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사 주지 고현스님이 빌려준 지장스님에 관한 책들을 며칠 동안 정독해보니 중국 구화산에서는 지장의 일생을 대충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었다.

‘지장은 신라 성덕왕의 맏아들로 신라 효소와 5년(696)에 태어났고, 이름은 김수충金守忠인데 그는 18세에 당 현종 때에 인질의 성격을 띤 유학생인 숙위宿衛로 떠났다가 어머니 성정왕후가 폐비가 되어 출궁出宮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3년 만에 귀국한다. 국내로 돌아온 김수충은 왕자의 신분을 박탈당한 채 왕도의 무상함을 느끼고 삭발 출가한다. 김수충은 신라 절에서 지장이란 법명을 받은 뒤, 왕실에서 키우던 선청(제청渧聽)이란 흰 개를 데리고 성덕왕 19년(720) 24세 때에 다시 바다를 건너 중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다가 당 지덕至德 연간 신라 경덕왕 때 구화산에 이른다. 고행 끝에 지장은 구화산 전체를 지장신앙의 성지로 일구고 당 정원貞元10년, 신라 원성왕 10년(794) 음력 7월 30일에 99세로 열반에 든다. 석함石函에 안장된 지장은 3년이 지났으나 생전의 모습 그대로 등신불이 되어 중국인들에게 지장왕보살로 추앙받으며 구화산을 중국의 4개 불교 명산으로 이름나게 하고 오늘날에도 해마다 70여 만 명 정도 참배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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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주장은 중국 구화산 현지는 물론이고 국내의 학계에서도 별 이견 없이 받아들이는 지장의 일대기인 듯했다. 그러나 나는 정설로 굳어지고 있는 중국 학계의 주장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신반의했다.

『삼국사기』나『삼국유사』의 성덕왕조를 유심히 펼쳐보았지만 지장에 관한 가족 관계 기록은 단 한 줄도 보이지 않을뿐더러 중국의 고서 역시도 정황만 보여줄 뿐이지 단정적인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현재의 지장 일대기는 지장의 선대先代 부분을 억지로 맞추고 있거나 단지 추정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중국의 기록 중에 가장 신뢰할 만한 글은 지장과 비슷한 시대 인물이자 구화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은둔 거사 비관경費冠卿이 당 원화8년(813)에 지은 「구화산 창건 화성사기」九華山化城寺記였다. 어린 시절에 구화산에서 지장의 얘기를 듣고 자랐던 비관경이 지장이 열반한 지 불과 20년 만에 구화산 화성사 승려의 요청으로 지은 글이기 때문에 어떤 글보다도 신빙성이 있다고 봐야 옳았다. 더구나 화성사는 지장이 창건한 구화산의 대표적인 절인 것이다.

그러하므로 「구화산 창건 화성사기」를 참고한 지장의 생몰연대(696~794)는 일단 믿을 수밖에 없었다. 「구화산 창건 화성사기」는 지장의 열반일을 분명하게 ‘정원십년하貞元十年夏’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당 정원 10년, 즉 794년 여름에 열반했으니까 거기에서 지장의 세수 99를 뺀다면 출생 연도는 696년이 되었다.

생몰연대에 이어서 또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지장의 혈통이었다. 「구화산 창건 화성사기」에는 ‘신라 왕자로서 김씨 왕족과 근속(新羅王子金氏近屬)’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송의 찬녕贊寧 등이 988년에 황제의 명을 받아 편찬한 『송고승전』에는 지장이 ‘신라국왕의지속(新羅國王支屬也)’이라고 기록되어 ‘왕자’와 ‘왕족’의 차이를 보이지만 넓게 보아 왕족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왕자’니 ‘왕족’이니 하는 혈통 문제는 신분을 버리고 출가하여 초인적인 고행으로 성자가 된 수행자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신분과 혈통을 따지고 싶어하는 것은 이해관계에 얽혀 사는 범인들의 세속적인 관심을 뿐인 것이다.

물론 자신의 혈통을 왕자라고 고백한 지장의 자작시가 구화산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한 『청양현지』에 전해지고는 있었다.

『청양현지』에 수록된 「수혜미酬惠米」라는 시로서, 구화산에서 고행하던 지장이 오용지에게 쌀을 시주받고서 은혜를 잊지 못한다는 내용인데, ‘내 육신은 본디 왕자’라는 구절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청나라 광서 17년(1892)에 『청양현지』에 옮겨진 시지만 지장이 자기 자신을 ‘왕자’라고 노래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를 끌만했다. 또한 청양현을 관할하는 지주부池州府에서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1522~1566) 때 편찬한 『지주부지』에도 ‘왕자’란 단어를 ‘태자’라고 표기한 내용의 「수혜미」란 시가 수록되어 있는 바, 이정도의 방증 자료라면 지장을 신라의 왕자 내지는 왕족이라고 단정해도 커다란 무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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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지장이 신라 어느 왕의 왕자나 왕족인지가 분면하지 않다는 데 있었다. 대만에서 인광대사가 민국 27년(1938)에 명청대의 기록을 다시 수정하여 발행한 『구화산지』「김지장탑」에는 왕 이름이 김헌영(경덕왕)이라고 분명히 보이지만(新羅國王金憲英之近族也), 이 기록도 역시 출생의 비밀을 명확하게 밝혀주지는 못한 채 다만 경덕왕의 근족이라고 하니 지장은 적어도 신문왕과 성덕왕, 그리고 경덕왕 때의 성골이나 진골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해볼 수는 있었다.

나는 『삼국사기』를 덮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오랜 시간 집중해서 보았더니 눈이 아팠다.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우리역사에는 단 한줄도 나와 있지 않는데 어째서 지장스님이 성덕왕의 맏아들 김수충이라고 중국 일부 학자들은 단정하는 것일까?

나는 참지 못하고 고현스님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지만 시원한 대답을 듣지는 못했다. 스님 역시 어떤 확인도 해주지 못했다.

“임 박사님, 그냥 믿어버리세요. 마음 편하게 말입니다. 왜 실험실에서 연구하듯 분석하려고 하십니까? 하하하.”

스님이 웃으면서 얼버무리므로 더 이상 캐묻지 못하고 말았지만 나는 확실하게 믿기 위해서 지장의 출생 비밀을 따지고 있었다. 중국에서 등신불이 된 지장스님의 영광을 깎아내리거나 그분의 행적에 재를 뿌릴 심사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더욱 존경하고 싶어서 그랬다. 믿고자 할 때는 의심할 데까지 파헤치는 것이 나의 성격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이미 지장스님의 매력에 빠져 그분의 추종자가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삼국사기』를 다시 펼쳤다. 성덕왕의 맏아들 김수충을 낳은 첫째 왕비 성정왕후성정왕후가 출궁당한 것은 사실이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성덕왕 15년(716) 성정왕후를 내쫓았는데, 채색 비단 5백 필, 논밭 2백 결, 벼 1만 섬, 집 한 채를 주었으며 집은 강신공의 옛집을 사서 주었다.’

또한 『삼국사기』는 성덕왕 16년에 성정왕후가 난 아들 김수충이 숙위 학생으로 당에 갔다가 대감이란 벼슬을 하사받고 어머니 성정왕후가 출궁당한 이후에 귀국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해서 지장과 연결되어 지장의 일대기로 감쪽같이 삽입됐는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이런 개연성은 있을 수도 있었다. 지장을 성덕왕의 맏아들 김수충으로 가정해볼 때 성덕왕 초기의 사건들은 제법 필연성이 있어 보였다. 김수충은 인질의 성격을 띤 숙위 학생으로 입당하여 당의 문물을 접한다. 그런데 본국 신라에서는 외척에 의한 권력 암투가 치열하여 결국 성덕왕은 외척의 발호를 견제하기 위해 첫째 왕후를 내친다. 어머니가 궁 밖으로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김수충은 때를 보아 귀국한다. 그러나 자신도 태자로서의 기득권을 박탈당한다. 이에 왕도王道가 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김수충은 법도法道의 길을 찾는다. 절을 찾아가 삭발 출가하여 지장이란 법명을 받고 수행승이 되는 것이다. 마침내 지장은 유학한 인연이 있는 중국 땅으로 다시 건너가 중국의 명산을 만행萬行하던 중에 구화산에 머물게 된다.

나는 담배를 다시 꺼내 물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장이 김수충이라는 기록은 안타깝게도 중국이나 국내의 어는 고서에도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답답한 심사를 토해내듯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나는 마당으로 나가 심호흡을 했다.

-그래, 처음부터 다시 한번 추리해보기로 하자.

그러자 미처 생각지 못했던 방법이 하나 번개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나는 옆에 사람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소리쳐 말했다.

-맞아. 김수충의 나이를 비교해보자, 나이가 같다면 천만다행이고, 그렇지 않다면 지장과 김수충은 누가 뭐래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나는 부랴부랴 방으로 들어와 『삼국사기』를 다시 펼쳐 읽어내려갔다. 한줄 한줄 정독하면서 출생의 비밀을 파헤쳐갔다.

32대 효소왕은 신문왕 7년(687)에 태언 31대 신문왕이 맏아들이고, 33대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지만 형인 효소왕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위를 잇고 있었다. 성덕왕의 출생연도는 『삼국사기』에 나와 있지 않지만 형인 효소왕이 687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 이후가 돼야 했다. 왕비가 다시아이를 가지려면 적어도 1년이 지난 688년 이후에만 가능했다.

그런데 지장이 태어난 출생 연도는 효소왕 5년(696)이니 이때 성덕왕의 나이 8세에 불과한 것이다. 8세의 어린 성덕왕이 지장을 낳았다는 것은 생리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지장과 김수충은 결코 동일한 인물이 아닌 것이다. 지장은 성덕왕의 아들이 아닌 다른 왕이나 왕족의 아들로 696년에 태어났다고 불 수 있고, 김수충은 8세의 성덕왕이 더 성장한 후에야 출생했을 것이 분명했다.

-아, 아내가 지금 내 곁에 있다면 얼마나 더 좋아할까.

무엇에라도 감격을 잘하는 아내는 나에게 칭찬을 잘해주었고 나는 그런 아내를 겉으로 표현은 안했지만 몹시 흐뭇해했던 것이다. 조금만 관심을 집중하면 밝혀낼 수 있는 사실을 가지고 나는 엄청난 역사를 발견 듯 아이처럼 들떠 흥분했다.

지장과 김수충간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그 밖의 나머지는 저절로 풀렸다. 즉 김수충이 18세 때 당에 숙위로 갔다는 어느 중국 학자의 주장도 억지에 불과했다. 물론 김수충이 당에 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성덕왕 13년(714)에 김수충이 당에 간 사실을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왕자 김수충을 당에 보내어 숙위하게 했는데 현종은`집과 비단을 내려 그를 사랑했으며 조정에서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그러나 김수충의 출생 연도를 최대한 올려 성덕왕 2년(703), 즉 성덕왕 나이 15세 때로 잡아도 김수충이 숙위로 떠난 해가 714년이니 그의 나이 12세에 불과하고, 더 넉넉하게 잡아도 14,5세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김수충이 18세에 당으로 갔다는 중국 학자의 주장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는 몰라도 사실과 달랐다.

한편, 『삼국사기』는 신문왕의 가족관계를 『삼국사기』와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첫째 아들이 효소이고, 둘째 아들이 보천, 셋째가 효명인데 696년에 태어난 보천, 즉 보질도 대타자 오대산으로 출가하여 수행승이 된다는 얘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출생 연도가 다른 보질도와 지장을 동일 인물로 연결시키는 것도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여기까지 밝히는 데도 무척 피곤했지만 궁금한 사실을 마저 확인하기 위해 책상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시계는 벌써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일 식품 관련 학술회의를 진행하는 데 사회를 보기로 예정되어 있어 논문이나 자료를 미리 검토해야 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지장에 대한 호기심에 빠져 밤을 새우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지장의 본명이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중국 구화산에서는 의심 없이 지장의 본명을 김교각金喬覺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이 이름 역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신뢰할 수밖에 없는 비관경이 쓴 「구화산화성사기」나 찬녕이 편찬한 『송고승전』에도 ‘김교각’이란 이름은 없었다. 김교각이란 이름은 청나라의 유성룡이 강희 28년(1689)에 편찬한 『구화산지』에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후 후대로 내려갈수록 더 많이 등장할 뿐이었다.

지장의 이름에 대한 의문은 훗날 내가 구화산을 찾아갔을 때 어느 노교수가 이렇게 말해주어 해소될 수 있었다.

“교각이란 이름은 김지장의 본명이나 법명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그분이 구화산에서 득도하여 대각 大覺을 이룬 분이기 때문에 추증하여 부른 덕호德號로 봐야 합니다. 교각의 교는 대자와 뜻이 같습니다. 그러니 교각은 대각인 것입니다.”

나는 지장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학술회의 준비를 위해서 잠을 청했다. 시간은 어느새 새벽2시를 조금 지나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지 창이 덜컹거렸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등신불이 된 지장스님의 출생 비밀을 파헤쳐보려고 며칠 동안 고서를 읽고 뒤졌지만 사실 확인은 나름대로 좀 이루어졌으나 전체적으로는 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지장의 모습이 안개 너머에 있는 것처럼 희미해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천 년 전의 신라인 지장 스님은 바다를 건너가 중국 땅 최초의 등신불이 되고 지장왕보살이 되어 삶이 고달픈 수많은 중국 인민들에게 지금도 귀의를 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누워서 이를 악물었다. 반드시 중국으로 건너가 아내 대신 지장 등신불을 만나 그분의 얘기를 듣고야 말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말로만 듣던 등신불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것이었다. <계속>

글 정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