로부터 우리네 선조들은 남자나 여자의 생식기 모양을 닮아 있는 바위는 각별하게 신성시하였고, 이는 농경사회를 거치면서 더욱 바위숭배 신앙으로 발전했다.

생식기를 닮은 바위에 치성을 올리면 자손이 번성하게 되고, 자손이 번성해야 농사 일손이 늘어나서 더 많은 수확을 이룰 수 있기에 사람들은 이런 바위들을 찾아 정성을 올리곤 했다.

오늘날에도 생식기를 닮은 전국의 유명한 바위들은 지금도 마을의 안녕과 자손의 평안과 농사의 풍년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는 곳이 적지 않다. 그 바위의 모습이 조금은 민망스럽게 보인다고 해서 그저 웃고 가볍게 여길 것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이 이런 바위를 소중하게 보호하며 신성시한 연유를 알고 나면 이렇게 자연이 만들어 놓은 신묘한 모습에 도리어 경외감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연은 항상 자연 그대로인데 우리네 사람들이 선입견으로 이런저런 망상과 이야기를 지어 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봉 정상의 모습. 여성봉 정상은 절경 중의 절경으로 손꼽히는 명소다.


이날의 여성봉 앞에서도 사람들은 다소 짓궂은 대화를 나눴다. 어느 처자에게 그의 아버지가 하는 이야기다.

“너 여기서 기운 많이 받아 가거라. 그래야 아들 낳지.”

예나 지금이나 이런 신묘한 장소에서는 일어나는 그 마음이 같은 것일까.

여성봉의 하늘이 점점 파랗게 높고 맑아지고 있었다. 여성봉에서 발아래를 내려다본다.

산자락부터 물들기 시작한 단풍 빛이 계곡과 능선을 따라 타오르고 있다. 가을 단풍의 진수를 이곳 여성봉에서부터 만끽하는구나. 그 아름다움에 흠뻑 빠지다 보니 감동이 넘쳐 그만 가슴이 먹먹해진다.

여성봉을 빠져나오다가 재밌는 상황에도 맞닥뜨리게 된다. 산행 중이던 어느 남자가 한마디 하기를 “아까 그 봉우리가 여인봉이었던가?” 하자 같은 일행인 여자가 “뭔 여인봉? 여성봉이라니깐.” 그러자 같은 일행인 또 다른 남자가 하는 말이 “에이. 여의봉이겠지”이다.

그 순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까르르 폭소의 바다로 빠진다.

여성봉이 졸지에 여의봉으로 바뀐 것이다. 순간의 재치로 인해 여성봉이 성전환을 한 격이니 이 어찌 우습지 않은가. 산이란 이래서 좋은 것이다. 도심 어느 길가에서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가는 금방 미친 사람 취급 받기에 딱 좋지만 산에서는 산의 넉넉함으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에도 여백이 생겨나 이렇게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오봉의 절묘한 모습. 바윗돌 위에 거대한 공기돌을 얹어놓은 듯한 모양이다.


노란 단풍에 빨강 열매까지 달아놓은 팥배나무 뒤로 보이는 오봉의 모습이 몽환적이다.


이 아름다움을 어찌 언설로 표현할 수 있으랴! 이 가을 이곳을 찾아보기 바란다.


오봉에서 바라본 도봉산의 풍경.

여성봉에서 오봉을 향해 오르기 시작을 한다. 잠시 느긋하던 능선 길은 다시 가파르게 바뀌어가고 힘은 들지만 붉디붉은 단풍 빛에 취하다보면 그 피로는 시나브로 반감된다.

드디어 기암 아름다운 오봉이 눈에 들어온다. 여성봉에서 바라보던 오봉의 원경도 아름답지만 오봉을 오르면서 가까이 바라보는 기암의 다섯 봉우리의 풍경은 더욱 그 모습이 기묘하면서도 찬란한 아름다움 그 자체다.

멀리서 보면 마치 봉우리 마다 공깃돌 하나씩을 올려놓은 모습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 깎아지른 바위 봉우리에 얹혀 진 거대한 바위들이다. 실로 장중하며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이 가득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할 뿐이다.

멀리 신선대, 자운봉, 성인봉이 보인다. 어디든 눈을 돌리면 절경이다.


잎이 타오른다. 나무가 타오른다. 산이 타오른다. 가을이 타오른다. 내마음도 타오른다. 타올라라, 그리하여 내 마음속의 탐진치 삼독도 훨훨 사라지거라. 

오봉의 정상에서 여성봉을 내려다보고 멀리 삼각산의 그림 같은 봉우리들을 바라본다. 산맥 마다 노랗고 붉은 단풍 빛이 너울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시야를 파고들고 있다. 거대한 바위가 얹혀 진 오봉의 풍경이 더해 황홀지경이다. 다시 뒤를 돌아다보니 도봉의 준봉들이 산맥을 이루며 다시 또 하나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어디 하나 나무랄 것 없는 완벽한 절경의 파노라마다.

오봉을 내려와 도봉의 능선으로 간다. 남성미 가득한 도봉산의 풍경은 또 어떤 모습으로 어떤 빛깔로 반겨 맞아줄까. 어떤 장관이 펼쳐질지 모르니, 벌써부터 가슴이 울렁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