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으로 읽는 불교

“괴롭고 비참하고 잘못된 상태 설명 때 등장”

이 학종 | | 2023-03-31 (금) 06:31

골풀은 갈대와 함께 예로부터 등잔 심지부터 시작하여 돗자리, 바구니, 방석, 벽지 등의 자리를 엮는데 사용한 풀이다. 현재에는 관상용, 수생식물원용, 조경용, 서식지 복원용 등으로 재배하는데, 고온다습한 습윤지(濕潤地)에서는 잡초처럼 급속히 번지는 성향이 있다. 골풀은 등심초(燈心草)라고도 불리는데, 들의 물가나 습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높이는 50∼100cm 정도이다. 뿌리줄기는 옆으로 벋고 짧은 마디가 많으며 여기서 원기둥 모양의 밋밋한 녹색 줄기가 나온다. 줄기는 속이 가득 차 있고 잎은 비늘 모양으로 밑동에서 나서 줄기를 감싼다. 일본에서는 다다미 판 위를 덮는 자리 재료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골풀은 왕실로 진상한 돗자리의 재료로 활용됐다. 조선의 실학자 유함 홍만선의 지은 『산림경제』에 자리를 엮는 데나 등잔 심지로 이용된다고 기록되어 있듯이 골풀은 줄기로 돗자리를 만들고 바구니, 모자, 방석, 슬리퍼, 핸드백, 벽지 등의 재료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이 밖에도 퇴비나 약용으로 이용된다. 

그러나 최근에는 골풀로 짠 돗자리는 보기 힘들다. 1980년대까지는 골풀로 만든 돗자리가 많이 보였지만 점차 사용이 편리하고 가벼운 스티로폼 은박 재질로 대체되어 1990년대 중반부터는 골풀 돗자리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요즘은 보기 어려운 광경이지만 예전에는 점쟁이들이 골풀 등으로 만든 돗자리를 깔고 점을 보는 것에서 착안하여 뭔가를 예언하는 것을 두고 ‘돗자리 깐다’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골풀은 불전(佛典)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주석에 따르면 고대 인도에서도 골풀은 주로 돗자리를 짜는데 사용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쌍윳따니까야> 22:102 ‘무상에 대한 지각의 경(Aniccasaññāsutta)’에서 붓다는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혀 탐욕을 완전하게 떨어내 버리라는 가르침을 설할 때 설법의 소재로 골풀을 등장시킨다.



(사진 출처 : 국립생물자연관 / 한반도의 생물다양성)



“수행승들이여,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히면, 그것은 모든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모든 물질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모든 존재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모든 무명을 없애며, 모든 ‘나’라는 자만을 뿌리째 뽑아 없앤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가을에 농부가 큰 쟁기날로 쟁기질을 하면 모든 뿌리들이 파헤쳐 없어진다. 이와 같이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히면, 그것은 모든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모든 물질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모든 존재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모든 무명을 없애며, 모든 ‘나’라는 자만을 뿌리째 뽑아 없앤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골풀을 베는 사람은 골풀을 베면 꼭대기를 잡고 위아래로 흔들고 좌우로 흔들어 털어버린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히면, 그것은 모든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모든 물질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모든 존재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모든 무명을 없애며, 모든 ‘나’라는 자만을 뿌리째 뽑아 없앤다.” - 전재성 옮김


주석에 따르면, 모든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kāmarāgaṁ은 돌아오지 않는 님의 길을 가는 자, 즉 아나함에게서 제거되고, 존재에 대한 탐욕(bhavarāgaṁ), 무명(avijjāṁ)‘ ’나는 있다‘라는 자만(asmimānaṁ)은 거룩한 길을 가는 자(아라한)에게서 제거된다. 


<쌍윳따니까야> 22:93 ‘강의 경(Nadīsutta)’에서도 붓다는 ‘고귀한 님을 보지 못하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거나,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는 배우지 못한 사람’이 처하게 될 상황을 설명할 때, 골풀을 급류가 흐르는 강물의 양 둑에 생겨나 그 둑에 매달려 있을 갈대, 꾸싸풀, 비라나풀 등과 함께 설법의 소재로 거론한다. 어떤 사람이 급류에 휩쓸려 내려가다가 갈대 또는 꾸싸풀, 비라나풀, 또는 골풀을 붙잡았어도 그것이 부서지면 불행과 재난에 떨어지듯이, 고귀한 님을 보지 못하고, 그 가르침을 알지 못하며, 그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은 사람은, 반드시 불행과 재난에 떨어지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또한 골풀은 꾸루 족의 마을에서 붓다께서 존자 아난다에게 설한 <쌍윳따니까야> 12:60 ‘인연의 경(Nidānasutta)’에서도 등장한다. 이 경에서 갈대와 함께 등장하는 골풀은 헝클어지고 뒤엉켜서 뒤죽박죽이 된 상태를 비유하는 소재로 사용된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이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가 얼마나 깊고도 심원한 것인지. 세존이시여, 그렇지만 저에게는 완전히 명백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아난다여, 그렇지 않다. 아난다여, 그렇지 않다 이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는 깊고도 심원하다. 아난다여, 이 법칙을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뭇 삶들은 방치된 편물처럼 뒤죽박죽이 되고 실타래처럼 엉키고 잘못 배열된 갈대나 골풀과 같이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으로 태어나는 윤회를 벗어나기 어렵다.” - 전재성 옮김


‘뒤바뀌어 거꾸로 된 상태’, 즉 도착(倒錯) 된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길쌈하는 장면이나 돗자리를 짜는 장면을 비유로 든 붓다의 설법을 읽다 보면 왜 붓다를 비유의 왕으로 지칭하는지를 알게 할 만큼 적확한 비유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편물(실, 바늘 등 뜨개질에 필요한 소품)처럼 뒤엉켰다’는 것은 ‘잘못 보관되어 쥐들에게 물어뜯긴 편물이 여기저기 얽힌 것처럼’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갈대나 골풀은 둘 다 돗자리를 만드는 데 쓰이는 풀인데, 이 풀을 잘못 배열하여 돗자리의 직조가 엉망이 된 상태를 의미한다. 

왕자로 태어나 태자의 지위에 있다가 출가한 붓다가 세상의 모든 것을 이렇듯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놀라울 뿐이다. 붓다가 제시하는 설법의 소재나 비유 등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붓다의 열 가지 명호 가운데 왜 ‘세간해(世間解)’가 포함됐는지를 알 것 같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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