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대문구 석관동 천장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조선 제20대 경종과 선의왕후 어씨의 왕릉이 의릉이다. 가을이 깊어가고 그 풍경이 짙어가던 절정의 가을 날, 석관동의 의릉을 찾았다.

조선왕조의 27명의 왕 중에 가장 그 존재감이 미미했던 경종. 경종의 존재감만큼 의릉 역시 서울 도심에 있으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왕릉인 듯싶다. 의릉은 우리나라의 훌륭한 예술인들을 양성하는 요람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옆에 자리하고 있는데 의릉의 능역에는 과거 군사독재정부 시절 현재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들어서면서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었고 아주 심각한 훼손이 시작됐다고 전한다.

의릉의 봉분 풍경. 의릉은 숙종과 희빈 장씨 사이에서 난 경종의 무덤이다. 경종은 재위기간 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왕을 한 비운의 왕이었다. 그의 무덤은 훗날 현대사에서도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유린되는 아픔을 겪었다.
 

어느 왕릉을 가도 조선의 왕릉 입구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소중한 문화재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자랑스럽게 서 있다.


의릉의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으로 이르는 참도. 군사독재정권은 이곳에 연못을 파고 외래수종을 심기도 했다.
 

의릉과 정자각의 아름다운 가을 풍경.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가 아닐 수 없다.

의릉의 우측 능역을 절개해서 운동장과 중앙정보부 청사 건물을 조성하였고, 좌측 능선도 파헤쳐서 건물과 강당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절대 손대지 말았어야 할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의 사초지에 연못까지 팠으니 당시 군사정부가 얼마나 무식했고, 최소한의 역사관이나 문화의식이 없었는지를 알게 해 준다.

그렇게 훼손이 되고 베일에 가려졌던 의릉은 1996년부터 일반인 공개가 시작되면서 시민들에게 다시 알려지기 시작했다. 2010년 세계문화유산 지정 1주년을 맞으면서 대대적인 정비와 복원 작업으로, 그나마 오늘날의 모습을 되찾게 된 것이다.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정권이라도 조상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이처럼 난도질하였으니 도굴범이나 오랑캐 취급을 받아 마땅하다. 훗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 같은 소중한 문화유산도 함부로 다뤘는데 하물며 일반 시민들과 민주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함부로 대했을까. 이곳이 독재의 끔찍한 상흔을 간직한 공포의 공간이었다는 생각에 울컥 눈물이 고인다.

의릉 옆,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 한 기념으로 보존 중인 옛 중앙정보부 강당 건물을 마주 하면서 잠시 모골이 송연한 느낌을 받은 것도 이런 독재의 역사들이 만든 느낌 때문이었으리라. 그런 자들의 후예들이 지금 시대에서 지탄 받는 것은 상처 입은 의릉만 보더라도 마땅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잘 조성된 소나무 숲이 아름답다. 소중한 문화유산을 제대로 가꾸려는 노력이 뒤늦기는 했지만 다행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의릉의 능침 옆에 세원진 옛 중앙정보부 강당 건물. 이곳에서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어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경종은 숙종과 희빈 장씨 사이에 태어 난 아들로 불과 서른여섯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쳤다. 4년간의 짧은 재위기간이 말해 주듯 병약했고 아버지 숙종으로부터 미움까지 샀으며 들끓는 정쟁으로 인해 왕 노릇까지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비운의 왕이었다.

영조의 형님으로 더 잘 알려진 경종의 의릉은 슬픈 현대사에 의해 이렇게 유린당했고, 조선왕릉 전체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야 제 모습을 조금이나마 되찾고 있는 것이다.

슬픔이 깃든 왕릉, 의릉에도 가을빛이 완연하다. 슬픈 역사를 간직했기에 그런지는 몰라도 가을빛이 흥건하게 젖은 의릉은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다가 오고 있다.

서울 회기동 경희의료원 옆에 위치한 연화사. 연화사는 의릉의 능침사찰로 폐비 윤씨의 기일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연화사의 대웅보전. 연화사는 능침사찰로 제례에 쓰이는 두부를 만드는 조포사의 역할도 했다.


절집 마당에 들어서자 들려오는 은은한 대금소리를 좇아가니 대금사사를 하는 한 스승과 제자의 모습이 눈에 띤다.


연화사 마당에 있는 감나무에 감이 실하게 열렸다. 감을 따지 말라는 당부의 표지도 세워져 있다.

경종의 의릉을 돌아보고 능침사찰 연화사를 찾았다. 연화사는 조계종의 직할사찰로 회기동 경희의료원 옆 골목에 다소 옹색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아무래도 우뚝 솟은 의료원 건물에 가려 있다 보니 초라한 모습으로 비춰지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불교가 배척을 당하던 시대에도 조선왕실의 지원을 받았던 왕실의 원당사찰들, 즉 봉은사나 용주사, 흥천사, 봉선사 등에 비하면 그 규모가 현저하게 작다.

연화사는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와 깊은 관계가 있는 사찰로 알려져 있다. 시기와 질투가 많던 윤씨는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까지 내는 일을 저질렀으며, 그 사건으로 인해 폐서인이 되었고, 3년 뒤에는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았다. 그의 묘는 지금의 회기동 경희대학교 일대에 위치했는데, 묘를 쓰고는 회묘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들 연산군이 즉위하자 묘는 능으로 승격되었고 폐비 윤씨는 제헌왕후로 추모되었으며, 능호까지 회릉으로 고치고 품격을 올렸다. 그러나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나면서 회릉은 도로 회묘로 강등되고 말았다.

이곳 연화사도 연산군 당시 회릉으로 승격되면서 왕실의 안위와 폐비 윤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되었고 훗날 경종이 승하하자 이곳 연화사가 있는 천장산 자락에 의릉을 조성하면서 의릉의 원찰로 삼기도 하였다. 회릉이 지난 1955년에 고양시의 서삼릉으로 이전하였지만 연화사에서는 지금도 음력 8월 15일 추석 명절에 폐비 윤씨 제헌왕후의 기일재를 지내고 있다. 또한 폐비 윤씨의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이 기일에 맞춰 기일재에 참석하고 있다고도 한다.

연화사가 자리 잡고 있는 산자락의 이름이 천장산이다. 천장산은 예로부터 명당 중에 명당으로 손꼽혔는데 천장은 불교적인 의미로 '부처님께서 꽁꽁 숨겨 둔 보물 같은 땅'이란 의미로 불교의 사찰이 들어서는 길지로 여겼고, 그런 연유로 이곳에 연화사를 창건하였다. 이름 역시 부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 머무는 곳이 연화장(蓮華藏) 세계이고, 중생의 근본적 자성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청정한 연꽃과 같으므로 연화사라 했다고 전한다.

연화사는 고종 19년 임오군란 때 소실되었다가 이듬 해 복원하였고 1993년 중건을 통해 현재의 2층으로 된 대웅보전이 있는 전각을 신축하였다.

청아하고 구슬픈 음색의 대금소리에 이끌려 들어 간 법당 1층의 문화센터. 스승과 제자가 마주 앉아서 대금연주를 사사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스승에게서 하나라도 더 배우겠다는 제자의 눈빛이 갈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이곳에서 문화강좌를 받으러 온 학생 중에 기량이 있는 학생들은 별도로 선발해 국악전공으로 대학에도 입학시켰다는 강사는 지금 제자에게도 재능이 보이는 것 같아 아낌없이 대금연주를 전수하고 있다고 귀띔한다.

절집 마당에 울려 퍼지는 낭랑하고 애잔한 대금 선율에 시나브로 가을 정취에 더욱 깊숙이 빠져든다. 붉게 익은 감나무 열매를 흔드는 스산한 가을바람이 유난히 옷깃을 헤집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