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도봉산을 오르고 있다. 부슬부슬 쌀알만한 눈이 흩날리면 언제나 도봉산을 올랐었기에 오늘도 산을 오르고 있다. 더구나 새해 벽두에 오르는 산이라 감회가 더하다.

눈발이 거세질수록 삼라만상이 흰 눈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흰 눈이 소담스럽게 내리는 모습을 보면 문득 연꽃을 떠올리곤 한다. 하얀 눈이 내려 세상을 온통 백색으로 덮어버릴라 치면 눈이 연꽃과도 참 많이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진흙탕의 썩은 물에서 잎을 틔워 올리고 다시 꽃대를 올려 꽃잎들을 피워내면 방죽이 온통 연분홍빛으로 가득하던 연밭의 풍경!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 위로 흰 눈이 내리면 풍경은 어느새 순백의 맑고 깨끗한 세상으로 변해있는 것이다. 마치 연꽃이 썩은 물을 정화하듯, 내리는 흰 눈은 세상을 무욕의 순결함으로 가득 채워 놓는다.

망월사로 오르는 계단이 눈 속에 파묻혀 길이 허옇다. 신정 삼일의 황금연휴의 중간. 고맙게도 눈 소식이 있었다. 새벽녘에 깬 잠은 더 이상 이부자리 속에서 꼼지락 거리기가 힘들다. 눈이 내리는 날에는 망월사에 가야 한다.

두 해 전 겨울, 함박눈이 쏟아지던 날 도봉산의 망월사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기암의 아름다운 봉우리를 등 뒤에 둔 망월사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 이후로 눈이 오는 날이면 해 마다 망월사를 찾았고 그 아름다웠던 기억에 눈이 내리는 날이면 망월사를 그리워하곤 했다.

창문을 열어보니 눈이 내리고 있다. 아침이 밝기만을 기다린다. 어둠이 걷히는 시간이 지겨울 만큼 더디다. 어둠이 걷히고 전철을 타고 망월사역까지 도착하는 시간까지 더디고 지리했다.

아무려나, 순백의 산 풍경이 동심으로 돌아가게 한다. 언제 봐도 좋은 겨울산의 설경. 눈 내린 겨울산은 그대로가 겸재가 그려놓은 한 폭의 진경산수화다.

얼어붙은 겨울 계곡도 낙낙장송도 만고풍상의 기암도 모두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눈 내리는 산 속에서는 사람도 나무도 바위도 물도 모두 그냥 자연이고 흰눈이다.

하얀 풍경 속을 걸어 오르는 산행. 직박구리 한마리가 눈밭에서 열심히 감 하나를 쪼아 먹기 바쁘다. 이 산중에 감나무가 있을 이유는 없고. 조심스럽게 다가서 살펴본다.

‘어라, 이 녀석 보게. 놀라지도 않네.’

하긴 요즘 산새들 웬만해서는 사람들에게 겁먹지 않는다. 가만히 살펴보니 주변으로도 쇠박새 두어마리가 열심히 모이를 쪼아 먹고 있다. 어느 산행객이 산새들이 먹으라고 감과 주변에 좁쌀을 뿌려놓고 간 것이다.

한때는 산행객들의 이런 행동에 적잖은 걱정을 했었다. 자연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살아가야 할 동물들이 자생력을 잃고 인간에 의해 길들여진다는 속 좁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던가. 이렇게 눈이 쌓인 산중에서 동물들이 한 겨울 먹을 것을 구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가.

특히 이렇게 작은 산새들한테는 눈까지 쌓이면 더더욱 모이를 찾는 일은 쉽지 않을 터인데. 이렇게 과일 두개 좁쌀 한줌을 놓고간 산행객은 이타행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산새들아. 미안하다. 미안하다.

속좁고 미련한 중생이 깨달음 하나를 얻는 순간이다. ‘직박구리, 쇠박새, 바위종다리, 딱새, 개똥지빠귀, 솔새, 할미새 모두모두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구나. 내 다음부터 산에 오를적 마다 너희들 모이 꼭 챙겨가마. 건강하게 올 겨울 잘 나도록 해라.’

구비 구비 이어지는 계단 길을 오르니 머리 위로 망월사가 그 자태를 보이기 시작한다. 해탈문 앞에 서니 눈에 익은 문구가 반겨 맞아준다.

'아니 오신 듯 다녀가시옵소서.'

아니 온 듯 다녀가소서, 아니 온 듯 다녀가소서라…. 하긴 산도 절집도 아니온 듯 다녀가야 할 일이다. 산이고 절집이고 속세의 사람들은 자꾸 무언가를 남겨두길 좋아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산하가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제발 아니온 듯 다녀가길, 제발 쓰레기 하나 남기지 말고 돌아가기를!.

해탈문을 들어서면서 합장 세 번을 하고 영산전으로 먼저 오른다.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이면 영산전에서 내려다보는 망월사의 풍경이 일견이기 때문이다.

영산전으로 오르다보면 경기도문화재자료인 천봉선사 탑비와 천봉당 태흘비를 만나게 된다.

그 위로 문수굴이 있고 부도와 탑비 우측으로 통천문과 돌계단이 나타난다.

이 문과 계단을 오르면 먼저 망월사의 선방인 천중선원이고 계단을 다시 더 오르면 영산전이다.

통천문. 하늘과 통하는 문이란 의미다. 그렇다. 이곳에 오르면 정말로 하늘과 통하고 있는 것이다. 돌계단을 올라 먼저 천중선원 사립문 앞에 이른다. 천중선원이다. 선방의 이름이 망월사 선방답다.

망월사는 내려다보든 올려다보든 하늘 가운데 있는 듯이 보인다. 동안거 결제기간이기에 발걸음 한걸음 한걸음이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아무래도 공중부양이라도 배워야겠지 싶다. 발자국소리가 나면 스님들 정진에 방해가 되면 아니 되기에 그렇다.

영산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특히 하얀 눈으로 가득한 도봉산 망월사의 절집 풍경은 말 그대로 선계의 풍경이다.

천중선원 앞에서 바라보는 풍경 역시 기막히기는 마찬가지다. 선원 뒤로 고불원과 칠성각과 산신각의 전각들 위로 장중한 암봉, 거기에 흰눈이 더해진 설경의 풍경은 그 아름다움을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한계를 느끼게만 한다.

영산전에서 내려와 무위당 앞에 이르니 스님의 독경소리가 평온하고 잔잔하게 들려온다. 무위당 뒤로 돌아 오르면 큰법당인 낙가보전이다.

법당 안으로 들어서기가 죄송해서 편액 앞에서 삼배를 올린다. 눈밭을 몇 번을 들락거렸더니 이미 양말까지 젖어서 들어설 엄두가 나질 않기 때문이다.

기와로 소박하게 담을 쌓아놓은 칠성각 앞에 오르니 다시 기암을 이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과 마주한다. 이래서 눈이 내릴 때마다 망월사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망월사 역시 신라시대때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선덕여왕 8년 639년에 해호화상이 왕실의 융성을 위해 세운 절로 대웅전 동쪽의 토끼 모양의 바위와 남쪽의 달 모양의 월봉이 있어 마치 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모습 같다고 해서 망월사(望月寺)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아름다운 풍경과 험한 산세에 둘러싸여 있으니 큰스님이 많이 나온 절집이 될수 밖에 없을 듯하다.

오래오래 머물고만 싶은 망월사를 뒤로 두고 떼어놓는 발걸음은 아쉬움으로 가득하다. 도봉산의 설경을 마저 보지 못하면 또 다른 아쉬움에 후회하는 마음이 남을 듯싶어서이다. 포대능선 앞에 도착하니 도봉의 준봉들의 내뿜는 위용이 말 그대로 장관이다. 어디선가 몰려 온 구름에 휩쌓인 풍경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선인봉, 자운봉, 신선대. 줄줄이 늘어선 봉우리 마다 흰색이 덧칠해져 있다.

다락능선을 따라 내려 오는 길. 자꾸만 자꾸만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 두고 가는 망월사와 그 아름다운 절집을 품고 있는 도봉산이 자꾸 미련이 남아서다.

오늘 또 폭설이 내리고 있다. 폭설주의보에서 경보로 바뀌면서 함박눈이 지붕에도 마당에도 가득하다. 눈 내리는 망월사가 다시 그리워지는 한낮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