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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마을에서 피어오른 향기가<br>어느덧 온 세상에 가득해졌네

탁효정 | bellaide@naver.com | 2010-01-20 (수) 16:31

8년 전이던가, 불교계 기자가 되고 나서 얼마 뒤, 그 유명한 금강 스님을 만났다. 기자들이 만나기만 하면 ‘홀딱 반한다던’ 스님을 만난 곳은 어느 보리밥집에서였다. 당시 편집국 데스크와 친했던 스님이 신문사 근처에 와서 공양을 하기로 했다는데, 데스크가 신문사를 나가다가 점심시간에 밥 먹을 사람 없이 방황하는 배고픈 중생을 구제해준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유명한 스님이 왜 저렇게 촌스럽나. 키도 작고 말투도 어눌하고 서울 와서 정신없어 하는 스님은 총무원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샤프한 스님과는 십만 팔천리나 떨어져 있는 스님이었다. 대신 금강 스님은 현대인들이 막연하게 ‘스님’이라는 부류에게 원하는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스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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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 그 중에서 불교계 기자라는 부류들은 항상 스님은 이래야 한다는 선을 그어놓고, 누구는 이게 모자라고, 누구는 이게 넘친다고 평하기를 좋아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칭찬하는 법도 없고, 스님에게 반하는 일은 더더욱 없다. 그런데 금강 스님을 만나면 그 누구든지 홀딱 반한다는 말은, 역설적이게도 너무도 스님다운, 스님으로서 갖추어야 될 덕목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느릿느릿한 말투에 잔잔한 미소, 방금 새벽예불을 마치고 나온 사미 스님 같은 풋풋함, 미황사를 찾는 불자들뿐만 아니라 스님과 인연이 닿은 모든 이들에 대한 공평하고 따뜻한 마음 씀씀이, 서정분교 어린이들부터 팔순 노보살까지 친구처럼 대하는 그런 스님. 염불도 잘해서 그 청아한 울림이 청산도까지 퍼지는…. 게다가 이 스님! 불사도 잘 하고, 사찰 경영에 대한 번뜩이는 아이디어까지 있다. 스님이 처음으로 시도했던 한문학당, 사찰에서의 1박 2일 프로그램, 7박8일 용맹정진 수행프로그램(참사람의 향기), 그리고 마을 주민들과 함께 하는 괘불재, 산사음악회는 모두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의 전형이 되었다.

스님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자그마한 찻잔에 담긴 향긋한 녹차가 떠오른다. 스님은 아이디어를 박박 긁어내지 않는다. 다만 이 절에 무엇을 채우면 좋을까 하고 찬찬히 생각해보면 여러 생각들이 찻물이 자연히 잔을 흘러넘치듯 생각이 터져나온다고 한다. 스님의 대중교화가 성공한 이유는, 그 어떤 것들도 억지로 하지 않고 찻물이 넘치듯 그렇게 차고 넘치기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성실히 일구어 나갔기 때문이다.

예서 조금 더 나아가면 용비어천가처럼 들릴 테니까 그만하고, 암튼 그 유명한 금강 스님이 처음으로 책을 냈다. 미황사의 소소한 일상을 잔잔하게 담아낸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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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주지를 하게 된 과정과 부도전 탑비의 탁본을 뜨는 이야기며, 동네축제인 부처님오신날 행사, 괘불재 이야기 등 미황사에서의 하루하루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해주고 있다. 이 책은 금강 스님이 얼마나 성실하게 미황사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책이다.

금강 스님은 미황사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스님이다. 얼마 전 스님이 참석한 토론회에서 사회자가 실수로 ‘금강사 미황 스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금강 스님 하면 미황사가 자연히 연상된다.

금강 스님의 그 촌스러운 미소가 남도의 이름 없던 미황사를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절 중의 하나로 만들었다. 미황사는 사실 금강 스님의 은사인 지운 스님, 전 주지 현공 스님, 그리고 금강 스님 세 명이 일구어낸 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년전 미황사에서 처음 살 당시 스님은 직접 지게를 짊어지고 나무며 흙을 날라서 사찰 개보수 불사에 뛰어들었다. 2년간 얼마나 지게를 졌는지, 마을 사람들이 30년 지게질 한 우리보다 낫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 지게 스님이다.

그 후 공부를 하고 싶어서 금강 스님이 현공 스님에게 “딱 3개월만 절을 좀 봐달라”고 거짓말을 하고 훌쩍 중앙승가대학에 입학했다. 게다가 지운 스님조차 ‘내빼고’ 난 뒤였다. 졸지에 절을 떠맡게 된 현공 스님은 주지를 하면서 쓰러지기 직전인 건물 세 동밖에 없던 미황사를 지금처럼 번듯한 절로 만들었다.

그 사이 대학을 마치고, 백양사로 간 스님은 서옹 스님의 문하에서 참사람운동을 펼치며 선승의 길을 걸어갔다.

2000년 봄 백양사 운문암에서 동안거 해제를 마치고 별 생각없이 해남으로 내려간 스님에게는 현공 스님의 처절한 보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랫마을 사는 노보살이 밥을 해주러 올라와서는 “오메 시님 오셨소~ 그나저나 스님 축하혀요”하더란다. “무슨 축하냐”고 궁금해서 되물으니, 주지 현공 스님이 어제 떠나면서 “인자 금강 스님 보고 주지 스님이라 하시오 했당께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미황사에 주저앉게 된 금강 스님은 “현공 스님이 10년간 절의 외양을 다 갖추어 놓으셨으니, 이제 나는 절 안을 채워야 한다는 뜻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것이 어린이들을 위한 한문학당, 산사 수련회였다. 자신이 돌과 흙을 나르면서 생각했던 것들, 미황사 이 건물에서는 무엇을 하고 무엇으로 채웠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한 아이디어들을 하나씩 끄집어냈고, 스님이 하는 프로그램들은 모두 대성공을 거두었다.

처음 한문학당에 다니던 아이들이 벌써 대학에 들어갔다. 그 아이들이 요즘에는 방학 때 미황사에 내려와 자신의 10년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다. 아직 중학교에 다니는 어떤 녀석은 얼마전 스님에게 “기도 좀 해달라”고 전화가 왔더란다. 내년에 과학고에 진학하고 싶은데, 얼마 뒤에 과학경시대회에 출전하니 스님이 기도를 해서 좋은 성적 거둘 수 있도록 부처님께 빌어달라는 것이다.

아랫마을, 옆마을에 사는 노보살도 스님의 팬이기는 마찬가지다. 몇 해 전 비가 통 안와서 괘불을 꺼내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그날 오후에 소낙비가 쏟아졌다. 그때부터 금강 스님은 동네 사람들로부터 ‘영험이 큰 스님’으로 군림하고 있게 됐다.

미황사에는 전속 가수도 있다. 정기열 할아버지, 매년 열리는 음악회 1회부터 한번도 빼놓지 않고 무대에 올랐으며 부처님오신날 어르신 노래자랑에도 매년 찬조 출연한다. 미황사에는 할아버지 팬클럽도 있다고 한다.

스님은 템플스테이를 보다 발전시켜서 1주일 용맹정진 수행프로그램 참사람의 향기를 시작했다. 불교에 '관심만' 있는 젊은이들을 제대로 된 불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스님은 이 프로그램을 시작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다른 이에게 맡긴 적이 없다. 그래서 금강 스님은 항상 바쁘다. 한 달에 두 번 2주일간은 참사람의 향기를 진행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절을 떠나는 적이 없고, 주말에는 템플스테이를 운영하는데, 그 남은 자투리 시간에는 스님의 팬들이 스님을 만나기 위해 줄을 서있다.

미황사를 찾는 연간 10만명의 방문객들은 모두들 미황사 공동체의 일원이자, 금강 스님의 팬클럽임을 자처한다. 스님과 함께 ‘우리들’이 되고 싶은 것이다.

이거는 사실 비밀인데…금강 스님은 고향도 해남이다. 해남을 떠나 분명 해인사로 출가를 했는데, 문득 돌아보니 해남에서 10년째 주지를 하고 있더란다.

중국의 마조 스님도 고향 가서 대접을 못받고, 일본의 니치렌 스님도 고향에서 전법하다가 ‘어느집 막둥이가 뭘 알겠어’라는 동네 사람들의 비웃음을 듣고는 전법을 포기했고, 심지어 예수조차 자기 고향에서 전도하다 실패했다던데, 우리 금강 스님은 성공한 것이다.

나는 금강 스님을 생각하면 달마산에 핀 작은 풍란이 떠오른다. 비록 작고 소박한 모양새를 하고 있으나 그 향기가 짙어 달마산을 가득 메우는 그 풍란 말이다. 사랑을 잃고 부유하는 영혼들은 그 향기에 제자리를 찾고,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는 이들에게는 자신의 발밑을 살피게 하는, 그리고 세상에 염증을 느낀 이들에게는 다시 한번 ‘살아야겠다’는 용기를 주는 그런 향기가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에는 가득하다. 땅끝에서 터트린 스님의 소박한 웃음이 햇살처럼 이곳까지 번져오는 것만 같다.

*금강(金剛) 스님은?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열일곱 살(1982)에 대흥사에서 지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스무 살(1985)에는 해인사에서 행자생활을 하였으며, 그 해 대율사 자운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고, 스물세 살(1988)에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중앙승가대학교에 입학(1991)하여 <승가대신문> 편집장과 총학생회장을 역임했으며, <전국불교운동연합> 부의장과 <범종단개혁추진회> 공동대표를 맡아 종단 개혁(1994)을 도왔다.
백양사 서옹 큰스님을 모시고 참사람운동과 무차선회(1998)를 기획하여, 한국의 선을 일반화하고 세계화 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2000년부터 현재까지 미황사 주지 소임을 맡아 한문학당, 템플스테이, 참선수행-참사람의 향기, 괘불재 등 다양한 수행과 교육 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세상과 호흡하는 산중사찰의 전형’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또 인터넷신문 <미디어 붓다> 회장과 <청정승가를 위한 대중결사> 사무총장 그리고 조계종 교육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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