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년간이 넘는 세월 동안 나는 민중불교운동을 했다는 죗값(?)으로 쫓겨 다녀야 했다. 독재정권에 의해 이루어진 정치적 수배의 세월, 그 쫓김의 틈 사이를 잇는 퀴퀴한 골방에서 나는 원고지를 앞에 놓고 수없는 비감에 젖어야 했다. 지식의 한계, 재능의 한계, 마음의 한계, 그리고 신체적 행동의 한계, 이러한 모든 것들이 결국, 이 책의 숨을 길게 내쉴 수 없게 했다.”
군부독재의 망령이 채 가시지 않았던 1988년, 멱정(覓丁) 여익구(呂益九)는 <민중불교철학>(민족사)을 출간하면서 지난하기만 했던 집필시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3년 전인 1985년에 펴낸 <민중불교입문>에 이어 출간된 이 책은 한국불교사에 민중불교(民衆佛敎)라는 용어를 폭넓게 각인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현대 한국불교사에서 민중불교 운동을 이끈 주역으로서의 멱정의 존재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비중을 가지고 있다. 민중불교운동연합 창립을 주도하고, 민중불교 관련 저술을 잇달아 발간하면서 멱정은 곧 민중불교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민중불교란 무엇인가?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민중불교를 “불교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서 비롯된 민중의 고통을 구원하고자 노력하는 운동”이라고 정의한다. 1976년 발표된 서암 전재성의 ‘민중불교론’에 이어 멱정의 ‘민중불교’를 테마로 한 저술과 활동은 일제강점기 만해와 운암(김성숙)에 의해 잠시 고개를 내밀었다가 사그라진 불교와 사회주의와의 접목을 본격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민중불교 정의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어쩌면 결론을 내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적확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불교의 사회 운동 측면을 강조하면서 ‘민중불교운동’이라 불렸던 민중불교는 1980년대에 불붙었다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시들해지고 말았다.

 

민중불교의 뿌리는 붓다 석가모니 당대의 가르침에서 비롯된다. 불교는 단지 인간뿐만 아니라 일체 만물이 본래 평등하다는 붓다의 자각에서 시작되었고, 따라서 한없는 중생(衆生)을 모두 다 구제하겠다는 맹세를 실천하는 노력이 곧 중생불교이며, 이것이 곧 민중불교의 이념으로 승화되었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의 ‘한겨레21’ 기고에 따르면, 민중불교 운동의 성격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 기존의 불교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다. 둘째는 정치·경제·사회 등 각 방면의 모순 구조를 변혁시킴으로써 민중이 직면하고 있는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실천 방법으로는 계급투쟁 색채가 매우 강하다. 셋째는 교리에 대한 해석 방법은 전통 교판(敎判)의 틀에 따르지 않으며, 사회 과학의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넷째는 이와 같은 이념에 동조하는 사람은 유대감을 바탕으로 일종의 결사적(結社的)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박 교수는 민중불교운동의 결과는 네 가지의 성과로 요약한다. 첫째, 기성 불교에 대한 나태와 무기력을 비판함과 동시에, 사회 구원을 위한 운동을 실천적으로 전개함으로써,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고 둘째, 1980년대 중반의 암울한 상황에서 불교권 내에 민주화 열기를 넓게 확산시킴으로써 우리 사회의 민주 발전에 기여했으며 셋째, 불교교리를 사회 과학적 시각으로 해석함으로써 불교교리가 학문적인 논리 체계에 그치지 않으며, 인간 해방을 위한 구원의 체계라는 점도 재인식시켰고 넷째, 불교 교단 내에서 불교 자주화운동을 주도함으로써 불교의 민주적 역량을 회복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민중불교가 문제시 된 것은 주로 그 이념 측면보다는 운동 측면의 경우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대승불교도 그 시초에는 새로운 불교운동이었다고 평가되는 것과 같이, 민중불교의 출발점도 여기에 둔다면, 그 자체가 부정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민중불교가 그 실천운동 과정에서 노출한 여러 가지 문제점들도 민중불교에 대한 의식의 제고 및 폭 넓은 공감대 확보와 더불어 얼마든지 해소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부처님이 행하고 제시한 자비와 구제의 자세를 당면한 시대와 사회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시대의 구분을 넘은 불교도의 공동 관심사가 아닌가.

 

기성불교가 어용화되고 사회주의가 ‘반종교 운동’에 물드는 지난한 상황에서 동아시아에서의 붓다와 마르크스의 만남을 위해 누구보다 헌신한 사람은 일본 불교사회주의의 ‘대부’인 세노 기로(妹尾義郞·1889~1961)였다. 니치렌종(一蓮宗)이라는 국수주의적 종파의 출신으로 원래 마르크스주의를 혐오했던 그는 1920년대 중반에 농촌의 소작쟁의를 중재하면서 계급적 질서의 폭력성을 체험한 뒤 점차 “마르크스와 붓다의 뿌리가 달라도 민중 고통을 극복하려는 휴머니즘은 같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세노는, 착취·탐욕·고통의 사회를 나 몰라라 하고 입산해 해탈을 얻는다는 것은 뭇 중생이 서로 연관돼 있는 상의상관(相依相關)의 세계에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나’와 ‘남’ 그리고 ‘물질’ 과 ‘정신’이 하나인 불교의 가르침대로라면, ‘나의 정신적 해탈’의 전제조건은 ‘남의 물질적 해방’, 즉 착취의 철폐를 위한 투쟁이라고 주장했다. 사회 전체가 소유욕이 없고 민주적으로 운영됐던 붓다 생전의 승려 공동체처럼 사회주의적 형태를 띠지 않는다면 자비로운 보살의 입장에서 ‘나만의 깨달음’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법화행자’ 세노의 사회주의관이었다. 그러나 기성교단과 공권력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세노의 좌절에 이은 전향은 일본 종교계의 진보적 발전의 길을 원천 봉쇄하는 결과를 불렀다.

 

이처럼 제도권 종교계에서 사회주적 불교관이 수용되기 어려운 근본적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거기에는 만해가 ‘우주적 혁명가’라고 지칭했던 붓다의 진정한 정신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예상대로 한국에서의 ‘민중불교’는 한국불교 현대사에 끼친 적잖은 영향력만큼의 충분한 논의가 이루지지 못했다. 민중불교 논쟁이 발생할 당시 비슷한 고민을 놓고 벌어진, 한국사회의 발전단계를 둘러싼 사회구성체 논쟁이나 이웃종교의 ‘민중신학’에 비해서도 민중불교 논쟁은 인상적이지 못했다.
민중불교가 추구하는 이상사회는 상당히 구체적이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민주공화제, 경제적으로는 부의 평등분배, 사회적으로는 계급 차별 없는 인권평등, 문화적으로 주체성이 회복된 사회이다. 민중불교는 이상사회의 모델을 붓다 당시의 ‘무소유 승가 공동체’에서 찾는다. 이 승가 공동체는 소유를 부정한 무소유 공동체, 계급적 대립의 산물인 국가제도를 부정하는 평등 공동체이다.

 

민중불교는 교리 해석의 문제에서 기존 학계나 교단에 비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초기불교의 연기론을, 개인과 사회의 역동적 관계를 이끌어내는 이론적 배경으로 삼았다. 체념적 숙명론에 머물던 업(業)을 인간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행위로 재해석하면서 기존 보수교단을 비판했다. 민중불교는 현실 고(苦)를 개인적 영역에 한정하지 않고 사회과학적 입장에서 구조적인 고로 전환시켰으며 이를 변혁운동의 이론으로 확장했다. 민중불교는 불교가 민중성을 띠지 못한 원인을 교리 해석의 문제에서 찾을 정도로 교리 해석에 적극성을 보였다.
민중불교가 현재 한국불교계에 끼친 영향은 규명되어야 할 과제다. 이론으로서 민중불교는 퇴조했지만, 운동 주체들은 그들이 비판하던 반민주적이고 권력 예속적이던 기성 종단으로 지난 1994년 종단개혁을 기해 편입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의 제도권 진입에 이은 ‘변절’로 인해 한국불교는 또 다시 80년대 민중불교가 주창했던 명분과 당위가 부활해야만 하는, 참담한 질곡으로 곤두박질하는 중이다. 한 세대가 지나 멱정과 그가 남긴 민중불교운동의 부활이 다시금 그리워지는 이유다.

 

“전체는 보편이고 부분은 개별이다. 불교의 종교적 측면에서 살펴볼 때 불교는 보편이고 민중은 개별이며, 우리나라의 다양한 종교적, 이념적, 사상적 조류에서 볼 때 민족은 보편이고 불교는 개별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특수한 운동적 조건에서 불교운동을 살펴볼 때 민중운동은 보편이고 불교운동은 개별이다. 다시 말해서 민중불교운동은 그 이름 자체 내에 전체와 부분, 보편과 특수를 다 함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멱정은 ‘민중불교운동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를 다룬 이 책 P188~189에서 민중불교운동을 이렇게 정의한다. 이어 그는 한국사회는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 안에서의 불교는 어떤 모습으로 작용해 왔으며, 현재 한국사회는 어떻게 변해가는 것이며, 또 변해가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불교는 그러한 변화에 어떻게 적응하며 자기 아이덴티티를 어떻게 유지해가야 하는 것인지를 묻고 있다. 멱정은 민중불교운동의 주체에 대해 “불교대중이 계급적 입장보다는 종교의 일반적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민중불교철학으로 이념화된 진보적 불교 지식인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인정한다. 따라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중불교철학’의 정식화이며, 그에 의한 불교대중의 의식화와 조직화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철학적 자기기반이 없을 때 불교운동의 선진적 분자도 불교대중에 기초한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갈 수 없으며, 드디어는 운동과 불교와의 분리가 일어나 스스로 이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멱정은 강조한다. “민중불교철학의 포교는 동시에 새로운 신앙실천운동이며 이는 곧 불교적 수행이고 보살의 길”이라고.  

 

 

 

<목차>

 

제1부 민중불교 구현을 위한 몇가지 철학적 문제 -초기 불교철학을 중심으로-
 1.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위치와 역할
 2. 불교철학의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의 문제
 3. 초기불교의 실천성과 후기불교의 관념성에 대한 고찰

 

제2부 민중불교 철학 창출을 위한 대승불교사상 비판
 1. 유식사상
 2. 천태사상
 3. 화엄사상
 4. 선사상

 

제3부 민중불교운동을 위한 약간의 철학적 고찰
 1. 불교에서 운동이란 무엇인가?
 2. 민중불교 운동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3. 무엇이 불교운동을 방해하는가

 

제4부 연기론과 실상론 -불교철학의 유물론과 관념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