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신정아 사건으로 세상이 어수선할 즈음 조계종의 한 중진스님과 차담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부끄러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며 곤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한 이 스님의 여러 말씀 중 다음과 같은 한 마디가 나의 폐부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만일 내가 중이 아니고 불교를 몰랐던, 막 종교를 하나 가져보려고 생각 중인 사람이었다면 나는 결코 불교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말이지요. 그 가르침이 아무리 좋은들 무슨 소용입니까. 거기에 속한 사람들(스님들)의 모습이 엉망진창인데…. 천주교 사제들을 보십시오. 물론 이런저런 의견도 있고 또 비판의 시선도 있습니다만, 삼성이라고 하는 거대한 조직을 바로잡겠다며 저렇게 용기 있게 나서고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나 같은 사람도 이런 상황이면 천주교로 갈 건데 다른 사람들이야 더 말할게 있나요. 오늘 우리 불교계는 어떻습니까. 고작 신 아무개와 어느 스님과 무슨 거래가 있느니 없느니 따위의 낯 뜨거운 이야기들이 온 동네에 회자되고, 학교와 교단은 벌집 쑤신 듯 난장판이 돼도 누구하나 책임지는 인간도 없고….”
그렇다. 이 스님의 말처럼 현재 한국불교는 매우 어려운 지경을 맞고 있다.
MBC ‘뉴스 후’의 얼굴을 들기 어려운 보도에도 그저 ‘유감’ 표명으로 넘길 뿐 어디에도 자정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이 사건 역시 흐지부지 잊혀질 것이 뻔하다.
돌이 섞인 밥이라고 하더라도 돌보다는 쌀이 더 많은 것처럼, 불자이거나 불교에 호감을 가진 사람들 중에 실제로 많은 이들은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그래도 그렇지 않은 훌륭한 스님들이 더 많지 않느냐며 애써 위안을 갖는 이가 많았다.
미약하지만 참회와 자정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저 봐라. 그래도 불교에는 저런 분들이 아직 많지 않느냐’며 교단에 대한 애정을 접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른바 신정아 사건의 전개와 이를 대하는 교단의 몰염치한 행태를 보면서 결코 흔들리지 않았던 불교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거둬들이는 이들이 최근들어 부쩍 많아졌다.
지난 20여 년 간 한국사회에서 불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이렇게 빠르게 줄어들고 있는 경험은 없었던 것 같다. 이제는 정부 내각에 불자가 있느니 없느니, 국회의원에 불자가 몇 명이니 따위를 따지며 종교편향 불교탄압 운운하는 것조차 낯 뜨거울 뿐이다.
지금도 수입 좋은 절에서 호의호식하는 이들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쩌다가 우리 한국불교가 이런 지경까지 되었나 싶을 정도다.
어쩌면 현재 한국불교의 현실에서는 그런 실망이나 절망조차도 사치에 가깝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어떤 사건이 터졌을 때, 이를 치유하는 기능이 실종됐다는 것에 절망하는 것이다.
시나브로 한국불교에는 이런 치유의 기능이 사라진 듯하다. 어떤 일이 발생했을 경우 그것을 어떤 절차를 거쳐 어떻게 마무리하는가의 치유 또는 자정의 프로세스가 한국불교에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반성이나 참회의 모습은 없다. 그저 버티기나 시간 끌기로 이런저런 부끄러운 일과 충격이 잊혀 지기를 바라는 것으로 능사를 삼고 있다. 사태가 좀 심각하다 싶으면 참회법회니 어쩌니 하면서 수천 명이 한 곳에 모여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노라고 불보살님께 집단참회를 한다. 그러나 그뿐이다.
이는 죽음을 부르는 암에 걸렸는데도, 당장 아프거나 피가 철철 흐르지 않으니 내일이 아닌 다 남의 일인 양 보고 있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문제는 이런 짜증스런 현상들이 불러올 끔찍한 과보다. 그 과보는 소멸 또는 파멸이다.
다시 말해 치유와 자정의 프로세스 실종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한국불교, 교단, 불자들이 파멸로 가는 프로세스에 갇혀 추락의 절벽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아직 딛고 설 땅이 눈꼽 만큼 남았다는 알량한 ‘여유’로 곧 다가올 낭떠러지의 두려움을 모르고 있거나 애써 외면한 채 21세기 초 한국불교는 빠르게 파멸의 구렁텅이로 달려가고 있다.
입으로는 ‘안수정등’의 교훈을 운운하면서도 파멸과 소멸의 물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제 처지는 모르고 있는(아니면 모른척 하는) 게 한국불교의 현주소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쩔 것인가. 소멸, 파멸의 길로 마치 제어장치 없는 열차처럼 달려가고 있는 한국불교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사회에서 후안무치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는 우리의 교단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주체는 스님들인가, 아니면 재가불자들인가. 아니면 사부대중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인가. 스님들에게만 책임을 묻곤 하는 관행의 반복이 궁극적 해결대안이 될 수 있는가. 이제는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할 시점이 아닐 수 없다.
두 편으로 나뉘어 싸우는 코삼비의 제자들에게 화해를 종용했지만 듣지 않자 무소의 뿔처럼 홀로 그곳을 떠났던 부처님의 고뇌에 찬 선택이, 싸움으로 부처님이 떠나고 난 뒤에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는 승단에의 기부와 공양 거부라는 압박수단을 동원해 승단의 싸움을 종식시켰던 코삼비의 재가불자들의 때늦은 결단이 주는 교훈을 우리는 곰곰이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스님들만 탓하지 말고 재가불자들도 스스로 조고각하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보시라는 명목으로 스님들에게 외제승용차를 선물하고, 값진 것들을 건네주는 ‘골빈’ 재가자들이 있는 한 한국불교의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자화상은 스님들만이 만드는 게 아니라 4부중 모두가 함께 일궈가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불교가 신뢰와 청정의 상징으로 거듭나는 것,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귀의처로 기능하는 것, 이것은 출가와 재가가 함께 짊어지고 나가야 할 시대적 공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