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보기비구니는 한국불교에서 늘 변방이었다. 아직도 변방에서 아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최근 20년 사이에 그 위상이 현저하게 높아진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비구니에 대한 관심과 분위기가 활성화된 것은 1990년대 중반이후 2000년대 들어오면서 본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비구니 스님 가운데 큰 족적을 남긴 분들이 없지 않았지만 교계 언론에서조차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불교언론에서 비구니를 본격 조망하기 시작한 것은 1991년 법보신문에서 하춘생<<STRONG>사진> 기자가 ‘한국의 비구니’라는 제목의 기획연재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큰 족적을 남긴 비구니 스님들을 조명하는 이 연재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하춘생 기자는 이 연재를 이후 주간불교신문으로 자리를 옮기면서까지 계속해 1999년에 마무리 했다. 자료도 부족하고 인터넷 검색도 할 수 없던 시절에 연재를 위해 노심초사하던 당시 하 기자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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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비구니회 회장을 선출하는 선거에 참가한 1400여 명의 비구니스님들.

두 신문사를 통해 연재된 근현대기를 살다간 비구니고승들의 행장과 사상은 이후 두 권의 책으로 묶여 출간됐다. 1998년과 2001년 각각 <깨달음의 꽃>(1,2권)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고, 하춘생 기자의 이런 노력에 힘입어, 이후 2006년 6월 전국비구니회가 처음으로 개최한 ‘한국 비구니 수행전통에 대한 포럼’을 시작으로 비구니계 스스로 자기 정체성 찾기가 시작됐다. 하춘생 기자의 역저 <깨달음의 꽃>은 줄여서 ‘깨꽃’이라는 별칭으로 회자됐다.

전국비구니회가 개최한 포럼 등의 성과물인 단행본 <한국 비구니의 수행과 삶>(1,2권)과 2004년 한마음선원이 주최한 국제학술대회-동아시아의 불교전통에서 본 한국 비구니의 수행과 삶-와 그의 성과물인 학술논문집 발행 등 비구니 관련 학술적 조명움직임이 활성화된 일련의 과정에 ‘깨꽃’이 계기를 제공해주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춘생 기자는 이후 한국의 비구니계를 가장 잘 알고 깊이 이해하는 기자로 평가받았다. 성정이 차분하고, 원칙적이며 집요하기까지 한 하춘생 기자는 비구니에 천착하게 된 일련의 반연들을 부처님이 주신 소명으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비구니 관련 저술을 낸 것에 비구니 분야를 아예 전공학문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이후 하춘생 기자는 주변에 전인미답으로 남아 있는 ‘비구니 문중’을 정리하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그의 원력은 뒤늦게 진학한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논문이라는 소중한 결실로 이루어졌다.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은 <한국 근현대 비구니의 문중형성과 그 의의(韓國 近․現代 比丘尼의 門中形成과 그 意義)>이다. 한 범상치 않은 불교언론인이자 불교학자의 발원이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한국비구니계의 문중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대 불사의 현현으로 성취된 것이다.

하춘생 박사(동방불교대학 교수, 교학처장)의 이 학위논문 역시 그동안 비구니계 일각에서만, 또는 문중에 관심 있는 당해문중의 문도들 사이에서만 회자되고 소통되어왔던 비구니승가의 전체문중을 처음 한곳으로 섭수해 정리하고 학계와 세간에 내놓았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깊다. 비구니가 차지하는 한국불교에서의 높아진 위상을 감안한다면 이 논문은 교단사적 의미와 가치도 매우 크다. 비구니 내지 비구니문중 연구에 천착할 수 있는 자료적 전거로서 그 가치가 충분할 뿐만 아니라, 비구니는 물론 관심 있는 많은 학인학생들에게 연구할 수 있는 전기를 제공해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적지 않다.

이 논문은 한국불교사에서 차지하는 비구니의 역할과 계보를 정리했다는 점만으로도 획기적이다. 선행연구가 없고, 특별한 자료도 부재한 현실에서 오직 두 발과 원력으로 일궈낸 논문이니 그 의미가 각별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논문은 그래서 한국 비구니계에는 더 없이 값진 선물에 다름 아니다.

두루 알다시피 비구중심의 교단운영체계는 한국불교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사료(史料)에 비구니의 수계 등 여성출가의 빈번한 사례가 수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세한 행적이나 심지어 이름까지도 전하지 않는 까닭은 비구중심의 교단운영체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비구니승가에 대한 연구가 활발발하게 이뤄져야 하는 당위성은 붓다의 근본가르침을 실현하는 일이거니와 교단 내 인격평등성을 구현해 불교의 발전적 미래를 담보해야 한다는 소명에 갈음할 수 있다.

하춘생 박사는 한국의 비구니, 특히 근․현대기 비구니에 관심을 갖고 문중연구에 천착하게 된 배경은 몇 가지 나름의 이유에 근거하고 있다. 그 배경은 곧 본 연구의 목적성과 그 의의를 던져주기에 충분하다.

한국승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비구니 스님들의 문중에 대한 체계적 정리와 분석은 교단 내 출가양중의 차별성을 혁파하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불교의 미래비전을 제시하며 현대사회를 선도해가야 하는 한국 교단의 발전적 변화상을 위해서도 비구니 계보에 대한 학술적 정리와 조명은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하춘생 교수는 이 논문에서 한국 비구니승가의 일대 전기를 불러온 비구니 강학전등의 효시는 근․현대기 비구니 3대 강백으로 이름을 남기고 있는 월광당 금룡(月光堂 金龍, 1892~1965, 金光이라고도 한다) 정암당 혜옥(晶岩堂 慧玉, 1901~1969), 화산당 수옥(華山堂 守玉, 1902~1966)에 의해서 비롯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오늘날 비구강원과 견주며 비구니 교육도량으로 거듭나고 있는 비구니 전문강원의 개설과 그로 인한 비구니 강맥전승의 단초를 마련하게 된 것이 비로소 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이후 선맥과 율맥이 형성되어 이어졌으며, 비구니 문중이 실질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를 전후한 시기부터라고 하 교수는 밝히고 있다. 근․현대기를 가르며 한국불교의 비구니승풍을 진작했던 대표적인 비구니 고승들을 중심으로 은상좌연(恩上佐緣) 계통에 있는 선대(先代) 스승의 기일이나 탄신일을 맞아 후손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면서 문도결집과 계보발간의 필요성, 그에 따른 문중형성의 급진전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 교수는 오늘날 독립적인 세계(世系)를 형성하고 있는 비구니문중은 대체로 10여 개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 이들은 각각 자파의 초조 내지 개창조를 세워 󰡔문중계보󰡕를 정리하고 世系를 잇고 있는데, 그에 의거해 현황을 대별하면 청해·계민·법기·삼현·수정·봉래·보운·육화·실상·일엽(靑海․戒珉․法起․三賢․水晶․蓬萊․普雲․六和․實相․一葉) 문중과 보문종문중(普門宗門中) 등이 그들이다. 비구니문중의 이 같은 현황은 비구문중과 비교해 결코 소외될 수 없는 비등한 면모를 자랑한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 문보(門譜) 형성으로 보기에는 미흡하나 대표인물 내지 단위사찰 중심으로 독립적인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는 몇몇의 기타문중도 산재한다. 하지만 이들 기타문중은 초조 내지 그 이후의 구체적인 세계(世系)를 파악하지 못한 일면을 갖고 있다.

하춘생 교수는 결론적으로 한국불교에서 비구니가 정당한 위상을 되찾고 불교발전에 주도적이며 활발발한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해결해야할 과제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이 논문이 단순한 비구니 문중과 계보 정리에 머문 것이 아니라 비구니의 미래 전망까지 제시한 논문이라는 반증이다.

하 교수는 ▲비구니 차별이라는 교단의 구조적인 모순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비구니 스스로의 정당하고도 당당한 목소리가 조직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비구니가 득도수계할 때 이부승수계의식(二部僧授戒儀式)으로 진행하는 수계절차를 비구니계단으로 일원화해야 하며, ▲비구니의 교단참정권을 확대하거나 비구와의 형평성을 이루고 ▲‘小小戒는 폐지해도 무방하다’는 붓다의 유훈에 의거해 불조혜명(佛祖慧命)에 방해가 되는 ｢팔경계법｣ 등을 위시한 성차별적 계율을 과감히 폐기시키고, ▲비구가 갖지 못한 비구니만의 고유한 자질과 특성을 살릴 수 있는 복지‧문화‧교육(특히 유아‧어린이‧청소년) 등의 분야에서 최소한 1(사찰):1(시설) 시스템을 갖춤으로써 비구니만의 사회적 기능을 확대해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으로 상징되는 구세이념을 현실 속에 구현하고 ▲비구니의 수행‧교화‧교육활동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모색하기 위한 방안으로 비구총림과 동일한 기능의 비구니총림을 설립하고, 현재의 교구본사와 사격(寺格)을 같이하는 비구니본사를 확보하며, ▲비구니승가를 대표하는 전국비구니회의 조직력을 강화해 비구승가 또는 총무원과 동등한 교섭관계를 형성해야 하며 ▲전국비구니회의 독립기구로서 ‘승가여성차별개선위원회’(가칭)를 구성해 비구니에 대한 연구시스템을 상설 가동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모처럼 발로 뛰며 취재와 탐사, 자료수집, 적확한 분석과 전망을 고루 갖춘 학위논문이 세상 밖으로 나와 보는 이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