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는 구호로 되는 게 아니다. 자비실천을 체험하라.”

윤리학적 프리즘으로 불교의 자비를 고찰한 논문이 발표됐다. 다른 시각으로 불교를 바라보니 우물 안에서는 미처 볼 수 없었던 문제점들이 속속 드러났다. 불교학자가 아닌 독실한 신심을 가진 윤리학자 방영준 교수(성신여대 윤리학과)가 ‘자비실천의 윤리교육적 접근’이라는 제목의 발제를 3월 15일 열린 불교평론 ‘열린논단’에서 발표한 것이다. 가장 수준 높은 토론이 벌어지기로 소문난 열린논단 답게 격조 높은, 그러나 열기는 뜨거운 토론이 발제 이후 이어졌다.

올해로 정년퇴임을 맞는 방영준 교수 불교평론 열린논단에 3년 째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붙박이 토론자이자 참여자였다. 윤리학을 전공해 불교학 전문가는 아니지만, 3년 동안의 열린논단을 통해 그의 불교실력은 일취월장을 거듭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발제를 하는 자리에 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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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를 하고 있는 방영준 성신여대 윤리학과 교수.

방영준 교수는 ‘자비없는 불교는 없다’는 문제의식으로 발제를 시작했다. “자비는 열반으로 가는 수단이면서 또한 불교의 목적 그 자체”라고 단정했다. 그동안 한국불교가 자비를 외면하고 깨달음이라는 주제에 지나치게 집착해왔다는 점을 꼬집은 방 교수는 “깨달음과 자비는 일란성 쌍둥이와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런데도 한국불교에서는 상구보리(上求菩提)는 잘난 형님이 되었고 하화중생(下化衆生)은 못난 동생이 되었다고 꼬집었다.

방 교수는 불교학에 정통하지 못한 자신이 이 글을 쓴 이유는 “붓다의 자비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즉 자비와 자비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은 바람”이라고 부연했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깨달음과 자비라는 두 바퀴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 방 교수는 “한 바퀴가 고장이 나면 수레가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깨달음과 자비는 둘이면서 하나이고, 이 수레를 움직이는 에너지가 바로 수행”이라고 정의했다.

방 교수는 깨달음을 인지적 깨달음, 수행적 깨달음, 전일적 깨달음의 3단계로 구분하고, 1단계인 인식론적 깨달음에서 자비의 씨앗이 뿌려져 싹이 트고, 2단계 수행적 깨달음에서는 자비의 나무가 잘 자라도록 물도 주고 비료도 주며, 3단계 전일적 깨달음에서 마침내 무상정등정각이 이뤄지고 깨달음과 열반이 일치된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윤리학자인 방 교수는 특히 제대로 자비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비를 체험하는 단계가 필요하다며 도덕교육 이론인 인지(認知)적 영역, 정의(情意)적 영역, 행동(行動)적 영역을 도입해 자비체험의 이론을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도덕교육 이론에서 세 가지 영역은 독립적인 성격보다는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상호의존하는 관계라는 점에 착안, 자비의 체험은 인지적 영역과 정의적 영역이 합쳐진 과정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자비의 체험은 먼저 연기법을 이해하고 공감한 후(인지적 영역), 이를 가슴으로 품고 자비의 진동을 느낄 때(정의적 영역) 일어난다는 것이다.

“자비는 연기법이라고 하는 위대하고 웅대한 토대 위에서 출발한다”고 거듭 강조한 방 교수는 “자비는 최고의 위계에 서 있는 가치이며, 대개의 윤리적 덕목들이 정서적·감정적 요소인 파토스(pathos)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비는 만물의 존재양식인 연기법이라는 에토스(ethos)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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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토론은 시종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불교의 긴 흐름 속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고승들은 많은데 왜 큰 보살행을 한 스님들은 많지 않은가? 마더 테레사나 이태석 신부와 같은 사랑의 실천자들을 왜 불교는 가지고 있는 못하는 것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한 방 교수는 “이에 대한 자성과 성찰이 있어야 하며, 기복적(祈福的) 불교는 시급히 작복적(作福的) 불교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방 교수는 또 도덕적 행위의 정당화에 관한 이론 중 ‘자기 이익설’[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주장한 이론]을 자비 체험과 연관시켜 소개하고 “자기 이익설과 관련해 많은 경전에 표현되어 있듯이 자비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위”라고 주장했다.

“다양한 윤리관의 근원은 상호 윤리적 사유, 즉 연기법에 의한 자비 윤리적 사유에서 나온 것”이라고 전제한 방 교수는 “자비의 문제를 깨달음과 수행의 차원을 넘어 지구촌과 모든 생물체가 행복하게 만드는 윤리적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드는 학문적 작업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방 교수는 ‘사회 윤리적 차원에서 자비의 확대’가 중요하다고 밝히고 “자비의 사회 윤리적 접근이 바로 진정한 참여불교”라고 덧붙였다.

방 교수는 “현대사회에서 작동할 자비의 역할과 기능이 무엇인가에 대한 통섭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면서 “철학, 윤리학, 교육학, 심리학, 사회학, 정치학 등 인문사회적 영역과 생물학, 의학, 물리학 등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다양하게 자비의 문제를 접근하면서 이를 통합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방 교수는 결론적으로 붓다의 긴 여정은 대자대비의 길이었으며, 자비 없는 깨달음은 없고, 자비 없는 수행도 없으며, 따라서 자비 없는 불교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방교수의 발표에 대한 열린논단 참석자들의 격조 높은 질문이 때론 날카롭게, 때론 자비롭게 이어졌다.

허우성 교수(경희대 철학과)는 ‘경제정의 문제’와 ‘자비로운 국가관’의 상관관계를 물었고, 박경준 교수(동국대 불교학과)는 자비의 근원이 실제로는 방교수의 주장처럼 ‘아토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파토스’에 가깝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조준호 박사는 ‘배려의 교육’이 초기불교 가르침과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는지 설명한 후 성별과 학력과 재력 등이 자비와 관련 통계가 나와 있는 것이 있는지 물었다. 서재영 박사는 ‘자비=복지’라는 단순한 등식의 접근으로서가 아니라 이 시대 중생이 필요로 하는 자비가 무엇인지, 불교의 자비는 결국 열반으로 이끄는 과정이라는 점도 고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