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종
urubella@naver.com 2010-03-21 (일) 18:05크게보기조계종 총무원의 봉은사 직영사찰 지정과 관련 총무원과 갈등을 빚고 있는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이 봉은사 직영문제에 한나라당 원내대표 안상수 의원이 개입했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고 있다. 직영사찰 지정이 종단내 갈등에서 정치권의 정쟁으로 확대되는 형국이다. 더구나 압력의 당사자가 한나라당 원내대표라는 점에서 일파만파 파장이 확산될 전망이다.
또한 그동안 침묵을 지키거나 원론적 입장을 견지해오던 교계 출·재가 단체들의 입장표명도 잇따를 전망이다. 특히 안상수 대표의 ‘눈엣 가시’ 같은 주지의 처리 차원에서 직영사찰 지정이 이루어졌다는 폭로가 사실로 입증될 경우 불교 자주권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라는 점에서 범교단적 반발을 부를 가능성도 매우 크다.
조계종 총무원으로서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 직영사찰 지정을 강행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반발을 한 명진 스님을 징계하거나 봉은사 관리권의 물리적 접수에 들어갈 경우 신도들로부터 절대적인 존경과 지지를 받는 명진 스님과의 충돌이 불가피할 것이고, 그렇다고 미뤄둘 경우 종단 산하사찰에 대한 행정 장악력이 훼손됨으로써 33대 총무원집행부의 공신력 추락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종단 안으로나, 종단 밖으로나, 특히 오는 6월 2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봉은사 직영사찰 지정을 둘러싼 갈등은 교계를 넘어 정치권까지 적지않은 파장을 미치는 중대 변수로 부각되게 됐다.
명진 스님은 오늘(3월 21일) 오전 11시 서울 강남 삼성동 봉은사에서 열린 일요법회에서 “지난해 11월 13일 오전 7시 30분 프라자호텔에서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가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과 만난 자리에서 ‘정권에 비판적인 강남 한복판의 부자 절 주지를 그냥 놔두면 되겠느냐’고 이야기했다는 말을 했다”고 폭로했다.
명진 스님은 “자승 총무원장이 봉은사 주지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답하자 안상수 원내대표는 “사찰 돈을 가져다가 함부로(용산 철거민들에게) 주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구체적인 대화내용까지 밝혔다. 이에 대해 자승 총무원장은 “봉은사는 재정공개를 해서 주지도 함부로 돈을 쓸 수 없다. 그 돈은 신도들이 개인적으로 주지에게 준 돈인데, 개인 돈 쓰는 것까지 원장이 뭐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답했다고 명진 스님은 전했다.
이어 명진 스님은 “저는 봉은사의 직영 지정은 이런(한나라당의 압력) 연상 선상에서 이뤄진 일로 믿는다”면서 “당시 이야기를 전해준 김영국 거사(전 조계종총무원장 종책특보)가 앞으로는 (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낮추셔야 한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명진 스님은 “당시 자리에는 안상수 대표와 함께 고흥길 국회 문광위원장도 있었으며, 당시 그 자리에 배석했던 김영국 거사가 일주일 뒤인 11월 20일 나를 찾아와 이 대화 내용을 전달했다”고 구체적인 정황을 설명했다.
이어 명진 스님은 “자승 총무원장은 소통과 화합이 아니라 (정치권과의) 밀통과 야합을 통해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지정해 종단분란을 일으킨 것에 대해 해명해야 한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명진 스님은 또 “만약 내 말(안상수 원내대표 개입 폭로 등의 발언)이 근거 없는 허황된 이야기라고 판명된다면 내 발로 봉은사에서 나갈 것이고 총무원에 가서 내손으로 승적부의 이름을 지울 것”이라고 천명했다.
“진실로 올바른 것은 언제든지 이긴다고 믿는다”고 전제한 명진 스님은 “나라가 세종시, 4대강 등으로 복잡한 때 집권여당의 대표가 남의 종단 수장을 호텔로 불러내서 주지를 바꿔라 마라하며 종단을 분열로 몰아넣는 것은 시정잡배도 안 하는 짓이며, 안상수 원대대표는 원내대표를 사퇴하고 정계에서 은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명진 스님은 또 “안상수 원내대표가 자승 총무원장에게 (나를 두고) 좌파라고 했다고 했다는데, 도대체 좌파의 개념이 뭐냐고 묻고 싶다”며 “안상수 원내대표는 성폭력도 좌파교육 때문이라고 발언해 비판을 받는 사람인데, 아무데나 좌파 딱지를 붙이는 안 대표는 정치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야 한다”고 거듭 요구했다.
명진 스님은 “봉은사 직영문제는 집권여당의 협박과 부탁을 받은 자승 총무원장이 여론의 반발을 무릅쓰고 하수인 노릇을 한 것으로 생각한다”며 “저는 봉은사를 정말 여법하고 신심나는 도량으로 가꾸는 것이 법정 스님의 뜻을 받들고 바르게 추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법정스님 입적을 틈타 직영사찰 지정을 무리하게 처리해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제가 봉은사 주지에 환장한 사람이 아니다. 여러 신도님들이 원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걸망을 지고 나가겠다. 그러나 어떤 일이 있어도 봉은사에 지난 88년과 같은 폭력사태가 일어나선 안 된다. 또 봉은사 하나 잘 되자고 이러는 것도 아니다. 한국불교를 바꾸겠다는 원력이 있다. 그 원력을 이 봉은사로부터 시작한 것이다”라고 밝힌 명진 스님은 “만약 봉은사 문제를 합리적 방법으로 봉은사 신도들과 합의와 소통을 통해 해결한다면 모르겠지만, 정당한 설명 없이 무조건 차지하려 한다면 저의 40년 중노릇을 걸고 단호히 막겠다”고 피력했다.
“봉은사 신도님들 가운데도 왜 주지스님이 자꾸 정치적 발언을 하나 안타까운 생각을 갖고 있는 분도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힌 명진 스님은 “정치는 어떤 행위를 통해 이익을 구하는 것인데, 나는 어떤 것도 구하지 않았다. 구하는 것 없이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도 한국사회에 몇은 있어야 한다”며 이해를 구했다. 총무원장에게 용돈 주고, 정치권에 굽신대고 그렇게 살아서야 되겠느냐고 되물은 명진 스님은 “안상수처럼 시정잡배와 같은 정치인, 머릿속에 좌파 밖에는 들어 있지 않은 사람과 호텔에서 만나 밀통하는 사람(자승 총무원장 지칭)이 정치승이지, 내가 왜 정치승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쥐승, 머리 깎은 거사, 가사 입은 도둑 등으로 잘못된 승가를 꾸짖었던 서산대사가 오늘날 오신다면 야합승, 밀통승이라는 꾸지람을 하실 것이라고 일갈한 명진 스님은 박수와 환호로 지지를 표하는 신도들을 향해 “그러나 신도님들은 어떤 단체행동도 해선 안 된다. 성명서 한 쪽이라도 발표해서도 안 된다. 그런 일을 한다면 나는 당장 봉은사를 떠날 것이다”라고 강조해, 또다시 봉은사에서 폭력이 재발되서는 안 되며 문제의 매듭을 자신이 지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명진 스님의 이같은 발언에 대해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사실무근이다. 한번 총무원장을 만난 일은 있었으나, 그런 말은 한 적이 없다. 나는 가톨릭 신자로 봉은사 주지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기자들과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통해 압력행사 사실을 부인했다.
조계종 총무원은 이날 오후 명진 스님의 21일 법회 발언과 관련 대변인(기획실장) 원담 스님 명의의 입장을 발표했다. ‘봉은사 직영사찰 지정에 관한 입장’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성명에서 조계종 총무원은 “봉은사 직영사찰 지정은 우리 종단 내부의 법적 근거와 절차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정치권 개입설을 일축했다. “수도권 포교의 집중화와 체계화, 단위 사찰 성과와 역량의 종단적 결집 등을 이루고자 봉은사의 직영사찰 지정을 추진하였다”고 밝힌 조계종은 “봉은사의 역량이 이제는 단위 사찰의 모범적 사례로만 머무르기보다는 강북지역의 직영사찰 조계사와 더불어 수도권 포교와 사찰 역량 결집의 거점으로써 지금까지보다는 좀 더 종단적인 차원의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라고 지정 이유를 밝혔다.
또 직영사찰 지정은 봉은사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문제이지, 주지스님 개인의 거취에 관한 사안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조계종 총무원은 특히 “정권의 압력 운운하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주장이며 종단의 자주성을 해치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일축하고 “중앙종회 의원 49명이 찬성하고 21명이 반대한 무기명 비밀 투표로 결의된 직영사찰 지정이 마치 정권의 압력이나 의원 개인의 발언에 의해 이루어진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종단의 자주성을 무시하고 종도들의 자발적이고 민주적인 역량을 훼손하는 주장이므로 전혀 근거가 없는 것임을 엄중히 밝힌다”고 밝혔다.
당초 내일(22일) 입장 발표를 할 예정이었던 조계종 총무원이 서둘러 오늘 입장 발표를 한 것은 자승 집행부가 주지 인사에까지 정치권력에 휘둘린다는 '오해'가 확산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명진스님의 발언이 종단의 자주성과 종도들의 민주역량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점을 적시한 것도 이같은 우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명진 스님의 폭로내용이 구체적이어서, 총무원의 입장발표가 정권예속 집행부라는 논란은 가시게 할 지는 미지수다.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조계종의 봉은사 직영사찰 지정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불교계를 정치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