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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데<br>참나가 왜 필요한 것입니까?

이학종기자 | urubella@naver.com | 2011-12-09 (금) 23:19

적연 이제열 법사를 스승으로 한 법림법회의 제6차 대중법회가 지난 12월 4일 동국대 대각전에서 ‘무아와 진아’라는 민감한 주제로 봉행됐다. 1백여 명의 불자들이 동참한 가운데 이제열 법사는 한국불교의 가장 큰 병폐이기도 한 진아에 대한 국집현상과 무아에 대한 바른 이해의 시급성을 역설했다. 이제열 법사는 자신이 불교공부를 해온 경험을 토대로 진아의 허구성과 무아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무아에 대한 거침없는 법문에 참석 대중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추구해온 불교가 온전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 기회를 맞았다. 시간을 넘겨 열정적으로 진행된 법림대중법회의 설법내용을 정리했다. 이 내용은 설법의 내용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편집자가 일정부분 각색을 한 부분도 있음을 밝힌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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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4일 동국대 대각전에서 봉행된 제6회 법림대중법회에서 무아와 진아를 주제로 설법하고 있는 적연 이제열 법사. 사진=김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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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법회에는 경향각지에서 부처님의 정법을 공부하고자 하는 1백여 불자들이 동참, 시종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법문을 경청했다.

제 나이 40살 이전이었던 겨울 성도재일 날, 저는 한 명산대찰에서 열린 대법회장을 찾았습니다. 재가불자들이 2천여 명이 법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말만 들어도 다 알 수 있는 대 선지식이라는 큰스님이 법상에 올랐습니다. 여법하게 사자좌에 오른 선지식은 주장자로 세 번 법상을 치더니, 입을 열지 않는 채 양구(良久)하고 있었습니다. 무려 20분이 넘게 양구가 이어졌습니다. 법석에도 고요가 흘렀습니다. 그리고는 스님은 법문을 다 마쳤다는 듯이 법상을 내려가려고 하셨습니다. 이때 한 납자가 일어나 질문을 했습니다. 문답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대 자비심을 일으키시어 양구를 멈추시고 개구하시어 감로법문을 설해주십시오.”

“입을 열어도 30방이요 닫아도 30방이니라. 그러나 산승이 분별해서 말하겠습니다. 석가여래께서 6년 고행 끝에 새벽 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석가여래는 새벽 별을 보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별을 본 그놈을 본 것입니다. 별은 본 바로 그놈을 보고서 도를 깨친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도 도를 깨치고자 한다면 석가가 별을 본 그놈을 보고 깨쳤듯이 그 놈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큰스님께서 방금 석가가 별을 본 그놈을 보고 깨달았다고 하셨는데, 그놈은 어떤 놈입니까?”

“그놈은 일체 언설을 벗어났고, 빨갛지도 노랗지도, 만질 수도, 찾아볼 수도 없는 놈입니다. 이 놈은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이전부터 있었고, 하늘과 땅이 사라져도 영원한 놈입니다. 그대의 몸은 사대(四大)로 허망하기 그지없으나 바로 이 한 놈은 생기지도 죽지도 않는 물건이니 이 물건을 보기만 하면 하늘과 땅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고 홀연히 일체 생로병사를 떠날 수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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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림대중법회가 열린 동국대 대각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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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전 법당은 아늑하고 매우 아름답게 장엄된 훌륭한 법당이다.

실로 이 큰스님의 법문을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법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당시에는 이 신령한 한 물건을 찾아 보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이쪽저쪽 다니면서 공부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 법문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법문이 부처님의 정법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법문은 진아론자의 잘못된 법문이었던 것입니다. 진아란 무엇입니까? 참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아를 설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사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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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에 앞서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리고 있는 장면. 법림대중법회는 설법에 앞서 부처님께 향, 차, 꽃공양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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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림대중법회가 매월 첫째주 일요일로 법회 시간을 옮김에 따라 남녀노소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법회가 되었다.

제가 이 법이 삿된 법임을 안 것은 훗날 미얀마 스님과 만나서 대화를 나누면서부터입니다. 미얀마 스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당신이 수행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참나를 깨닫기 위해 수행을 합니다.”

“법사님, 참나가 있습니까?”

“아 그럼 참나가 없다는 말입니까?”

“어디에 있습니까?”

“…”

“오온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속이나 생각 속에 참나가 존재합니까? 그 속에서 참나를 찾을 수 있습니까?”

“…, 아, 찾을 수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없는 것을 발견하라고 했지,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설정해 놓고 그것을 찾으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 스님께선 왜 수행을 하십니까?”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합니다.”

“가짜 나를 버리고 진짜 나를 찾아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습니까?”

“괴로움에서 벗어나는데 진짜 나(진아)가 왜 필요합니까?”

“…”

“불교의 위대성은 대상을 설정하지 않는데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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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에 앞서 부처님 전에 향을 사르는 적연 이제열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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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장엄된 훌륭한 법당 대각전에서의 첫 법회는 법림법회 회원들에게 큰 환희심을 불러일으켰다.

저는 미얀마 스님과의 대화에서 여지 없이 깨졌습니다. 치도곤을 당한 것이지요. 논쟁을 벌여서 져본 일이 없던 터라 당시의 충격은 매우 컸습니다. 그 때 받은 수모는 지금 생각해도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습니다. 미얀마의 스님, 그것도 그렇게 이름이 나지 않은 평범한 스님으로부터 받은 교훈은 저의 불교관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불교의 많은 선지식들은 진아론적 법문을 하고 있습니다. 자성을 깨치라든가, 본래면목, 주인공, 참나 따위의 용어들은 매우 비불교적 용어들입니다. 불교의 근본 교설인 무아와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한국불교 1600년 역사에서 무아가 아닌 진아론적 입장의 법문이 설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첫째 고행공부는 무의미하다는 것, 둘째 마음에만 지나치게 집중하는 선정수행도 바른 길이 아니라는 것을 설파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나무아래에서 명상에 들어 깨달은 것은 우비고뇌를 벗어나는 길입니다. 불교는 원인과 결과를 밝히는 종교이며, 불교의 진리는 반드시 증험되어야 하는 것이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따라서 기도와 가피의 종교가 아니라 수행을 통해 지혜를 밝히고 자비행을 실천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여러분, 부처님은 별을 보는 그놈을 보고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연기를 보는 자, 법(진리)을 보는 자 곧 여래를 보리라는 가르침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연기의 진리는 곧 무아와 직결됩니다. 무아는 따라서 허망하거나 회의적인 것이 아니라 기쁘고 긍정적이며, 행복한 용어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아의 뜻을 너무나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진아의 굴레에서 벗어나 무아의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아직도 참나, 진아, 주인공을 차마 버리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없는 것이라면 수행은 해서 무엇하고 공부는 해서 무엇하느냐는 생각을 가진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해지는데 왜 진아가 필요합니까? 참 행복은 무아를 깨닫는 데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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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 피리 연주가(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단원)의 영상회상 연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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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이 끝나고 나면 즉문즉답 시간이 이어진다. 즉석에서 법에 관해 묻고 즉석에서 답을 하는 이 시간은 법림대중법회만의 특징이자 자랑이기도 하다.

법문이 끝나자 불자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이제열 법사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법문이 끝난 후 대중법회를 위해 특별출연한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김현주 님의 피리 연주 ‘영산회상’이 울려퍼지자 이내 대각전의 법석은 마치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설법한 회상으로 바뀌어갔다. 두 눈을 지긋이 감고 영산회상을 감상하는 불자들의 얼굴에는 마치 영산에서 설법하시는 부처님을 친견한 듯한 감미로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내년 1월 법림대중법회는 첫번째 주 일요일이 1월 1일임에 따라 부득히 한주 뒤인 1월 8일 동국대 대각전에서 '악마'를 주제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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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원불사 단현 2011-12-10 01: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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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바른 법문을 내리십니다_()_
이제 많은 분들이 허물어지고 다시 설 것입니다...
원불사 단현 2011-12-10 01:2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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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열 법사님도 도법스님 눈치보시느라 말 한 마디 않으시는 게지요?
나도 한마디 2011-12-10 08: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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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조사선은 혜능선사가 원조라면 원조다. 단경에서 밝히듯이 육조 헤능선의 특징은 자성을 강조하는 돈오법문임을 우리는 익히 한다. 육조의 선은 지혜와 선정이 동일하다는 전제아래 선정이 곧 지혜임을 강조하고 있다. 선정수행에서 수행의 주체를 자성가운데 살펴야 하는 것은 헤능선사의 특허와도 같다. 자성, 주인공, 참나는 찾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중심잡기의 밑돌인 것이다. 단경에서 보듯이 중생을 다 건지겠다는 서원을 자성의 중생부터 건지겠다는 서원으로,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것을 자성의 법신불에게 귀의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 자성돈오법이다. 주인공이나 참나도 그것 안에서 부터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성을 찾는다는 것은 자성이 무자성임을 깨친다는 뜻이고 무아인 자성을 보아야 한다는 것임을 우리는 안다. 우리나라의 선수행이 근본불교와 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대승불교와 함께 한 선종의 역사를 거부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주인공 불교, 참나 불교, 자성불교는 법사님 지적하신 대로 잘못이해한 부분이 많다. 주인공없이 거창한 서원을 세우고 보살행을 하는 이에게 자신의 주인공부터 챙기는 공부가 중요하다는 것이 선종의 주장인 것이다. 모든 선사들이 주장하는 주인공이나 자성공부는 자성의 공성이 무아임을 모르는 게 아니다. 그것을 긍정적인 언어로, 중생의 언어로 바꿨을 뿐이다. 무자성을 진여자성으로 불렀고, 불성을 자성으로 바꿨으며, 무여열반을 본각으로 불렀을 뿐이다. 육조대사의 위대함을 바로 중생이 중심이 된 불교를 가르치신 것이다. 무아를 알아야 한다는 붓다의 가르침이나 진아를 잃지 말아라는 다른 게 아니다. 중생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려면 중생이 응할 수 있는 생동적인 언어를 쓰는 것이 필요하다. 철학강의나 논사들의 논쟁에서는 개념적인 언어가 중요하지만 일반적인 대중들에게는 생활어가 더 편하고 이해하기가 쉬운 것이다. 중생을 변하도록 하는 깨침의 어휘는 무엇일까? 불성을 깨치라, 불성을 보라는 말보다 자신의 본성을 깨치라, 자신의 마음을 보라는 것이 더 쉽게 다가오고 그들을 감동하기 쉽게 하는 어휘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선사들이 즐겨쓰는 자성, 주인공, 진아, 참나는 법사님이 보신 것과 같이 부처님의 근본가르침과 완전히 다른 게 아니라고 본다.
여산 2011-12-10 14:4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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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말씀입니다.  말에 떨어지면 십만팔천리.
여산님! 2011-12-11 13:5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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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려도 말은 중요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에 떨어지거든요...()...
정법이 2011-12-10 14:4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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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말씀이 맞다면 앞으로 선사들이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되겠습니다. 선사들이 그런 뜻으로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많은 대중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게 문제 아니겠습니까.
하하 2011-12-10 08:4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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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든 진아든 어찌 전하고 드러낼 수 있는가 오직 자증자오일 것인데.......무아.진아 따지면 무공,진공도 따져보쇼....하하
야단법석 2011-12-10 19:5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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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열 법사님의 법문에서 언급했듯이 선사들의 자성을 깨치라든가,
본래면목.주인공, 참나 따위의 비불교적인 용어때문에 햇갈려하는 불자들 참 많습니다.
이렇게 애매모호한 한문투의 용어들들 현대인들이 이해하기쉬운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이는 불교의 진리가 현실과 괴리되지않은 채  일상 속에서 그 가르임을 실천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나침반 역할을 해 줄 수있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백동수 2011-12-11 12: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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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함다.
앎이 삶의 현장을 만날 때 수행이라 할 것이오.
삶의 문제를 함께 풀어나갈 때 수행자라 할 것이오.
삶의 문제를 통해 환하게 눈 뜰 때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할 것입니다.
제발 2011-12-12 14: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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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자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님이 교학자시잖아요. 선불교 수행자도 아니면서 그러시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많은 님같은 분둘이 10년20년전부터 그런말 해왔지만, 수행에 있어
선불교보다 발전된게 뭐 있습니까?
제생각엔 서로 가는길이 다른겝니다. 그걸 가지고 내옳다 내틀리다 하면 과연 올바를까요?
님은 님의 길을 가시면 됩니다.
선불교는 선불교의 길이 있는겝니다.
선불교에 대한 일방적 호도로도 보일 수  있습니다.
좀 자중해 주십시요.........
명인 2011-12-12 15:2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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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은 수행을 바탕으로 성취하고 앵무새는 입으로 소리만을 낼 뿐..........
수행이 부족하면 그냥 알음알이 아닌가?
불교계의 고승대덕들은 몇십년씩 몸덤고 잇으며 입 붙이고 있는 것은 말을 못해서일까?
서광 2011-12-12 21: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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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효..
참으로 한심한 사람이다.
이러고도 법사라고 동내방네 떠들고 다니니...도법같은 사람이 종정스님에게 대어들고,
명진같은 사람이 조계종 전체를 도맷금으로 넘기는 것이다.

그리도 할짓이 없으면...
승조법사의 조론중...
부진공론이나,반야무지론이나 한번 읽어 보시라.
참으로 한심한 자이다.
여기에...부화뇌동하는 자들은 더 한심한 자들이다.
오동잎 2011-12-13 00: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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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이 영 풀리지 않거든 법림대중법회에 참석하여 즉문즉답 시간에 법사님께 직접 물으시기를 권합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판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으나 아무래도 직접 대먼하고 질문하고 답을 듣고 의문이 가시지 않으면 다시 묻고 그 답을 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런저런 사설을 하는 것은 의미가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되는군요.
여산 2011-12-13 20: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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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아는 필요가 없고 참행복은 무아를 깨닫는데 있다고 하니 무아임을 깨닫는 자는 또 누구란 말이죠? 무아인데 누가 깨닫습니까? ㅉㅉ 이러니 말에 떨어진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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