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고등학교 교사, 우연히 석보상절을 만나다

일본의 한 고등학교 교사가 『석보상절』을 일본어로 번역·출판해 화제가 되고 있다. 『석보상절』은 세조가 왕자시절 어머니 소현왕후 심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가모니 가족과 그의 일대기를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석보상절』의 일본어 번역자는 가와세 유키오(河瀨幸夫, 66) 씨로, 현재 일본 요코수카학원 고등학교의 국어 선생이다.

가와세 유키오 씨는 지난 2003년부터 2007년까지 5년간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까지 수료한 늦깎이 유학생이다. 그는 2007년 다시 일본으로 가 3년간 『석보상절』 번역에 매달렸다.

그가 석보상절을 연구하게 된 것은 한국에서 함께 스터디를 하던 석보상절 연구자 정진원 씨로부터 “일본의 곤쟈쿠 모노가타리(今昔物語)와 아주 비슷한 책이 한국에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원래 일본문학을 전공한 가와세 씨는 이때 처음으로 석보상절이라는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이 책을 찬찬히 읽으면 읽을수록 석보상절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책을 본 적이 없습니다. 석가모니의 인생과 가르침을 이보다 더 이해하기 쉽게 정리한 책은요. 대장경의 전체적 맥락을 이렇게 잘 정리한 책은 일본에서는 물론, 중국의 서적 중에서도 못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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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권이 나오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꼬박 3년. 앞으로 5~6년 정도 뒤에나 중권과 하권이 나올 계획이라고 한다. 이번에 나온 책에는 석보상절뿐만 아니라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까지 포함돼 있다. 일본인 특유의 꼼꼼함으로 어려운 용어들을 각주처리하고, 부록으로 석보상절 각 권의 내용들과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석보상절과 관련된 내용들, 석보상절 관련 연표까지 수록해 촘촘하게 책을 엮었다.

한국 여행 중 한국말과 일본말 비슷함에 놀라

그런데 왜 일본의 국어선생님이 한국에 유학을 와서, 그것도 불교학을 전공하게 된 것일까.

그 연원은 3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9년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선생님과 함께 한국으로 여행을 온 가와세 씨는 한국인 가이드가 가르쳐준 간단한 한국말을 배우면서 깜짝 놀랐다.

‘안녕하세요’를 일본말로 하면 ‘안네데스까’, ‘감사합니다’는 ‘간쇼데쓰’로 번역할 수 있음을 떠올리면서 일본말과 이렇게 비슷한 말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그후 일본으로 돌아간 가와세 씨는 당장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한국어는 조금만 공부를 해도 눈에 띄게 부쩍부쩍 늘었다. 당시에는 한국의 신문이 거의 국학문 혼용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나오는 신문 정도는 쉽게 읽을 정도가 되었고, 회화도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그래서 종종 한국을 방문해 책을 사기도 하고, 한국의 사찰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3년 학교를 그만두고 한국유학을 선택했다. 일본과 매우 밀접한 한국의 역사, 그 중에서도 불교사를 공부해보고 싶었는데, 동국대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던 중 『석보상절』이라는 책에 대해서 알게 되고, 또 이를 박사논문 주제로 택하면서 본격적인 번역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석보상절에 빠져든건 일본불교에 대한 비판의식서 비롯

“사실 제가 석보상절에 그토록 깊이 빠져든 이유는 일본불교에 대한 저 나름의 비판의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박사논문을 쓰기 위해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번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일본 사람들한테 이 좋은 책을 소개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사람이 석보상절의 내용을 알게 되면 불교의 본질을 생각하게 될 것이고, 일본불교의 잘못된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가 한국에서 발견한 일본불교의 잘못된 점이 무엇이었을까.

“일본불교는 종파적 성격이 강합니다. 종파불교의 성격이 강하기 이전에는 만들어진 불교경전에는 부처님 당시에 전했던 가르침이 담겨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신불교가 발달하면서 정토신앙은 정토만, 밀교는 밀교만, 선종은 선만 추구하게 되었고 석가모니가 불교의 종조인 것을 잊어버린 채 개별적 신앙에 치우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중세까지만 해도 일본 스님들도 석가모니의 사상을 공부했습니다. 저는 일본인들에게 석보상절을 통해 중세불교는 이런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일본의 스님들은 결혼도 하고 머리도 기르고 수행도 안합니다. 그래도 중세 한국의 불교서적 통해 불교원래의 모습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굳이 그런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중세까지 유지돼온 원래의 불교, 대장경 안에 있는 진정한 불교는 이런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할까요. 제 마음 속 깊숙이 있는 이야기들을 직접 이야기 하기는 힘드니까요.”

동국대서 만난 한국스님들, 일본스님과 너무 달라

그의 이야기는 대학원 시절 한국 스님들에 대한 깊은 인상으로 이어졌다.

“한국에 와서 알게 되었지만 동국대에서 스님들과 같이 공부하다 보니까 일본스님과 한국스님 전혀 다릅니다. 일본 스님들 비단으로 된 여러 색의 가사를 입고 돈도 아주 많습니다. 제가 함께 공부한 한국 스님들은 누더기 옷을 입는 이도 있고 대부분 검소하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계율을 어기는 스님들의 모습도 여럿 보았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출가자로서의 삶을 살아갔고, 특히 비구니 스님들이 어디서나 계율 잘 지키면서 살아가는 모습 보고 감동 받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중세까지 일본에도 저런 모습이 있었다는 사실 다시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옛 스님들은 수행도 많이 했고 그런 수행하는 스님들의 절이 지금까지 남아있지만 절이라는 곳이 지금은 관광지로 전락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절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죠. 저는 그런 것 알려주기 위해서 석보상절만큼 좋은 책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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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세 씨는 1945년 11월에 태어났다. 기자가 무심결에 “해방 되던 해에 태어나셨네요”라고 하자, 가와세 씨는 웃으면서 “패전이 되던 해에 태어난 거죠”라고 정정했다. 그리고 자신의 세대가 겪었던 특별함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저와 같은 해에 태어난 이들은 패전한 해에 태어났다는 특별한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폐허 속에서 태어나 아무런 희망도 없었던 시대에 살아남은 자들만의 특별한 자부심이랄까요. 제가 처음에 1979년의 한국은 지금과 아주 다른 매우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저는 그 모습에서 저의 초등학교 시절 풍경을 떠올렸습니다. 지금의 한국은 일본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한국의 역사를 통해 일본이 한국에 어떤 일을 했고, 그 영향이 현대사회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는 불교사를 선택했다. 이미 예순에 가까운 나이가 되자 현대사보다는 불교의 역사를 통해 한국과 일본을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계환스님, 박상준 위원께 고마움 전하려 책 들고 방한

“일본 사람들 중에서는 스스로를 불교신자라고 칭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불교는 일본인들의 일상생활 안에 함께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모두 집에 조상을 모시는 불당을 마련해놓고 매일 위패를 향해 합장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죽으면 절에 매장됩니다. 이미 일부로 존재하기 때문에 굳이 신자라는 말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저는 제 일부로 존재하고 있는 불교를 공부하고, 그를 통해 한국과 일본을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한국불교는 일본에게 있어서 거울과도 같은, 오래된 미래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가 이번에 잠깐 한국을 방문한 것은 석보상절이 출간되기까지, 정확히 말하면 석박사 과정을 수료하기까지 자신에게 무한한 가르침을 베풀어준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책이 출간되자 10여권의 책을 들고 다니며 지도교수 계환 스님과 그에게 불교한문을 가르쳐준 박상준 역경위원, 그리고 그와 함께 동문수학했던 도반들에게 책을 선사했다.

그런데 5~6년 뒤에야 석보상절 번역이 끝난다면 박사논문은 언제 쓰려고 하는 것일까.

“번역을 완벽하게 끝내야 박사논문을 쓰죠. 그때까지 건강하게 살아있을지 모르지만, 어차피 늦게 시작한 공부인데 차근차근 순서를 밟아가다 보면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겠어요.”

가와세 씨는 환한 미소를 던지며, 10여권의 석보상절이 담긴 배낭을 매고 동국대 언덕을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