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종기자
urubella@naver.com 2012-03-27 (화) 22:34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늙고 병들어 겨울나무 마냥 앙상하고 쇠잔한 어머니가 곁에 계셨습니다.”
떠나버린 아버지를 한 평생 기다리던 여인, 자식들 뒷바라지로 고생만 하던 어머니의 인생이 어느새 슬며시 흘러가 버렸다. 1920년 북녘 외딴 작은 섬에서 나서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뭍으로 왔으나, 이제 늙고 병들어 다시 섬처럼 홀로 방안에 갇혀버린 어머니였다.
한설희 씨는 그 어머니의 남은 날들을, 일상의 여정들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사진을 전공하지도 사진가라는 타이틀을 이름 앞에 둔 삶도 아니었지만, 사진이 좋아서 자신의 일상 중심에 세우려 노력해온 그녀였다. 신도시 판교의 여러 면면을 기록하는 중이었는데, 홀로 된 어머니를 보살피면서 자신이 하지 않으면 누구도 기록하지 않을 더 절박한 다큐멘터리가 바로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와 정서적 공감을 이룬 시간들이 사진으로 쌓였고, 그 사진들은 우리나라 최초로 사진가들이 제정한 상인 <온빛사진상>의 여러 심사자들과도 깊은 공감을 이루었다. 한설희의 <노모(老母)>가 제1회 온빛사진상 초대 수상작이 된 것이다. ‘따뜻한 빛’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는 온빛처럼, 따스한 공감이 류가헌에 가득할 것이다.
크게보기
사진가 한설희의 '노모'
사진 전문갤러리 류가헌에서 온빛사진상 제1회 수상작 노모(老母) 한설희 사진전을 3월 27일부터 4월 8일까지 연다.
류가헌은 서울 종로구 통의동 7-10(3호선 경복궁역 3, 4번 출구)에 있다. 전화:02)720-2010.
-----------------------------------
<평론가의 추천 글>
“69세 할머니가 92세가 된 엄마를 찍었다.”
고희 언저리에 첫 개인전을 펼쳐 낸다는 것도 기적이지만, 첫 눈에 명징하게 의미를 던지는 사진들의 감각이 늙지 않고 새롭기만 하니 경의를 표하고 싶다. 사진 속의 대상은 만고의 풍상을 안고 선 선생의 노모이다. 마른 나뭇가지로 가볍게 흩날리며 서 있는, 나무의 마디마디와 닮은 노모의 깊은 주름살이 화면 가득 새겨 있다. 한숨과 눈물로 얼룩지다 텅 빈 여백으로 흐르는 사진들은 장구한 세월동안 불어왔다 불고 갔을 어머니의 높은 바람과 그 바람 속에 깊이 새겨진 아픈 역사의 흔적을 더듬게 한다. 사진 찍는 사람도 찍히는 대상도 마냥 먼 산 바라기를 했을 것이다. 그러니 사진과 사진사이 강하고 거친 자국이 보이다가, 차분하게 다듬어지고, 다시 전율하게 하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곰삭은 빛으로 고요히 침전되는 변주를 보여줄 수밖에. 이러한 거리, 아름답고 슬프고 가슴 저리게 하는 카메라와 대상과의 거리에 조심조심 전전긍긍하면서 보게 한다. 아마도 그 거리는 선생의 인생길에 염결하게 피어난 바람꽃이거나 훗날 이르러야 할 길, 혹은 선생과 노모 사이에 놓인 탯줄, 그 탯줄을 이젠 딸인 작가가 끊으며 어머니에게 가는 길일 것이다. 하여 보는 내내 아프고 힘들다.
가족, 특히 어머니의 모습을 예리하게, 그것도 내면의 뜨거운 열정을 녹여내며 촬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엄마와 딸’이 여지없이 한 몸으로 보여지는(gaze)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 곳곳에 은폐하고자 하나 불협화음처럼 드러날 수밖에 없는 선생의 상처가 상징이 되고 있다. 깨진 거울, 흐릿한 유리창, 언제든지 떠날 채비가 완료된 여행가방 등 어찌 해볼 도리가 없이, 그냥 찍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왜 선생이 지독하게 카메라와 눈싸움을 하면서 당신의 온 열정을 퍼부었는지를 이제야 할 것도 같다. 결코 분리되거나 떨어질 수 없이, 이쪽과 저쪽이 단단히 묶인 채 아름다운 적멸에의 꿈을 꾸며 카메라 뒤에서 몰래 숨어 우는 눈물이 보이는 이유다. 카메라의 안쪽과 바깥쪽을 동시에 탄로시키고 ‘어머니와 나’를 싱크로나이즈하면서 끝끝내 이미지로 예인해내는 동안 결국 당신 구원에 이르는 길도 보았을 것이다. 이상하게 흘렀던 상처가 무엇인지 치유와 위무의 이미지도 보였을 것이다.
선생의 시각은 부드럽고 은유적이며, 때론 거칠고 직설적이다. 가부장 사회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강요당하고 억압됐던 가치들을 사진 위에서 부유시키다가 어느 한 순간 유폐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녀들’의 내밀한 욕망이 은유로, 직설로 표출되며 부드러움과 거칠음의 경계가 드러남을 알 수 있다. 노모의 빛과 그늘은 선생의 빛과 그늘로 전이되고, 음화와 양화로 번복되며 아득하게 클로즈업된다. 기어이는! 가슴 저리게 한다. 이토록 힘겨운 드라마를 왜 감행했을까. ‘늙은 어미의 모습을 팔아먹는’ 모습으로 보일까봐 촬영을 못했다고 했다. 아무래도 선생의 사진적 추구의 본령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통과하고 이를 포월하기 위함일 것이다. 한 생의 존엄에 대한 깊은 성찰의 길로 들어섬과 동시에 자신의 고통과도 화해하는 자아를 목도하는 일, 종국에는 사진과 삶을 일치시키는 것이 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한설희 선생의 사진 찍는 방식이 아닐까.
겨울 지나고 만화방창(萬化方暢)의 봄날에 사진을 통해 화해하고, 치유되고, 새로운 이미지가 발생하는 그녀들의 정원이 그려진다.
-이 글이 선생의 열정에 바치는 경의(敬意)가 되길 바라며.(글 최연하 독립큐레이터, 사진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