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9일부터 발효된 새주소법의 전면폐기를 주장하던 불교계와 시민단체가, 주민등록등초본에 새주소를 병기하는 것을 연기하고 이의신청기간을 올해 말까지 연장하겠다고 한 정부당국의 말에 속고 있는 것 같다. 언뜻 보기에는 정부당국의 잇단 조치가 새주소의 문제점을 수긍하고 이를 해결하려고 한발 물러선 것으로 생각되지만, 자세히 들어다보면 우선 소나기나 피해보려는 꼼수였다는 확증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우선, 이의신청은 이미 공포된 새주소법의 시행령이 개정돼야 가능함에도 지금까지 어떤 개정 움직임도 포착되고 있지 않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러는 사이에 이미 서울특별시청의 홈페이지에서는 현주소의 병기도 없이 시청 주소를 ‘중구 덕수궁길 15’로 바꾸어 버렸다. 게다가 새주소의 시행을 홍보하는 현수막과 광고판이 도로가에 널려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상은 전국 어디에서나 쉽게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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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이 설치된 도로명 표지판. 연서로와 중산로를 알리는 대형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현재 도로명 새주소 개편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박호석 교수 제공


지금 대다수의 의식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전통을 지키겠다는 숭고한 사명으로 새주소의 시행을 반대하고 있음에도 이를 강행하려는 정부당국의 의도가 무엇인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불교계에서 시작된 새주소 반대운동이 이제는 문인들과 향토사학자들에게로 번지고 있다. 정부당국이 잘못을 시정하지 않고 시행을 고집한다면 분명히 악수가 또 다를 악수를 부른다는 사실을 명심해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필자는 새주소법의 전면 폐지가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부의 주장대로 새주소가 정말로 국민이 편하고, 국제적이며, 경제유발 효과가 큰 제도라면 이의신청 절차가 아니라 다음 몇 가지 원칙을 충족하는 선에서 전면적인 검토 후에, 실질적인 주민의 동의를 얻어 시행하는 것은 어떠한지 조심스럽게 건의해 본다.

첫째, 법정지명이 아닌 현재의 길이름을 고집하지 말고 법정지명을 길이름으로 살리자. 그리고 가능한 한 법정지명이 그 지역의 주도로(간선도로) 이름이 되게 하면 전통지명의 말살이라는 우려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울수원로’와 같이 길의 시작과 끝의 지명을 함께 쓰거나, ‘삼송로 세수동길’, ‘괴산로 사담길’처럼 길이름을 겹쳐 쓰는 방식을 적극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한다.

둘째, 과거에 잘못 지어진 지명을 바로 잡는 기회로 삼자. 둘 이상의 지명을 혼합하여 지었거나 졸속하게 지은 지명은 예전의 이름으로 환원해야 한다. 이를테면,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견학리는 ‘불견’과 ‘학성’을 합친 이름이므로 견학이 아닌 원래의 이름으로 환원하고, 일이삼, 상중하, 동서남북 따위로 지어진 지명이나, ‘대가리’, ‘지지리’와 같이 어감이 좋지 않은 지명은 다시 고치고, ‘살미(乷味)’, ‘고절(高節)’, ‘적가(迪加) 따위와 같이 억지로 한자를 만들거나 차음하여 지은 지명은 원래의 우리말 이름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셋째, 기존의 지명보다 새로 부여해야 할 도로명이 훨씬 많을 것이므로 자연마을 이름이나 예전의 지명을 최대한 살려 지명의 다양성을 되찾게 하자. 특히 1914년 행정개편 이전의 지명을 되살려 가급적 숫자(번호)지명이 발생되는 것을 최소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다고 엉뚱한 이름이 양산되는 것도 피해야 할 것이다.

넷째, 사용자가 한정된 독립적인 길[외길]의 경우에는 비록 그것이 종교시설이라 하더라도 사용자가 원하는 이름으로 부여하자. 다만, 여기에는 이전이나 폐지가 불가한 문화재 지정시설이거나 그에 준하는 시설을 대상으로 엄격한 기준을 정하여야 할 것이다.

어떠한 경우이던 새주소가 우리의 소중한 역사와 문화유산인 지명을 말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옛 것을 되살리고 보전하며 문화의 다양성을 되찾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정부당국의 진지한 고민을 주문해 본다. <박호석 전농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