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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으로 집을 짓지 말라”

진흙속의연꽃 | | 2016-09-26 (월) 11:33

[‘진흙속의연꽃’의 불교이야기] 97-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사변적 견해에 집착하는 것은 당면한 괴로움 해결에 아무 도움 안 돼”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류가 생겨난 이래 아마 모든 사람들의 의문사항일 것이라 본다.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 책도 보고 스승도 찾는다. 더 깊이 알기 위하여 학문을 하기도 한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물리학이다. 물질을 통해서 궁극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몇 년 전 TV에서 물리학 관련 프로를 보았다. 프로의 제목은 ‘스티브 호킹, 우주를 말하다.’였다. 이 프로에서 어느 노과학자는 스위스의 입자가속기센터의 벽면에 걸린 폴 고갱의 작품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를 소개 했다. 이 그림이 최첨단 물리학연구소의 벽면에 걸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기 위해서 이 만한 말이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류가 생겨난 이래 아마 모든 사람들의 의문사항일 것이라 본다.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 책도 보고 스승도 찾는다. 더 깊이 알기 위하여 학문을 하기도 한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물리학이다. 물질을 통해서 궁극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몇 년 전 TV에서 물리학 관련 프로를 보았다. 프로의 제목은 ‘스티브 호킹, 우주를 말하다.’였다. 이 프로에서 어느 노과학자는 스위스의 입자가속기센터의 벽면에 걸린 폴 고갱의 작품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를 소개 했다. 이 그림이 최첨단 물리학연구소의 벽면에 걸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기 위해서 이 만한 말이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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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폴 고갱)
 

폴 고갱의 작품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는 작가의 슬픈 사연에서 기인한다. 고갱이 타이티에서 여생을 보낼 때 사랑하는 딸이 죽었다. 딸이 죽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폴 고갱은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하여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 의문을 그림으로 표현 하였는데 자살하기 직전에 그린 것이라 한다.
 
물리학자는 왜 스님이 되었을까?
 
우리는 어디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금을 막론하고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원한 화두이다. 특히 고통에 가득 찬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말은 절박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쉽게 풀리지 않는다. 인간의 지식과 사유로 풀어 보려 하지만 더욱 더 의문만 일어나고 혼란만 가져 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에게 의지하는지 모른다. 신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또 어떤 부류는 죽어버리면 끝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물질을 기반으로 단멸론적 허무주의에 기인한다.
 
과학은 물질을 기반으로 한다. 과학자들은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서 궁극을 보고자 한다. 마침내 거대한 입자가속기까지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물질을 쪼개면 쪼갤수록 오리무중이 되어 버린다. 우주와 같은 거시적 세계와는 달리 미시적 세계에서는 법칙이 들어맞지 않는 것이다. 제멋대로의 세계와 같다. 그럼에도 많은 성과를 올렸다. 우리가 몰랐던 많은 법칙과 원리를 밝혀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영원한 화두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대명제를 밝혀냈을까?
 
어떤 스님은 과학적 발견에 많은 기대를 한다. 세계최초로 힉스입자가 밝혀졌을 때 어떤 원로의원 스님은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가 입증 될 것이라고 상당히 기대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공즉시색’과 같은 원리를 말한다. 그러나 실망하는 과학자도 있었다. B스님 같은 케이스이다. 물리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까지 받은 스님은 젊은 시절 우주를 탐구하는 과학자였다. 그러나 물질의 궁극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존재의 근원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출가 하게 되었는데 그 해답을 불교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
 
세상의 원리를 물질에서 찾고자 하는 자들이 있다. 과학자들이 대표적이다. 물질을 쪼개고 쪼개다 보면 궁극적 원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얻어진 것도 많다. 이렇게 탐구하여 상대성이론이 나오고 최근에는 ‘끈이론’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렇다면 거시적 세계와 미시적 세계의 탐구에 의한 과학적 원리가 현재 당면한 고통스런 현실에 도움을 주고 있을까? 힉스발견으로 인하여 색즉시공공즉시색의 원리가 밝혀졌다고 해서 현재 당면한 고통이 해결될 수 있을까?
 
물질을 탐구하여 과학적 원리를 밝혀냈다고 해서 당면한 고통스런 현실이 해결되지 않는다. 물질을 아무리 쪼개도 물질에 대한 것일 뿐 정신적 영역까지 미칠 수 없다. 설령 정신적 영역까지 탐구했을지라도 ‘생로병사우비고뇌’의 영역까지 이르지 못한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방법에 이르는 길까지는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물리학자는 스님이 되었을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일체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세상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세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산천초목과 삼라만상, 그리고 우주를 말한다. 이를 기세간이라 한다. 그래서 이 세계에서 태어나 이 세계에서 살다가 이 세계에서 죽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갠지스 강의 작은 모래 알갱이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상(loka)은 전혀 다르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상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서의 세상이다. 세상이 있어서 내가 세상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놓은 세상에 사는 것이 된다. 이런 세상을 일체(sabba)라 한다.
 
부처님은 일체에 대하여 명쾌하게 정의했다. 불교적 세계관이라 볼 수 있는 일체는 어떤 것일까? 부처님은 “일체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각과 감촉, 정신과 사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바로 일체라고 한다.” (S35:23) 라고 정의했다. 이런 일체를 누가 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누군가 ‘나는 이러한 일체를 부인하고 다른 일체를 알려주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공허한 말일 뿐이다. 만약 질문을 받으면 그는 대답할 수 없고, 더 나아가 곤혹스러움에 쩔쩔맬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그의 감역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S35:23)
 
 
일체를 부정하는 자들은 쩔쩔맬 것이라 했다. 그 어떤 것도 눈, 귀, 코 등 여섯 가지 감역을 벗어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일체가 생겨나는 원리는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접촉 하였을 때 의식이 생겨나는 것으로 본다. 만일 의식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세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시발점을 접촉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M18) 라 했다. 
 
어떻게 희론이 발생되는가?
 
모든 것은 접촉에서 시작 된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 역시 시발점은 접촉이다. 접촉으로 조건으로 하여 느낌이 발생되기 때문이디. 그런 느낌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이렇게 세 가지 중에 하나이기 쉽다.  그런데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희론으로 전개된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M18) 라 했다. 이런 전개는 12연기와 다른 것이다. 12연기에서는 느낌 다음에 갈애가 일어난다. 그러나 희론이 일어날 때는 느낌 다음에 지각(saññā)이다. 지각한 것을 사유한다고 했다. 사유(vitakka)는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것에 대하여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되면 생각으로 하나의 세계를 만들게 된다. 생각 속에만 있는 세계를 말한다. 이를 ‘희론’이라 했다. 그래서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라 했다.
 
희론은 망상을 말한다. 이를 빠알리어로 빠빤짜(papañca)라 한다. 초불연에서는 ‘사량분별’이라 번역했다. 이 단계가 되면 현실의 세계를 떠난 것이다. 오로지 생각 속에서 집을 만들어 놓고 사는 것이 된다. 상상속의 거대한 사념의 구조물이 희론이다. 이 희론에 대하여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서 시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난다.”(M18) 라 했다. 여기서 주목할 말은 삼세라는 말이다.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이나 관념이 생겨난다고 했다. 이는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로 시작되는 삼세에 대한 15가지 의문과 맥락을 같이한다.
 
10가지 형이상학적 의문
 
말룽끼야뿟따는 인생과 자연과 우주에 대하여 의문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런 문제를 풀기 위하여 출가 했는지도 모른다. 이는 경에서 “세상은 영원하다든가,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든가, 세상은 유한하다든가, 세상은 유한하지 않다든가, 영혼은 육체와 같다든가, 영혼은 육체와 다르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든가. 여래께서는 이러한 것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못마땅하고, 나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M83) 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부처님은 이런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세상이 영원하다고 말하면 영원주의의 견해가 되는 것이고,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고 보면 허무주의적 견해가 된다. 열 가지 사변적 견해는 부처님 당시 외도들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사변적 견해는 망상이고 희론일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독화살의 비유를 들었다. 독화살을 맞은 자가 독화살이 어디서 날아 왔는지 등을 알려고 한다면 그것을 알기도 전에 죽을 것이라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변적 견해에 집착하는 것은 당면한 괴로움의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음을 말한다. 한마디로 10가지 의문은 무익한 것이다.
 
삼세에 대한 15가지 의문
 
말룽끼야뿟따가 의문한 ‘세상은 영원한가?’ 등의 열 가지 견해와 유사한 견해가 있다. 그것은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없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어떻게 지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했을까? 나는 미래세에 있을까? 나는 미래세에 없을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될까? 나는 미래세에 어떻게 지낼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되어 무엇으로 변할까? 또는 현세에 이것에 대해 의심한다. 나는 있는가? 나는 없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있는가?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M2) 에 대한 것이다. 특히 마지막 구절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항목을 보면 마치 폴 고갱의 작품 제목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연상케 한다.
 
‘나는 누구일까?’ 라며 삼세에 걸쳐서 고민한다면 이는 번뇌에 해당된다. 마음이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를 수시로 왔다 갔다 하면서 존재의 근원, 궁극적 실재를 탐구해 보지만 여섯 감각영역을 떠나 있다면 희론이 되기 쉽다. 희론은 망상과 같은 말로서 사념의 구조물이라 볼 수 있다. 생각으로 기와집을 짓는 것과 같다.
 
희론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물들이면 번뇌가 된다. 사유의 근거 없는 확장으로 공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과 같다. 상상 속에서 기와집도 만들고 연애도 하는 것과 같다. 이를 “희론이 시간과 존재에 관한 관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과거, 미래, 현재 삼세에 걸쳐서 ‘나는 누구일까’ 라든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며 고민한다면 실체도 없는 개념을 붙들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으로 설명한다.
 
마두삔디까경(M18)에 따르면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서 시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난다.”라 했다. 이는 삽바사와경(M2)에서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로 시작 되는 삼세에 대한 의문과 일치한다. 공통적으로 삼세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지나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사는 것은 현실적이 못하다. 생각이 탐·진·치에 오염되면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있게 되어 번뇌만 증장된다. 그래서 삼세에 걸쳐서 의문하는 것에 대하여 이것을 “견해의 심취, 견해의 정글, 견해의 험로, 견해의 왜곡, 견해의 몸부림, 견해의 결박이라고 부른다.” (M2) 라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결박에 묶여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 묶여 있을 때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의심극복청정
 
열 가지 형이상학적 견해에 집착하는 것은 번뇌에 해당된다. 또 삼세에 걸친 열다섯 가지 의문 역시 번뇌에 해당된다. 그런 번뇌에는 감각적 욕망의 번뇌, 존재의 번뇌, 사견의 번뇌, 무명의 번뇌 이렇게 네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여기서 열 가지 또는 열다섯 가지 견해는 오염된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사견의 번뇌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정도론에 따르면 삼세의 번뇌를 벗어나는 방법에 대하여 설명해놓았다. 이를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kaṅkhāvitaraṇavisuddhi)’이라 한다.
 
의심극복청정이란 무엇일까? 이는 칠청정 중에서 네 번째 단계이다. 정신과 물질은 항상 조건에서 생긴다든가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것 외에는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조건과 업으로 파악했을 때 “조건에 따라 정신-물질이 일어나는 것을 본 뒤 현재에 이렇듯이 과거에도 조건으로부터 생겼고, 미래에도 조건으로부터 생길 것이라고 관찰한다.”(Vism.19.10) 라 했다. 이렇게 관찰할 때 삼세에 대한 의심은 사라질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견의 번뇌를 없앨 수 있을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연기법을 특징으로 한다. 모든 것은 연기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한다.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소멸하는 현상을 이 몸과 마음에서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관찰하였을 때 외도들의 견해에 지나지 않은 삼세에 대한 15가지 의문도 사라질 것이라 했다.
 
조건 발생과 조건소멸을 관찰하면

 
무엇이든지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모르기 때문에 답답한 것이다. 알면 사라지는 것이다. 부처님의 연기법을 알면 ‘세상은 영원한가?’ 등의 10가지 의문과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등의 15가지 삼세에 대한 의문은 사라진다. 이는 이 몸과 마음에서 있는 그대로 관찰하기 때문이다. 이를 청정도론에 따르면 ‘법들의 조건에 대한 지혜’‘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 또는 ‘바르게 보는 지혜’라 한다.
 
 ‘세상은 영원한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이는 영원주의적 견해에 대한 것이다. 이런 의문은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S12.15) 라 했다. 소멸의 원리로 영원주의를 논파한 것이다. 연기의 역관으로 설명된다. 연기의 역관은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라고 되어 있다. 무상하게 조건 소멸하는 것을 관찰하였을 때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절대유로서의 극단은 거짓이 된다. 그래서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라고 보는 영원주의는 희론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는가?’에 대한 견해는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이는 부처님이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S12.15)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연기의 순관에 따르면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라는 정형구로 되어 있다. 조건발생함을 관찰하면 ‘몸이 무너져 죽으면 정신도 죽어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허무적인 견해가 된다. 따라서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는 단멸론적 견해는 파기된다.
 
지금 당면한 괴로움을 해결 하려면 현상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지 않고 있는 그대로 현상을 관찰 했을 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우리 몸과 마음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우리 몸과 마음을 넘어서 다른 것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면 공허한 것이 된다. 오온을 벗어나 거시적 우주론이나 미시적 양자론으로 ‘우리는 어디서 어디로 가는가?’라며 존재의 근원을 찾는다면 실패하고 말 것이다. 또한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벗어나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며 이 몸과 마음 밖에서 찾고자 한다면 역시 실패하고 말 것이다.
 
희론을 말하는 자들
 
종종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다. 대부분 잡담을 한다. 그 중에서도 정치이야기를 즐겨 하는 것 같다. 특별히 하는 일 없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공원에서 또는 식당에서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정치현안과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그런데 의견이 갈리는 경우 여와 야가 대결하는 것처럼 치열하게 싸운다. 입에 도끼를 문 듯, 입에 칼을 문 듯 상대방을 공격한다. 이런 말싸움이 신체적 접촉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와 같은 노인들의 정치이야기는 공허하게 들린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유튜브를 보면 각종 법문이 올라 있다. 그 중에 깨달음과 관련하여 ‘이것’을 말하는 자들이 있다. 이것만 알면 된다고 한다. 자신의 말을 듣다 보면 ‘언하대오(言下大悟)’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의 입만 바라보면 된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다 보니 교리나 수행도 필요 없다고 말한다. 마치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듣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현실과 관련 없는 ‘이것’에 대한 이야기는 희론에 지나지 않는다.
 
초기경전을 보면 공개토론장이 등장한다. 주로 외도들이 토론 하는데 경에 따르면 “시끄럽게 왁자지껄 큰 소리로 떠들며 여러 가지 잡담”(D9) 하는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정치이야기 등 수십 가지가 소개 되어 있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세상은 영원한가?”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등도 토론 될 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토론은 공허하다. 당면한 현실문제의 해결에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노인들이 공원에서 정치이야기 하는 것 같고 유튜브에서 ‘이것’을 말하는 것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일체를 버리고 다른 일체를 말한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여섯 감각영역의 일체를 버리고 오온 바깥에서 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공허하게 말로만 떠벌린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여섯 감역이라는 일체를 벗어났기 때문에 “만일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더욱 더 큰 곤경에 처할 것이다.”(S35.23) 라 했다. 우리 몸과 마음 밖에서 무언가 찾으려하는 것은 생각이 탐·진·치에 오염된 희론이고 번뇌에 지나지 않는다.
 
“연기와 연생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부처님은 이 몸과 마음을 관찰하라고 했다. 오온 밖에 있는 존재의 근원이나 궁극적 실재가 대상이 될 수 없다. 이 몸과 마음을 떠나서는 그 어떤 해법도 발견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계의 끝에 이르지 않고서는 괴로움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고 나는 말합니다. 벗이여,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단신의 몸 안에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있음을 나는 가르칩니다.”(S2.26) 라 했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해법은 우리 몸과 마음에 있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에서 생성과 소멸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다.
 
 
“수행승들이여, 거룩한 제자들은 이 연기와 연생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써 관찰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전생에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없었는지, 나는 전생에 무엇으로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어떻게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되었는지’ 숙세로 거슬러 올라가 가거나 ‘나는 내세에 있을지, 나는 내세에 없을지, 나는 내세에 무엇으로 있을지, 나는 내세에 어떻게 있을지, 나는 내세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될 것인지’ 내세로 달려가거나 ‘나는 현세에 있는지, 나는 현세에 없는지, 나는 현세에 무엇으로 있는지, 나는 현세에 어떻게 있는지, 나는 현세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되는지’ 현세에 의혹을 갖게 되거나 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제자는 있는 그대로 이 연기와 연생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서 잘 관찰하기 때문이다.”  (S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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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우리선불교에선 2016-09-26 13:02:41
답변  
'입차문래(入此門來) 막존지해(莫存知解)' 란 말이 있다.
사찰의 일주문에 걸려있는 글귀이다. 이 문에 들어오거든 알음알이, 갖가지 견해를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
그런데이뎃글은 2016-09-26 15:55:42
답변 삭제  
갖가지 견해가 있다는 것을 갖고 있고... 알음알이가 참 많다는 뎃글이네요...
변견(편견)도 보이고...

그렇지 않다면 본글만 조용히 읽고 사라졌어도 됐을건데...
오빠생각 2016-09-26 14:12:03
답변  
과학자는 물질의 궁극을 알고자 물질을 쪼개고 쪼개어 보았더니 텅~비어 있었다. 초끈이론에서 초끈은 물질의 실체라기 보다는 수학적인 결론이다. 인간에게 인식되어지는 물질이 아니라 수학적 개념으로서 가늠하는 것이다.  붓다가 사람을 색수상행식으로 쪼개어 분석하였더니 텅~ 비어 있었다. 무아였다.

과학자들은 물질을 석가는 정신을 쪼개어 분석하였더니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물질이나 정신이나 궁극적으로 "알수없음" 즉 실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렇다고 전무하다,라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포착되지 않아서 무(無)라고 한 것일 뿐이다. 물질이 나올 수 있는 가능태로서의 어떤 것이 분명히 있기는 하다. 물리학자들이 무에서 유(물질)가 나왔다고 말할때 무(無)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어떤 상태는 아니다. 인간의 인식 넘어의 "모름,알 수 없음"의 상태이다.

석가모니가 말한 일체(감각기관에 포착되는 우주전체)는 내가 만들었다는 말이 훗날 대승불교 유식학으로 발전한다. 유식학에서는 일체의 근원을 "식"으로 규정한다. 물론 이 식도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물질의 근원처럼 "알 수 없음"이다.

물리학자들은 물질에서 정신이 발현됐다고 보지만 대승유식학에서는 정신(식)에서 물질이 발현된 것으로 본다. 차이라면 물질은 앞에 두냐 정신을 앞에두냐는 정도이다. 알수 없는 초끈의 상태를 물질로 보냐 정신으로 보냐는 것이 과학과 불교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과학적으로 물질이란 질량을 가진 입자를 뜻한다. 그러므로 초끈상태는 아직 물질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초끈상태를 정신에너지의 근원으로 본다면 불교의 주장도 타당하다.

과학과 불교는 출발선상이 달랐지만 결과적으로는 동일한 지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현상계의 물질과 정신의 근원이 둘 일리가 없지 않겠는가.

무엇을 희론(망상)이라고 하고 무엇을 법(지혜라고 하나. 생각이 사리에 맞으면 법혹은 지혜라고 하고 사리에 맞지 않으면 희론이다. 장례식장 안에서 고인을 기리며 하는 생각은 법에 맞는 것이지만 읽다만 책생각이나 여행스케줄 생각같은 것을 한다면 희론이 된다.

초기경은 부처가 제자들에 하는 말씀이다. 수행을 하려는 제자들이 딴 생각을 하며 시간을 허비하는것이 희론이다.  선정수행을 통해 자아가 무아라는 것, 탐진치를 제거하겠다고 모인 사람들이  우주는 끝이 있는가 따위의 망상을 한다고 생각하면 부처님의 말씀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이 말씀이 과학이나 예술을 부정하기 위한 말은 아니다. 부처님은 당시 지식이나 학자, 과학자들을 존경했고 그들과 대화를 하면서 배우는 것을 좋아하셨고 제자들에게 지식인들을 존중하고 그들로 부터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달라이 라마도 부처님의 이런 모습 때문에 과학자들 만나고 배우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단지 짐승처럼 먹고살기 바쁜 인간들에게 예술은 어렵다. 예술가들은 먹고 사는 일과는 무관한 인간존재의 근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래서 대중은 예술가들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그러나 예술가들 입장에서는 인간들은 짐승과 달라야 하며, 짐승처럼 무작정 살기보다는 인간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성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리학자들이 괜히 화가의 작품을 걸어놓은게 아니다. 인간은 짐승과 달리 자신의 근원에 대해 질문하고 스스로가 내린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애를 쓴다. 난 그 과정이 진보, 인류의 진화라고 생각한다. 싯타르타가 사문유관에서 인간은 왜 태어났고 왜 병이 들며 왜 죽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고 그것을 규명하기 위해 출가하지 않았나. 과학자의 호기심은 희론이고 석가의 호기심은 희론이 아니란 말인가.

과학한다고 생로병사가 해결이 되냐 했는데 수행해서 깨달음 얻어도 생로병사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싯타르타는 병 안들었나, 늙지 않았나, 죽지 않았나? 깨달음을 통해 생로병사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인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자아가 허상임을 알면 자아가 하는 생로병사에 대한 두려움도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과학자들도 물질의 궁극을 연구하면서 인간의 본질도 텅 비어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미시와 반대로 거시적 우주를 연구하는 천문물리학자들도 미시학자들과 같이 겸손해지기는 마찬가지다. 거대한 우주에 비하면 인간은 우주에서 먼지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 하물며 인간의 자아라야.

석가는 불교를 통해 불교이외의 것을 배제하려고 가르침을 펼친게 아니다. 그런데 후대의 사람은 불교만이 진리이고 불교가 아닌 것을 진리가 아니라는 듯이 말한다. 심지어 과학까지도 배척하려고 한다. 과학이 불교를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는 것에도 반대하지만 불교를 기준으로 과학마저도 배척해야 한다는 불교도들의 주장도 배척한다.  아인슈타인은 미래에 살아남는 종교를 불교로 꼽았다. 이유는 과학과 소통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과학을 도구로 하여 불교를 공격하는 것이 부당한 것이지 과학자체가 왜 희론이며 부당한 것이 되나.

때와 장소에 맞지 않고 사리에 맞이 않은 생각이 희론이다.
예술가가 예술적 질문을 던지고 궁극을 참구하여 예술로 발표하는 것
과학자가 과학적 호기심을 근거로 질문을 던지고 규명하려는 것이 결코 희론이 되지 않는다. 그때그때 처한 상황에서 바르게 생각을 내면 그 생각이 바로 법이고 지혜이다. 경전속 붓다는 처한 상황에 맞지 않는 생각을 하자는 제자들에게 마음을 과거나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로 데리고 와서 지금 해야할 일, 지금 해야할 생각이나 행위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 상황과 맥락을 다 생략하고 경전에 있는 내용만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무차별적용하는 것은 좀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상대성 이론을 안다고 해서 생로병사로 부터 벗어나지는 못해도 인간의 무지도 깨고 그 지혜를 통해 인간이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지적인 경지도 높아졌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불교이외의 것을 모두 희론으로 매도 하지 말라. 선정수행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생각을 한다면 그 생각이 아무리 지고지순해도 모두 희론이다. 그러나 선정수행과 상관없이 각자의 영역에서 사리에 맞는 생각은 그 분야의 지혜다. 불교가 아니기 때문에 희론으로 몰아서는 안된다.
다원이네요 2016-09-26 15:4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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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아니기 때문에 희론으로 몰아서는 안된다.../[오빠 뎃글 중]>>

<--오빠! 불교가 아니기 때문에 희론이 아니라... 과학, 사유와 철학, 논리, 개념, 관념 등 모든 인식 틀이 어떤 방식으로든 성립하지 못함을 즉 선불교식으로는 불립문자라는 것을 불교식으로 표현한 것이라네...
그러니 긴글을 쓰는라고 고생만 하셨네...

한국말을 배우고도 말의 뉘앙스를 모르면 전혀 엉뚱한 말로 알아 듣듯이 말이라네...

<<...상황과 맥락을 다 생략하고 경전에 있는 내용만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무차별적용하는 것은 좀...>>
<--경전에는 자세하게... 너무 자세하게 헌말 또 허고 또 반복해서 책만 두꺼워지도록 써 있다네... 단지 오빠가 못본것을 생략했다고 하고... 오빠가 모르는 것을 상황 맥락이 생략된 내용이라고 하면 안되지... 그런 내용을 ㄴ한군데도 없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꼭 아는 듯이 말하면 다른 초보들이 또 오빠처럼 생각해 버릴 것 아냐?  내 말 맞지!!!

오빠는 지금 희론이 머 말장난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모든 말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이고 표음, 표어, 의미약속의 표현이므로 틀린것이 아니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희론이라는 것이 아니고...

존재론, 인식론적 모든 사유를 동원해도 궁극적인 모순을 구조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말이거든... 오빠는 이걸 모르잖아...

숙제...
무한히 많은 방을 가지거 있는 모텔에 무한히 많은 손님이 들어 오고 있다..
이 모텔에....
1) 빈방이 있다? 없다?
방에 입실하지 못한 손님이...
2) 있다? 없다?

대답해봐?  시간순으로 말해봐... 방이 먼저일까? 오는 손님이 먼저일까?
아니면 공간적으로 말해봐?? 비낭이 먼저 보일까? 입구에 서있는 사람이 먼저보일까?

이걸 희론이라고 하는 거야...

힘들다.  길게 쓰기 싫어... 자기가 공부해...

그러니 오빠 뎃글은 전혀 엉뚱한 수준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서  당연히 더 말해 줘도 알수가 없을 거야...
이건무상상이에게하는말인데 2016-09-26 18:03:18
답변  
슬쩍 넘어가지 마라...

<<...4) 다원에게 내가 결론겸 화두를 줄테니 열심히 공부해서 무식에서 벗어나고 그리고 주변 사람들한테 창피한 존재로 살지 않기를 바래.
첫번째 화두는 붓다는 화장실 갈 때 상수멸정의 상태에서 갔을까 아니면 아랫배에 느낌이 와서 급히 화장실 갔을까?
두번째 붓다께서 천안통을 발휘할 때 24시간 자동적으로 발휘되고 있을까 아니면 스스로 의도를 하여 발휘하고 싶다고 했을때 발휘가 될까? .../[무상상 뎃글 중]>>

<--무식한 넘 화두가 그렇지...

[답]+[?]=[...] <--이 수식을 설명할 사람 나와 봐라.
지존 무상상님의 참 희한한 국어화두 받으실분...

무상상 화두는 분명 국어이지만... 이 다원님께서 수식으로 기술한 것은 불어(佛語)이고 답인데도 무상상은 알지 못할 것이야...
은근히 교학을 법거량하려는 장난질인데...

아라한이 되면  지은 업도 받지 안는다고 원불사서 구라치다가 나한테 설법을 듣고 슬그머니 빠진 넘이고...
또 [보이는 대로][있는그대로] 가지고 또 말장난 하면서 누차 내 지적에도 우이독경이고... 머 나한테 화두라???

저 [수식]이 네 화두에 [방]이라는 것은 알 것이다. 근디 아마 답을 해 줬어도 니가 받을 수가 없을 것이다.
무상상이 해설은 한다면 스스로 내 발구락만도 못한 지식이라는 것이 드러날 것이고...
왜곡을 한다면... 가방끈은 구로동이고 그 잘난 9층파고다 책꽃이가 불탈 것이여..

이글은 내 블로그에 올려놓고 답도 여기에 올려 놓을 것이다..
내 블로그 주소는 알지 http://blog.daum.net/skjwlib/638 <--여그다 니 왔다가면 발자국이 남는다... 겨드랑이 털이 왔다가도 양자cctv에 걸려...

Tip이다.  부처님신통은 그렇게 피곤하지 않다... 반대로 하나님은 디게 피곤하다... 죽일 넘 안 죽일 넘은 물론이고 피아도구분하지 못하는게 전지전능이고. 부처님 신통은 잠도 잘잔다... 해우소는 부처님 상수멸정이다!!! <--- 무상상이 알아묵을라나 좀 걱정된다. Tip이 너무 심오했나 싶다만...

나한테 화두도 던지고 많이 발전했다. 무상상...
이번 것은 본체만체 못하것지??? 어디 사족좀 붙여봐라... 갈갈이 사시미를 떠 줄팅게...
맨스플레인 2016-09-26 18: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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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독서의 계절에 새 책을 읽게 되면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진다. 그런데 누구와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대화의 결은 달라진다. 꽃잎이 피어나듯 아름답게 펼쳐질 수도 있고, 봉오리 상태에서 벌어지지도 못한 채 그대로 땅에 떨어질 수도 있다.

대체로 듣는 사람의 반응에 따라 방향이 결정된다. 우리는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상대방이나 상대방이 꺼내는 주제에 대해 질문하는 편인가, 아니면 상대방이 꺼낸 주제와 연관된 자신의 경험, 정보, 지식 등을 더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편인가. 다시 말해 새로운 것을 더 알려고 하는 편인가, 아니면 듣지 않아도 안다고 판단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알려주려고 하는 편인가.

한 사람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 서로 질문과 답으로 교류한다면, 마치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며 한 폭의 천을 짜듯이 새로운 대화의 장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어떤 실이 어떻게 교차하느냐에 따라 베, 면, 비단 등 다양한 천이 짜지듯이 질문의 종류에 따라 대화의 질도 달라질 것이고, 만들어진 맥락 안에서 두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정신적으로 새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책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다른 사람이 더 이상 듣지 않고 다 안다는 듯이 그 작가의 다른 책 또는 다른 작가에 관해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말한다면, 서로 만나기 전과 후가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새로워지는 것이 별로 없다면 함께 시간을 보내기는 했으나 정신적 발전을 가져올 마음의 천을 짜는 교류는 되지 못할 것이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떤 여성 작가가 파티에 가서 한 남성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여성 작가가 자신이 책을 썼다는 말을 했는데도 그 남성은 그 책의 주제에 대해서 작가에게 묻지 않고 자신이 더 많이 아는 것처럼 설명한 것이다. 그 남성이 책을 썼다는 작가의 말을 받아서 그 책에 대해 질문했다면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실수도 하지 않고 그 주제에 대해 더 알게 되는 생산적인 대화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이 일화는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라는 단어를 결합한 맨스플레인(mansplain)이라는 신조어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김민예숙 /여성주의상담가·춘해보건대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62616.html /한겨레

맨스플레인의 의미는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특히 남자가 여자에게 거들먹거리거나 잘난 체하는 태도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 단어는 2010년 <뉴욕 타임스>가 ‘올해의 단어’ 중 하나로 선정했고, 2012년 미국언어연구회에서 ‘가장 창조적인 단어’의 후보로 올리기도 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모르는 것을 알려고 질문하기보다는 자신이 아는 것을 타인에게 설명하기를 더 좋아하는 편이다. 우위에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고 자존감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역사상 남성들이 우월한 위치에 있어왔고 설명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통해 우월감을 확인해왔기에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조명을 받았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학명의 뜻은 지혜로운 인간이다. 지혜가 있어 인간은 발견과 발명을 하고 문명을 만들었다. 알고 있는 것에 만족해서가 아니라 더 알려고 노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의 의무는 물려받은 문명을 발전시키는 것이고 그러려면 더 알아야 한다. 더 알려면 질문해야 한다. 인간관계도 상대를 더 알려고 하며 질문할 때 깊어질 수 있다. 질문하려고 생각해야 하고 답을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기보다 질문하기를 조금 더 하는 가을이 되면 좋을 듯하다.
수처작주 2016-09-28 10:3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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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문외한이 올시다  무상상님이나 오빠생각님의 댓글은 일리가 살짝가는데...왜? 이다원이라는 사람의 댓글은 같은 한글인데, 무슨말하는지? 몇번 읽어 봐도 당최 무슨소리 하는지? 모르곗네요!
그리고 무상상님의 댓글도 백번 읽으면 백번 지당하신 말씀인데...원불사이야기는 또 뭡니까?그리고 그놈의 겨드랑이털 좀 그만 져만 하시지!
당신댓글은 알멩이 없어도 너~무 없고, 급조조달 ~ 임시방편으로다~
그래도 쌍욕해대는것이 사라진것이 나아졌다면...나아진것이지~
문외한이라고 2016-09-29 10:5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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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 주건 없다...

니가 알맹이...껍데기.. 하는 것이 하도 살짝... 웃겨서 말이다...
니가 바로 무상상, 원불사 겨드랑이털이라는 이야기다..

가서 자거라.. 할 일 없으면...
무상상 2016-09-26 20:5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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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피해야 하는 부류가 일방적으로 자기의 의견을 남에게 윽박지르듯 쏟아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 최고이고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우월의식에 사로잡혀서 상대방을 깔보고 전혀 개념치 않는다(요즈음 정치상황들과 비슷). 그리고 보다 심각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보질 못하고 모든 것은 남의 탓으로 돌리고 남이 무지하기 때문에 자신의 본심을 몰라준다고 억울해 하는 것이다. 또한 이런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나 질문에 절대로 대답하지 않는다. 그걸 하면 오히려 자신의 글을 부정하고 대든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또한 대부분은 질문에 대답할 능력도 안되면서 글을 주워오고 베껴와서 짜집기하는 수준일 뿐이다.

경전을 보면 대부분의 글들이 일방적인 주입식으로 붓다의 의견을 받아 들이도록 강요하는게 아니라 4가지 방식으로 대화로 이끌어가고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있고 그리고 상대방이 이해하도록 온갖 비유법을 들어서 설득하고 설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러번 지적한 것이지만 경전을 베껴와서 그걸 글이라고 발표하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고 그런 글을 게재하는 매체도 조심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전은 출가승위주와 그리고 출가승이 열반으로 가는데 필요한 수행법등을 담아 놓은 것이다. 물론 재가자들이 참조하고 지혜를 얻는데 도움이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수록 스스로가 쓰는 글을 읽는 상대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의 주장이 어떤 그룹에 해당할지를 재가자와 수행자의 입장에서 잘 구별해야 한다.

재가자가 출가승인냥 허세를 부려도 문제이지만 출가승이 재가자인냥 행세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불교는 엄연히 사부대중으로 구분이 되어 있고 각자의 할 일이 나뉘어져 있다. 출가승은 250여개의 계율을 지키면서 중생들의 스승역활에 충실하는 한편으로 열반으로 가는 자신의 길을 본보기로 잘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재가자는 세간에 살면서 가족에게 충실하게 주변사람들을 불교로 유도하고 원만한 인간관계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붓다는 재가자가 지켜야 할 덕목을 16가지로 잘 구분해 놓고 있다.

지금 이 글은 출가승에게 쓴 것인가 아니면 재가자에게 쓴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수행담이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불교적으로 느낀 것을 쓴 것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경전 베껴와서 누구에게 무엇을 어쩌라는 것인가?

불교에는 건혜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사막처럼 메마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경전의 문구에 얽매여 있거나 또는 경전의 내용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경전을 인용하면 그건 건혜중의 하나일 뿐이다. 수많은 불교 논서들이 왜 나왔겠는가? 그것은 경전의 글귀에 숨어있는 깊은 지혜를 제대로 알아보자고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희론등을 금기시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열반으로 가는 길에 있어서 불필요한 곳에 말과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말라는 의미에서이다. 무엇이 희론이고 무엇이 희론이 아닌지 두부 가르듯 쉽게 가를 수 있는게 아니다. 저 수많은 논서들은 희론인가 아니면 붓다의 진리를 파악해 보고자 노력한 수행의 결과물인가?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오질 않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댓글을 다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2-3 사람 이상 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만큼 글이 식상하고 더이상 불교적인 글이 아니라고 치부하기 때문일 것이다. 빠알리어 경전이 한글화 된 이후로 한글만 익힌 사람도 경전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 그러기에 경전의 문자나 베껴오고 경전의 문구에 집착하는 글보다는 경전의 설법에 담긴 깊은 지혜에 목말라하는 것이다.

한국에는 불교관련 연구단체만 십여개가 넘고 수십명의 학자분들(승려들 포함)이 일년에도 수많은 논문들을 펴내고 있다. 그리고 서양학자들이나 일본학자들보다 더 알찬 내용과 신선한 눈으로 경전을 새롭고 해석하고 붓다의 말씀을 불자들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내글이 삭제될련지 모르겠지만 내가 여기에 댓글을 다는 유일한 이유는 진흙의 잘못된 글에 대해서 같은 초기불자로써 안타까운 마음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말해도 마이동풍이겠지만 적어도 한사람은 진흙의 글을 옹호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해두고자 하기 때문이다.
무상상 2016-09-26 21:04:47
답변  
여기서 한가지 말해두고자 한다.

재가자들이 퇴근후에 집에가서 WIFE 와 아이들과 그날 있었던 갖가지 일로 대화를 하고 연속극 이야기를 하면서 즐겁고 행복한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이 희론인가 아닌가?

출가한 승려들이 저녁시간에 삼삼오오 모여서 영화 연속극 정치 이야기하는 것이 희론인가 아닌가?

진흙은 재가인줄 아는데 그의 글은 늘 붓다가 출가수행승들에게 훈계하고 설법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 그럼 그는 재가자의 신분을 뛰어넘고 수행승들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삶을 살거나 또는 붓다의 반열에 올라선 것인가? 여기 기고란에 글을 올리는 재가자들 중에서 과연 진흙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 있는가?

좋은 말도 한두번 들으면 괜챦지만 자꾸만 반복되면 거부감이 오고 역겨워지는 것이다. 불교라는 것에서 얻은 지식을 타인을 비난하거나 출가승을 비난하거나 또는 자신의 아상을 드높이는데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그 수많은 좋은 불교의 문구들을 자신에게 비추어 스스로의 모습을 제대로 보는 불혜를 키우는데 사용했으면 좋겠다.
우이독경에 2016-09-26 21: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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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여구....
문장유희에... 맨스플레인...

<<...우월의식에 사로잡혀서 상대방을 깔보고 전혀 개념치 ...이런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나 질문에 절대로 대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글을 부정하고 대든다는 식으로 ...대답할 능력도 안되면서 글을 주워오고 베껴와서 짜집기하는 수준.../[무상상 뎃글 중]>>

<-- 이게 지금 무상상 이야기 아닌가???
이럴 시간에 정중한 답글이나 써야하지 않나?
수처작주 2016-09-28 10:43:00
답변  
사두~, 사두~ 사 아 두~
정말로 연꽃이 자칭 초기불자 대가라고 하는데.....그는 그런 아상, 인상, 수자상부터 내려노우심이 필요합니다
겨드랑이털이 2016-09-29 10:59:37
답변  
니 척상부터 내려 놓고 가서 잠이나 자라..
맨스플레인....
수처작주 2016-09-29 14:04:52
답변  
다원 , 너 정말 인간 언제 될래? 엉 ? 
너같은 걸레, 쓰레기들이 불교공부한다고, 깨달음을 오늘부로 당장 얻을까?
에이 퉷!  시궁창의 걸레보다더 더럽고 거지근성에 어떻게 하던지 좀 멍청하고
정신살짝 또라이에 여자라면 면상 따지지 않고 ...그냥저냥 자신의 허리아래
정액이나 아무대나 발산하는 그런 머져리의 정약받이가 좋아서 ...빤스를 벗네 마네
이지랄하는 이 다원아!  지옥에나 가버려! 이창녀보다 더더러븐년아!
너한테도 2016-09-29 22:4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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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필요하냐?

어디 뉘집 걸레나?? 참 궁금하다...
수처마다 축생같은 존재...
생각으로집을짓지말라면서 2016-09-27 10: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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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집을 많이도...
호잔 2016-09-27 12: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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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출가와 몸출가, 재가자와 출가자가 기본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생각(정사유)해 볼 수 있도록 밴드(한국테라와다불교 밴드)에 있는 하나의 글을 그대로 옮겨 왔습니다.
생각은 희론이 될 수도 있고, 정사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아래에서 말하는 출가자에서, 출가생활이 힘들면 환속할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출가한 자는 몸만 출가했지 마음은 출가한 것이 아닌 재가자와 마찬가지이므로 제외될 것입니다.
극소수의 출가자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출가자는 재가자보다 월등하게 갈애의 잠재성향이 적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마트폰이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외부대상을 자유롭게 한다고 생각하지만,
절제할 수 없다면 수행자에게 스마폰은 수행생활을 불편하게 하고 외부대상에 구속되게 할 수 있다.

스마트폰이 없으니 스마트폰의 구속에서는 벗어났으나, 나는 언제 회사일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가정일의 구속에서 벗어날 것인가?
나의 매우 큰 욕망에서는 쉽게 벗어날 수 있지만, 회사 관련사람들과 친인척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도 관련사람들의 욕망에 따라 재촉하는 일을 기한내에 마무리 지어야 한다.
이는 친인척들의 욕망에 어긋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최종적으로 내가 괴롭지 않을려고 하는 욕망(갈애)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나의 갈애가 이 모든 일을 괴롭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단칼에 이 갈애를 끊어 버릴 수 없다.
우선 스마트폰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몇 년후에 회사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그 다음에 친인척들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나의 깊은 갈애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출가자는 자신의 깊은 갈애에서 벗어나는 일만 남았지만, 나는 재가자로서 회사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친인척들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이 남아 있다.
나의 깊은 갈애에서 벗어나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
출가자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큰 나의 갈애가 회사를 당장 그만두지 못하게 하고 가정에서 당장 떠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정신승리글같어 2016-09-27 14:3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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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람이 이글을 읽으면

불교(혹은 부처)는 예술가들을 망상이나 하는 희론쟁이들이라고 생각하겠다.
불교(혹은 부처)는 과학자들을 망상이나 하는 희론쟁이들이라고 생각하겠다.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부처는 욕구불만 욕망억압의 정신질환이다. 부처와 출가승들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람사는 곳을 떠나 외지 숲속에서 사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낙오자, 현실도피주의자들이다. 프로이드의 관점이 불교의 실상을 간파하지 못하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듯이 필자의 글은 사람들로 하여금 불교를 왜곡해서 보게한다.

붓다는 붓다에게 동의하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한 말이다. 승려들 개개인의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해야할 수행이 있는 상태에서 제자들을 독려하는 말을 했던 것이다.  수행자가 수행과 관련없는 다른 대상에 눈이 팔려 수행을 놓치고 있다면 스승으로서 제자들을 바로 잡아 주어야 한다. 특히나 열반 성취하는데 있어 희론은 금물이다. 자아라는 한계를 벗어나야 열반에 도달하는데 자구 희론을 해 버리면 자아가 소멸하지 않고 성성하게 된다. 그러면 무아체험이 불가능해 진다. 따라서 열반체험을 위해서는 희론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자들이나 예술가들은 열반을 목적으로 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떤 희론을 하든지 붓다는 사실 관심이 없다. 열반을 성취하려는 제자들에만 붓다는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오직 불교적 관점에서만 서서 다른 직종의 사람들에게 희론을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불교에 관심없는 자들에게 불교라는 종교를 강권하는 폭력과 똑같다.

과거에 비해 인류는 굶주림에서 많이 해방됐다. 과학과 기술이 식량생산량을 극대화 시킨것이다. 한겨울에도 과일과 채소를 먹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생사를 다투는 환자들을 운송할 수단이 있고 암도 조만간 극복의 대상이 될 것으로 본다. 모두 필자가 비판해 마지 않은 과학덕택으로 이룬 문명때문이다. 과학이 생로병사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고 필자는 비판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인류는 과학덕에 생(과학 덕택에 안전하게 태어나고). 노(과학덕택에 건강하게 늙어가고) 병(과학 덕택에 많은 질병을 극복하고) 사(과학덕택에 과거에 죽었을 운명도 수명연장이 가능해졌다) 에서 훨씬 자유로와 졌고 이익을 얻었다. 불교를 인류의 역사에서 생로병사라는 실상에 관한한 과학만큼의 도움을 인류에게 줬나?

적어도 갠관의 영역에서 인간의 생로병사라는 한계적 상황에 과학이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한데 불교가 도움을 준 것은 무엇인가? 마음의 평화를 주지 않았냐 하는데 그것은 객관적으로 제시할 근거는 있나? 또 마음의 평화를 주는것은 국가도 한다. 복지,교육,의료,보험이라는 측면에서 불교가 국가만큼 인류에 공헌했나. 인간은 음악,미술,스포츠등 취미활동으로도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불교가 생로병사라는 인간의 한계적 상황을 넘을 수 있는 해결점을 제시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교도들 밖에 없다. 깨달음이란 주관적 영역이라 그것이 인간의 생로병사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하는 것은 불교도라면 몰라도 일반인들에게 설득가능한 논리가 될 수 없다.

자신없으면 그냥 불교얘기만 하는게 좋다.
불교적 입장에서 되도않는 논리로 과학이나 예술을 쓸데없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불교를 포교하는 전략으로도 상당히 문제가 많은 것이다. 과학과 예수을 배타하면서 포교가 가능할까.

그리고 힉스입자 발견과 관려하여 모 스님이라고 비판한 스님은 고우스님이다. 누가 봐도 고우스님이라는 것을 다 아는데 굳이 이니셜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정신승리글같어 2016-09-27 16:3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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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면 부처님이 출가자를 대상으로 희론을 하지 말라했던 것처럼 필자도
 이 칼럼을 출가한 승려들을 대상으로 썼다는겐가.
나머지 출가하지 않은 재가불자들에게는 이글이 해당사항이 없다는 얘기라는 것인가. 이 칼럼 어디에 열반증득을 위해 수행하는 사람들을 콕찝어 그들을 대상으로 글을 쓴다고 표방하였는가. 아마도 이 칼럼을 읽을 자들도 대다수가 일반 재가불자들일 것이다.

그 일반 재가자들이 과학적 의문이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희론이라구? 그 일반 재가자들이 과학자이고 예술가라면 어쩔텐가. 자신의 분야에서 자신의 분야에서 궁굼해할 법한 의문을 가지고 사유하는 것이 어째서 희론이 된다는 말인가.

불경을 현실에 적용할때는 상황과 조건에 맞을 때만 하는 것이다. 아무 상황에서나 불경의 내용을 설파한다고 해서 합당한 논리가 되지 않는다. 불교안에서, 불교의 수행과정에서 해서는 안되는 것이 희론이다. 과학이나 예술을 거론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희론이 무엇이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라는 논지를 세울 수 있음에도 과학이 생로병사우비고뇌를 해결해주지 못해서 진리가 아니라거나 예술적 가치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명화가의 사유를 단칼에 희론으로 치부하는 짓이 과연 설득력을 가질까. 부처님이 불교우울주의라는 종교적 아상을 심어주려고 불교를 창시한게 아니라는 것쯤을 알면 이런 글 못 쓴다.
주인공 2016-09-28 13: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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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 이론을 안다고 해서 생로병사 우비고뇌가 해결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궁리한다고 해서 생로병사 우비고뇌가 해결되지 않는 것처럼

인터넷에 글쓰기 한다고 해서 생로병사 우비고뇌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수행자가 열반증득과 관련없는 생각을 하면 희론이고
생각을 글로 옮겨 놓아도 희론이다.

참선할때 "생각하지 마라"고 스승이 말했다.
제자는 그 말을 듣고 "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뒤늦게 "아!  '생각하지 말아지'하고 생각한느 것도 생각이구나" 하는 생각을 또 냈다. 그 말을 하면서 본인이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또 생각을 하였다.

희론을 하지 말라는 말이, 희론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 말했을까 모르면서 말했을까. 알아도 희론이고 몰라도 희론이다.
진흙의입장에서 2016-09-28 14:5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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