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류현민은 지난 2009년부터 2010년까지 대전에 있는 스물다섯개 산성을 찾아갔다. ‘찾아갔다’는 말의 본디 뜻 그대로 지도에도 그려있지 않은 산성들을, 수풀에 가려져 지워진 길들을 ‘찾고 찾아서’갔다. 그것도 주로 해가 뜰 무렵에나 해가 질 무렵에 찾아가서 古산성들의 풍화된 바위가 지니고 있는 풍화되지 않은 이미지들을 사진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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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의 실체를 최대한 그대로 포착하면서, 거기에 담긴 내러티브한 이미지들을 담기 위해 대상과의 거리 간격은 늘 최소화했다. 만약 누군가 어둑한 속에서 산성의 밑 언저리 바위를 뒤져 깊이 응시하고 있는 그를 보았다면, 어둑시니(어둠의 귀신 혹은 아둔한 사람)를 본 듯 놀랐음직도 하다.

그렇게 그는 누구도 눈여김하지 않는, 쓸쓸한 퇴적물 같은 산성을 찾아가고 탐색하여, 그 바위들이 품고 있는 장구한 이미지들을 기어이 자신의 이미지로 옮아왔다. 그것이 오는 3월 13일까지 류가헌 갤러리에서 선보이는 류현민의 사진 ‘산성무진도(山城無盡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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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무진도에 부쳐

바위를 밀러 다녔다. 바위를 밀어보는 일처럼 신나는 일이 있던가. 그것은 기꺼운 노래를 부르는 일과 같다. 그 속에 나의 호적부가 있을 것만 같다. 그러한 문자들이 바위에는 새겨져 있다. 흰 팥배꽃이라도 바위 위에 무더기로 떨어져 앉으면 그 안이 머룽머룽 들여다 보였다. 바위는 그러니까 꽃으로 두드려야 열리는 창인 것이다.

바위에 앉아 노래하다가 바위 속으로 들어가는 한 사람을 알고 있다. 바위 속에서 나와 바위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알고 있다. 그의 노래는 끝내 푸른 이끼로 바위에 자라다가 저녁볕과 추위를 맞을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의 벗이다. 그의 입술이 부르는 노래는 나의 입술로도 옮겨온다. 나의 공책에도 옮겨 온다. 그 노래는 하늘로도 가서 빛난다.

흰 돌을 삶아 먹고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의 길은 산정으로 가지 않고 산정 아래를 맴돌다 내려간다. 그의 어깨는 푸르고 그의 손은 차다. 그의 꿈은 그대로 바위가 되는 것이다.

돌로 집을 짓고 그 돌 속에 들어가 불을 피우고 돌에 제 그림자를 새기다가 그 돌의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 곁에 내 이름을 나란히 놓고 살고 싶을 때가 있었다. 불 위에 얹은 술 주전자. 술 주전자 주둥이에서 내 주소지가 읊어지고 나는 그 주소지를 따라 마시며 돌 속과 돌 틈과 돌 저편을 바라보며 거기 스미는 시간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이제 나는 돌을 가슴에 얹고 사는 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 돌은 따뜻하고 그 돌은 가쁜하다. 그 돌은 멀리 보는 눈이고 가장 깊이 가라앉는 눈이다. 나는 그 사람을 알고 있다. 그 돌 위에 양귀비꽃 한 송이 얹어서 눈을 만들고 그 눈에 나의 사랑을 들켜보는 일은 어떤가. 이 추위 들어오는 저녁은.

글 / 장석남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