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를 위하여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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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확) 

문경 새재를 내려온 물이 감돌아 낙동강 본류와 만난다. 낙동강의 물은 쪽빛으로 맑고 잔잔했다. 낙동 장은 이미 파장 무렵이었다. 장터는 길을 따라서 백 미터 남짓 걸려서 이루어진 작은 마을이다. 농한기라 그런지 장꾼들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오전 장을 날림으로 후딱 보아 치운 모양이었다. 소시장 뒤편 자갈밭은 말뚝이 여러 개 꽂혀 있었다. 아버지가 자주 들르던 곳. 여전히 장터 골목에 나루터가 있고, 바깥 길가로 마루를 낸 주막이 있었다. 

마루에 두엇이 앉아서 탁주를 마시면 뒷집 방앗간에서 내려오는 보릿겨가 가끔 술잔 위로 내려앉았다. 그것을 훌훌 불어내던 아버지. 그 집이 바로 예전부터 장돌림들이 들르던 집이다. 장돌림들은 떠돌아다니면서도 어느 장터에 가면 누구네 집이라고 한 곳을 정해두고 찾아다닌다. 아버지는 장돌림들과 자주 술잔을 기울였다. 아버지는 그들을 가엾어 했다. 집 없이 떠도는 슬픔을 아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다시 사람이 없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그녀가 그 전까지 볼 수 없었던 웃음을 흘리고, 그 전까지 하지 않던 몸짓으로 나를 불렀다. 어서 오라고 손가락을 까닥거리는가 하면, 험한 바위 길을 만나면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흐흐흐!” 

“호호호!”

거리낄 게 없다. 아무도 우리에게 간섭할 수가 없다. 그녀가 마련한 도시락을 들고 우리는 간다. 아직 겨울은 아니지만, 그 옛날 임춘(林椿)처럼 겨울 나그네가 되어.

첫새벽에 홀로 상주 성을 나섰네.

큰 정자 작은 정자 얼마나 지나왔나.

말을 타고 뚜벅뚜벅 실 눈밭 가며

채찍 들고 푸른 묏봉우리

시 읊듯 헤어 보네.

하늘 가로 해 지면 어서 돌아가고 싶건만

들녘 바람 싸늘히 취한 얼굴 씻어 주네.

적막한 외딴 마을 어디서 묵어가노

집집마다 소리 없이 하마 문은 잠기고……

 길은 늦가을 한기로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고, 다니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다. 알곡을 거둔 텅 빈 들판, 겨울 채비를 하는 나무꾼들이 어두운 숲속에서 빠져나오고 있다. 짐승. 우리는 그늘 속에서만 사는 짐승처럼 걸었다.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맑은 하늘. 내 안에서는 예전에 잃어버린 노래가 흘러 넘쳤다. ‘연잎 따는 노래’, 그러나 그것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나뭇잎, 나뭇잎이 날렸다. 나는 그녀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녀가 걸음을 옮기는 대로 갈 뿐이다. 그녀가 멈추는 곳, 그곳이 우리들의 목적지다. 그러니까 남장사가 되건, 북장사가 되건, 갑장사가 되건, 그건 별로 의미가 없다. 다만 어디로든 그녀와 멀리멀리 떠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거의 반나절을 걸었을 것이다. 청리산에서 신촌으로, 신촌에서 낙동으로, 낙동에서 다시……, 그리고 알지 못하는 길. 가을의 짧은 한낮이 끝나고 벌써 산그늘이 내리고 있었다. 덥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그늘만을 골라 걸었다. 그것은 그녀만이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을 경계하는, 두려워하는 가엾은 마음. 길은 끝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못이 끝나는 지점에서 구부러지고 있다. 상주에서 가장 큰 못이 공갈 못, 그러나 그 못은 방향이 이쪽이 아니다. 시리도록 맑은 물살. 그 안에 수북한 황혼녘의 보석 알갱이들.

“쉬지 않아도 되겠어요?”

“물론이지.”

“힘들면 쉬었다 가요?”

“난 힘이 더 나.”

“언젠가 그런 말씀 하셨죠? 멀리 마을 하나가 있고, 그 마을을 가로지르는 푸르른 강물, 그 푸른 물에 비치는 양쪽으로 늘어선 미루나무, 그곳에 양 갈래머리의 나와 중절모를 눌러쓴 당신,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다고 하셨죠?”

그녀의 눈은 동그만 연못의 햇살처럼 반짝이고 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불을 피우고 싶다고 하셨죠? 돌아보면 강물이 보이고, 올려다보면 하늘의 별이 보이는……. 보름날의 강물 아세요?”

그녀는 아직까지 우리가 신의주에서 보낸 그 한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해방이 되기 전, 언젠가의 그 여름……. 키보다 높은 무성한 물풀들, 까맣게 달라붙는 날벌레들의 군무. 신의주역에서 만난 우리는 이름도 모르는 압록강 냇가에서 밤을 새운 적이 있었다. 못할 것이 없었던 덧없는 열기, 반짝이던 눈동자들, 그때 보았던 그 무섭던 여름의 노을. 어깨를 덮은 그녀의 머리칼, 이상한 비누 냄새. 그러나 나는 그녀를 안아주지 못했다. 내가 결혼하기 바로 전이었다. 그녀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하자 그녀는 웃었다. 

그 순간 우리들의 여름은 벌써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었다. 벌레소리가 이미 가을을 머금고, 떨어진 미닫이가 겨울바람을 머금고 있는 여름이었다. 다 자란 잎과 한아름 입을 벌린 알밤 사이에 끼인 여름이었다. 넘실거리는 여름의 푸른 파도는 흰 물거품으로 부서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검고 높은 겨울의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분명 가을이 와야 할 시간에 겨울이 오고 있었다. 그때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때 신의주에서 띄운 연등이 어디까지 갔는지 확인해 보지 않겠어요?”

“…….”

“그것들은 지금 어디를 떠다닐까요?”

“세월이 많이 흘렀어.”

“그렇다면 당신이나, 나 둘 중의 한 사람이 기도 도중에 딴 생각을 하였겠지요.”

정곡을 찔린 듯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말대로 딴 생각을 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불순한 기도를 올렸다. 그때는 단 한 시간이라도 빨리 임순이가 있는 나의 마을로 가고 싶었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갑자기 임순이가 보고 싶었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녀의 얼굴을 외면했다.  

“확인해 보고 싶지 않으세요?”

그녀의 눈은 정말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큰 저수지의 물줄기가 한없이 흘러내리는 제방을 지나 냇가로 들어섰다.

“그때 생각나요?”

“아니.”

거짓말을 했다.

“무섭지 않아요?”

“누가?”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저 산과 이 강물?”

“그대가 더 무서운데?”

“호호호!”

“불장난?”

“으흐!” 

우리는 무성한 갈대숲 옆, 널찍한 평원에 자리를 잡아 작은 모닥불을 피웠다. 그녀가 자신의 바랑에서 숯을 꺼냈던 것이다. 그렇다면 치밀히 계획된 일이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다. 

“도둑질을 했군?”

“예. 백천사에서 슬쩍 했어요. 완전히 참나무 숯으로만.”

작은 불길에도 여울 가의 물결들이 살아나고 있었다. 

“불장난은 끝난 줄 알았는데…….”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가 눈을 뜨고 있는 이상에는 불장난은 끝나지 않아요. 불장난의 근원은 우리 눈앞에 보는 이 불이 아니고, 우리들이 달고 다니는 두 개의 눈에 달려 있지요. 이 세상은 불타는 집이고……, 우리는 그곳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도락에 정신이 팔려 온 집에 불이 난 것도 모르고 있잖아요.” 

“그 불타는 집이 좋다면?”

“그게 우리 중생들 아닌가요? 정말 극락이 있어 근심 걱정과 욕망이 없다면 과연 그런 곳에서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불타는 집에서 숯덩이가 될 수는  없잖아요.”

“난 이미 숯덩이가 되었어.”

“그렇지 않아요. 이 세상 어떤 누구도 살아 있는 동안은 숯덩이를 면할 기회가 있어요.”

“거짓말.”

“당신이 숯덩이가 되었다면, 나는…….”

그녀는 반 울음.

“달은 없지만 오늘이 보름이에요.”

“달이 있었으면…….”

“등을 띄워야지요?”

그녀가 등을 꺼냈다. 

“자아, 나는 흰 등, 당신은 노란 등.”

“이유는?”

“글쎄요.”

내가 먼저 물에 등을 띄웠다. 그러자 그녀도 등을 띄웠다. 불 없는 등, 어쩌면 그것은 내 처지와 똑같다.

“등 안에 불이 있다면 좋았을 걸…….”

“불타는 우리들의 마음이 있지요.”(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