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의 도피안사를 찾아가는 길은 경원선 통근열차의 기착지인 동두천역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이제는 몇 구간에만 남아 지선에서 운행 중인 통근열차에 올라탄다. 달랑 객차 3량짜리 열차지만 기차를 타는 여행의 즐거움만은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출발을 하고서도 열차는 내내 속도를 내는 법이 없다. 느리게, 느리게 달려간다. 그 덕분에 차창 밖으로 스치듯 지나가는 풍경들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온다. 느림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이다.
느린 통근열차는 느린 대신에 아름다운 경관을 선명하게 감상할 기회를 준다.
경원선의 마지막 역인 백마고지 역의 모습. 철마는 달리고 싶다!
빠름, 빠름, 빠름을 외치는 디지털 시대에 느림, 느림, 느림을 자랑하는 아날로그 여행이 바로 경원선 기차여행이다. 세상을 모두 지워버린 안개. 안개는 마치 동두천과 연천 일대를 삼켜 버린 점령군 같다. 아련히 떠오르는 군대 시절의 기억. 그때도 이곳은 늘 아침에는 무거운 안개가 깔렸었지. 세상을 지워 버리는 묵직한 안개만은 아직도 변하지 않고 짙게 깔려 있구나. 그런 군 시절의 회상에 젖어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자니 통근열차는 이윽고 백마고지 역에 도착한다. 약 한 시간가량의 시간을 소요해 도착한 것이다.
달리고 싶어도 더 이상 달리지 못하는 백마고지 역의 철마. 끊겨진 철길이 분단의 시련을 아련한 아픔으로 전해준다. 이 철길을 달려서 금강산에 갈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는 것일까? 기자는 백마고지 역에서 삼거리로 걸어 나와 동송행 버스에 오른다.
마을을 지나고 백마고지 앞을 지나 전쟁의 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노동당사를 지나서 서너 정류장을 더 지나면 도피안사삼거리다.
도피안사 경내를 들어설 때 첫 문인 사천왕문의 모습.
범종각과 종무소로 이용되는 당우의 모습.
삼거리에서 버스에서 내려 도피안사로 향한다. 철원이 남한의 최북단임을 확인이라도 시키려는 듯 논바닥에는 아직 잔설이 가득하다. 낮은 오르막이 이어지는 편안한 길을 300m를 걸어서 경내로 들어선다.
도피안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신흥사의 말사로 신라 경문왕 5년 서기 865년 도선국사가 향도 1,500명과 함께 철불과 삼층석탑을 조성하고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천년고찰이다.
한때 한국전쟁의 치열한 격전지였던 철의 삼각지 철원. 그 중심에 있던 이곳 도피안사 역시 전쟁의 참화를 비켜가진 못했다. 폭격에 의해 전소되어 버린 도피안사. 그 재건 과정에는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전해지고 있다.
15사단 사단장 이재명 장군은 꿈에 불상이 나타나더니 땅속에 묻혀있어 답답하다고 말하는 꿈을 꾸었고 그 다음날 전방시찰을 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안내 받고 찾아간 곳이 폐허가 된 도피안사였는데 장병들을 시켜 땅을 파던 중에 발견된 철불이 지금의 국보 63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다.
현재 가설 법당에 모셔져 있는 국보 제63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
한때 개금을 해서 본 모습을 잃었던 철조비로자나불은 뒤에 개금을 벗겨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도피안사의 경내를 돌아본다. 피안에 이르는 즉 해탈에 이르게 된다는 절집 도피안사. 조용하고 고즈넉한 산사는 이미 피안이다. 그런데 철불이 모셔져 있어야 할 대적광전이 없어지고 천막 한 동이 쳐져 있을 뿐이다. 더욱 규모가 크게 증축하기 위해 허물고 조만간 중건 공사가 시작이 될 모양이다. 올 백중이면 장엄한 대적광전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도를 마친 스님께서 귀띔을 해준다.
현재는 임시 가설 법당에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가설 법당으로 들어서니 짙은 검붉은 빛을 띠고 있는 철불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법당 안을 가득 채운 온화한 미소가 일품이다. 표정부터 옷자락 하나하나까지 모두 섬세하게 표현된 신라 말의 불상답게 당당한 모습이다. 이렇게 수려한 모습이니 국보로 지정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한때 이 철불은 개금을 했었다. 그러나 개금을 마친 철불이 그 품격을 잃게 되었다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다행히 지금은 개금을 모두 벗겨내고 철불의 원래 모습을 찾았다. 원래의 아름다움 그대로 철빛 여린 광채를 발하고 있다. 소중한 성보를 잘 못 손대면 도리어 그 가치를 잃는다는 교훈을 도피안사의 철불은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현재 국보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로 지정된 삼층탑에는 금와보살(금개구리)이 살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기존의 전각을 허물고 새로이 더 큰 규모로 대적광전을 신축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도피안사의 경내 풍경. 잔설이 남아 이곳이 최북단 사찰임을 실감하게 한다.
또 이곳 도피안사는 KBS와 SBS TV에 방영된 기도 드리는 개구리 ‘금와보살’로도 유명세를 탔다. 보물 제 223호인 삼층석탑 안에 개구리 한 마리가 살고 있는데 이곳 스님께서 기도를 드리는 시간이면 나와 개구리도 함께 기도를 드리고 들어간다고 하여 세간에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 좁은 석탑 사이에서 개구리가 들어가 산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노릇인데 스님의 기도 시간을 맞춰 나온다고 하니 신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칩도 지났으니 이곳 금와보살도 겨울잠에서 기침을 하였으려나. 철원은 아직도 조석으로 추위가 심하니 아무래도 금와보살을 보려면 조금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할 듯싶다.
도피안사를 돌아보고 다시 버스를 타고 옛 노동당사로 간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옛 노동당사의 건물 사방에는 포탄의 흔적과 총탄의 흔적이 가득하다.
옛 북한의 노동당사 건물.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6.25전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한 노동당사의 총탄과 포탄의 흔적들.
해방이 되고 이념으로 인해 남과 북으로 갈리면서 철원은 38도선 위쪽에 있어 북한 땅이 되었다. 북한은 이곳 철원에 노동당사를 짓게 되는데 그 양식이 러시아의 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교전이 일어났을까. 포탄과 총탄의 흔적이 너무나 촘촘하다. 민족상잔의 비극의 현장에서 기자는 아픈 현대사의 그림자를 생생히 목도하고 있다. 발길을 돌려 다시 백마고지 역으로 향한다. 겨울을 나기 위한 철새들이 비무장지대를 넘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우리는 언제나 저 철새들처럼 저 분단된 허리띠를 풀어내고 자유로이 왕래를 할 수 있을까. 경원선과 경의선 전구간이 개통이 되고 대륙을 건너 유럽까지 열차를 타고 여행하는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