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과 가파른 계단을 오르거나 저 멀리 안개가 낀 바다를 내려다보며, 나 자신도 살피고 참회도 하면서 가는 길이 절로 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르러서는 부처님의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와 뜨신 듯 감으신 듯 한 눈을 뵙고 나서는 넓은 자비심에 감싸여 신심은 더 한층 깊어집니다.

 

 그러나 용주사를 가는 길은 어떤 흥취도 가질 수 없습니다. 정조임금이 융릉을 오가던 길가에서 20m도 못미처 일주문이 있고, 바로 옆에는 주차장이 있어 절을 가는 운치란 아무 것도 없고, 땀 흘릴 짬도 없는 것이지요.

 

 

 

이러한 평지에 있는 절이 우리나라에 몇 곳이나 될까요? 조선 왕조가 숭유억불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인가 근처에 있는 절을 철거하거나 깊은 산으로 보내고, 서원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근래 서원 터에서 불교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것을 보면, 조선시대에 절은 인가 가까운 곳에서는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용주사가 평지에 남아있는 것은 조선 말기에 세워진 능침사찰이고 원찰이란 특별한 이유를 가진 때문이지요. 아니! 조선시대에 절을 세울 수 있었다고요?

 

아니! 조선의 통치규범인 경국대전이 절의 수리만 허용하고 새로운 절의 창건을 금지하였는데 용주사는 어떻게 창건되었을까요?

 

유교의 이상이 실현된 국가를 이룩하겠다는 꿈을 가진 정조는 원찰에서 생기는 폐단이 심해졌음을 알고, 즉위한지 4달 만에 ‘오늘날 풍속을 바로잡아 가려는 때에 세상의 교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일체로 금단하라’는 어명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13년이 지나서는 어떻게 해서 생각이 바뀌어 용주사를 창건했을까요?

 

해가 바뀌면서 정조는 서학(천주교)에 대하여‘성리학이 제대로 펼쳐지면 천주교는 저절로 없어진다’는 관대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 영우원의 천장을 계획하면서 원찰을 건립하여 위패를 모시고 스님들에게 재를 올리게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라 새로운 절을 창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뿐이고, ‘병자호란 때 소실된 갈양사를 수리하면 되겠다’는 기발한 착상을 하게 되었던 겁니다.

 

‘현륭원에 원찰을 세워야 겠다’는 생각은 정조 혼자만의 생각이었을까요? 아닐 겁니다.
영우원에서 현륭원으로 천장 공사를 끝낸 정조가 제사를 마치자마자, 원소도감제조 이문원은 ‘현륭원에 원찰을 설치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다른 능원의 전례에 따라 공명첩을 발행하고, 보시를 받아야 지을 수 있을 것’이라 아룁니다.
유교가 국교인데, 어느 누구가 감히 절을 짓자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정조는 이문원에게‘문책하지 않을 터이니 네가 앞장서라’고 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즉석에서 허락했던 것이지요. 박명원과 짜고‘영우원 천장 상소’를 처리했듯이, 분명히 용주사 창건도 그러했을 겁니다.

 

평민도 부자가 될 수 있는 시대로 변했고, 또 그에 맞춰 양반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공명첩 장사는 수지맞는 장사였으며, 잡고 있는 권력을 유지하려는 수많은 중앙의 고위관료(대부분 노론이겠지만)와 지방관료 들이 앞 다퉈 시주를 했고, 화주승을 보내 전국 각 지방에 시주를 감독하였으니 용주사 창건은 나랏돈을 쓰지 않고도 쉽게 이루어졌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용주사 창건은 강제적이라는 생각이고, 좋게 말해도 반강제적이라는 생각입니다. 걷어낸 방법이 현시대에서 벌어지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고, 지금 벌어지는 비슷한 일들도 예전부터 내려온 관습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일주문은 문지방도 없고 문짝도 없는 문이지만 꼭 통과해야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어느 절이건 일주문이 있고 여기에 이름표가 달려있어서 어느 산에 있는 무슨 절이라든지,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큰길가 바로 옆에 일주문이 있다고 했으나, 바르게 말하면 용주사에는 일주문이 없습니다. 대신 세운지 10여년 밖에 안 된 사천왕문이 있습니다. 왜 일주문을 세우지 않았을까요?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고 위패를 모시기 위해 세운 절이기에 모든 절이 가져야 할 목적인 기도와 수행의 공간과는 다른 모습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일주문과 천왕문을 세우지 않고, 관아 ․ 서원 ․ 왕릉 등에 세우는 홍살문으로 용주사의 입구를 삼았습니다. 유교를 숭상하는 정조의 의중이 담긴 조치이자,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므로 경건한 마음을 가지라거나 신성한 곳이라는 의미로 용주사를 들어가는 첫 번째 표시가 된 것이지요.

 

홍살문을 향하는 길가에는 다듬지 않은 돌에 글자를 새겨 세워놓았습니다. 맨 앞에 “도차문래 막존지해(到此門來 莫存知解)”<이 문에 이르러서는 알음알이를 버려라>가 있고, “정각 천상천하유아독존(正覺 天上天下唯我獨尊)”<바른 깨달음 우주 가운데 나보다 더 존귀한 사람은 없다>도 있고, 효행 사찰답게 부모은중경에 나오는 “포유양육은(哺乳養育恩)”<젖을 먹여 길러주신 은혜>도, “생자망우은(生子忘憂恩)”<자식을 낳고 근심을 잊으신 은혜>도 새겨져 있습니다.
또 시인 조지훈이 용주사에서 펼쳐진 승무를 보고 지었다는 “승무”의 “얇은 사 하이야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가 새겨진 시비(詩碑)도 있습니다.

 

홍살문을 지나면 궁궐에서 볼 수 있는 삼문이 나오고, 이 삼문에 용주사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삼문의 좌우에는 각각 7칸의 행랑이 이어져 있어서 이로써 용주사는 궁궐양식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사도세자가 살고 있는 궁궐이라는 생각도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삼문 바로 앞에는 “금주”와 “금연” 표석이 있는데,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의아스런 일입니다. 절 안에서 ‘흡연과 음주를 금한다’는 새삼스런 말은 웬 말일까요?
취사를 하면 화재의 염려가 있으니 연기를 피우는 행위 즉 취사를 하지 말라는, 부처님처럼 탁발을 하라는 말인가? 하는 우스운 생각도 났지만 한옥이 가진 제일 큰 취약점은 화재이고,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에 불조심을 강조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천보루

 

대부분의 절이 일주문과 천왕문을 통과하면 이층의 누각을 만나고, 이 누각 일층의 뒤편에 있는 계단을 밟아야 대웅전 앞마당에 이르게 됩니다. 보통 누각이 굵은 나무기둥을 사용하는데 비하여, 용주사의 누각 “천보루”는 경희루와 비슷한 사각형의 긴 장초석을 사용함으로써 궁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장초석에는 부처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다는 “자소일성천지경 ... 총본방중대석가(自笑一聲天地驚 ... 叢本房中待釋迦)”<스스로 웃는 웃음 한마디에 천지가 놀라고...총림의 방안에서 석가모니 부처님 기다리니>를 새겼습니다.

 

빈 마음으로 강산을 바라보니 한모양으로 가을이요
空看江山一樣秋 공간강산일양추

 

나이 백 살의 어머니가
母年一百歲 모년일백세

 

팔십 된 아들을 걱정하네
常憂八十兒 상우팔십아

 

그 은혜와 사랑의 끝을 알고 싶은가
欲知恩愛斷 욕지은애단

 

어머니 목숨이 다해야 떠날 것인데
命盡始分離 명진시분리

 

기다리지 않아도 동풍은 봄과 같이 온다네
不待東風自有春 부대동풍자유춘

 

천보루를 통과하면 대웅보전 마당에 오르게 되고, 뒤로 돌아서면 “홍제루”라는 현판이 보이는데 이로써 천보루와 홍제루는 한 건물로 두 개의 이름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밖에서 볼 때는 하늘이 보호하는 집이 되고, 안에서 볼 때는 중생의 제도가 넓게 이루어지는 집이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천보루에 들어서면 눈동자만 뒤로 돌려 흘낏 쳐다보는 244cm나 되는 큰 목어를 볼 수 있는데, ‘뒤도 돌아보면서 살라’는 뜻인가 싶어져 나올 때 뒤돌아 다시 보게 된다는 겁니다.

 

 

용주사 대웅보전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아미타여래 그리고 약사여래를 모신 전각입니다. 앞면과 옆면이 각각 3칸에 다포를 지었고, 팔작지붕을 올린 그리고 안팎 모두가 화려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주춧돌의 경우 많은 절이 화려함을 추구하지 않은 덤벙주초를 사용하거나 연꽃모양이 조각된 운두를 초석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용주사는 관아건물에서 많이 사용하는 ‘땅은 네모지고 하늘은 둥굴다’는 “천원지방”의 초석을 사용하였습니다.
또 능침사찰로서의 위엄을 보여주려는 듯 서까래를 길게 뺏는데, 서까래를 길게 뺀 만큼 추녀도 길게 뻗었고, 그 추녀마루의 무게를 받쳐주려고 활주를 세운 것이 대웅보전의 특징입니다. 

 

대웅보전 현판 양옆에는 용이 머리를 내밀었고, 네 귀퉁이 귀한대에도 한 마리의 용이 있으며, 전각 안 닫집에도 다섯 마리가 있고, 대들보에 걸친 충량도 용으로 올려놓았는데 어쩌면 찾지 못한 용도 있을 겁니다.
정조는 용주사 낙성식 바로 전날 꿈에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용을 보았고, 이런 사유로 절 이름을 용주사라 지었답니다. 꾸며낸 이야기 일겁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손수 모든 것을 챙기는, 꼼꼼하고 빈틈이라고는 없는 정조가 절을 다 지을 때까지 절 이름을 안 짓고 있었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정조에게 사도세자는 왕이 될 조건을 넘치도록 갖춘 아버지였습니다. ‘자기가 있어서 아버지가 죽었다’는 죄의식을 갖고 살았던 정조는 아버지가 왕으로 등극하는 모습을 꿈에라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던 차에 실제로 그런 꿈을 꾸었지만, ‘아버지가 왕으로 등극하는 꿈을 꾸었다’고 이야기를 하기는 겸연쩍지 않겠습니까?
추측입니다만 그래서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용(왕)꿈을 꾸었다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는 그 마음을 대웅보전 밖과 안에 넘쳐나도록 용으로 장식하였을 같습니다. 아니면 용이 못되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안타까워서 이렇게나 많은 용을 장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랬거나 저랬거나 정조의 용주사 창건은 아버지 위패를 모시는 절로 끝나지 않고, 원한으로 가슴 가득한 아버지가 그 응어리를 풀고 하늘에 오르시라는 뜻을 담았다는 생각입니다.

 

 

창건 당시 호성전은 6칸의 건물로, 건물의 위계를 높이기 위해 양성마루를 두른 팔작지붕 집으로 지어졌는데, 용주사라는 큰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잡인의 출입을 금지하기 위해 담장과 중문을 두었습니다. 호성전은 사도세자 위패를 모시기 위해 세운 전각으로 용주사를 창건하게 한 중요한 건물이지만 한국전쟁 중 파괴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1988년에 복원된 것입니다.

 

 

 

아쉬운 것은 호성전이 창건 때와 다르게 담장과 중문이 없으며, 팔작지붕보다 격이 낮은 맞배지붕 집으로 복원되었다는 것입니다. “전(殿)”자가 붙은 건물은 부처님을 모시거나 왕이 거처하는 집을 이르는 말이므로 격에 맞도록 복원해야 함에도 이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또한 맞배지붕은 측면이 취약해서 풍판을 걸어 비바람을 막아줘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용주사 내에 맞배지붕 집이 호성전 외에 지장전과 시방칠등각이 있고, 법고각까지 풍판을 달아주면서 호성전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있는 것입니다.

 

 

 

정조는 매년 현륭원을 참배하였는데, 그때마다 호성전을 둘렀을 뿐만 아니라 용주사 뒤의 산기슭(원래의 갈량사는 지금의 용주사 위치가 아니라 더 뒤쪽의 산기슭이랍니다)까지 순행하였습니다. 정조가 그렇게나 관심을 기울이던 곳이 용주사인데, 왕실의 후원이 끊겼고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했다싶은 겁니다.

 

정조와 용주사

 

정조는 부모은중경의 내용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을 계기로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능침사찰을 건립할 뜻을 품었습니다. 그리하여 현륭원을 천장한 직후에 폐사된 갈양사 터에 용주사를 세웠고, 용주사를 승려 최고의 직책인 도총섭이 상주하는 지위로 올려주었습니다.
또한 조선의 다른 왕들은 상상조차도 못할 ‘부처님의 공덕을 칭송하고 자비로 백성을 깨우치고자 하는 염원과 사도세자의 극락왕생 그리고 낳고 길러주신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잘
호성전에 모신 위패(정조와 헌경왕후, 정조와 효의왕후)

 

공경하겠다’는 불교식 가사 봉불기복게(奉佛祈福偈)를 짓고 손수 써서 내렸으며, 유교가 내세우는 효도와는 다른 차원의 불교식 효도를 이해하여 김홍도가 그린 그림을 넣어 조성한 부모은중경 목판과 동판도 내려 주었습니다.

 

정조는 살아있는 동안 비명에 간 아버지를 사무치게 그리워했고, 죽어서도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은 효성이 지극했던 왕이었습니다. 우리는 용주사에서 저승까지 이어지는 정조의 효심을 볼 수 있고, 효심이 옅어진 이 시대에 효를 깨우치게 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용주사가 보유한 많은 문화재(국보, 보물)와 또 다른 전각들에 관한 것은 꺼내지 않았습니다. 정교하고 예술혼이 담겨진 문화재 이야기가 더 흥미 있을 터이지만, 정조의 마음과 이어지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 까닭에 생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언제인가는 절이 품고 있는 문화재 이야기를 펼쳐나가겠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궁금해 하지 마시고, 이 이야기만으로 용주사를 찾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꼭 자녀들과 같이 용주사로 나들이하시고, 인접한 융릉과 건릉도 산책하시길 권해드립니다.

 

다음은 새로운 고향으로 삼았던 수원 땅에 세운 건물, 화성행궁에 담긴 정조의 마음을 이야기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