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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의 아름다움이 있는 경제<br>우리 불교도들이 만들어가자
이학종 urubella@naver.com 2008-12-05 (금) 10:15
김규칠 대한불교진흥원 상임이사가 진흥원에서 주관해 3달째 진행 중인 ‘불교 종사자를 위한 특강’에 초청강사로 초빙돼 ‘불교사상으로 본 자유경제 사상의 의의와 한계-자유주의 경제사상의 진화를 위하여’를 주제로 강의를 했다.
지난 11월 27일 진흥원 회의실에서 2시간 30분 동안 진행된 강연에서 김규칠 상임이사는 해박한 경제지식과 불교 및 서양철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수준높은 강의를 펼쳤다. 이번 강의는 ‘불교 종사자를 위한 특강’을 지도하고 있는 서광 스님(보스턴 서운사)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김규칠 상임이사는 “모든 삶은 순수 증여(기증)의 단계와 기증(증여)의 단계, 교환과 분업의 차원 등으로 분류될 수 있으며, 이를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무주상 보시의 차원(순수 기증), 자타관념의 생성 단계(기증), 일반 중생계(상대를 이용하는 단계의 사회)의 차원으로 나눠 설명할 수 있다”는 전제로 강연을 시작했다.
김 이사는 ‘아름다움의 질서’, ‘여백의 경제학’ 등 불교적·생태적 정서에 기반한 새로운 용어들을 제시하면서 ‘캐치업’식 삶이나 경제는 이제 지양해야 하고, 여백의 아름다움이 있는 경제를 해야 하며, 이런 흐름을 한국의 불교도들이 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불가피하게 물물교환이나 화폐교환 차원의 삶을 살아가더라도 언제나 순수 기증(증여)의 차원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이 불교적 경제의 안목이라는 것.
이날의 강연은 시종 불교의 중도, 연기, 중간, 유식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과 하이옠, 화이트헤드, 스피노자, 들뢰즈, 데리다 등 서양철학자들의 이론을 종횡으로 넘나들며 진행됐다.
이날 강의를 들은 수강자들의 요청으로 진흥원에서 강연내용을 요약 정리했다. 경제위기를 맞아 경제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도 높아진 이즈음, 김규칠 상임이사의 강연내용을 소개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판단, 진흥원의 허락을 얻어 <미디어붓다>에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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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상으로 본 자유경제 사상의 의의와 한계-자유주의 경제사상의 진화를 위하여
강사_김규칠(대한불교진흥원 상임이사, 방송통신심의위원)
어느 책 소개 글에서 이런 글귀를 봤습니다. ‘순간순간이 마무리이고 순간순간이 새 출발이다.’ 저는 이것이 바로 불교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제가 말하는 게 불교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죠. 불교는 불교와 불교 아닌 것과의 경계가 불분명하다고 하는 견해를 용인하고 있습니다. 이점은 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차이점이기도 하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께 자유롭게 말씀드릴 수 있고 여러분 또한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순간순간이 마무리이고 순간순간이 새 출발이며, 순간순간이 부정이고 순간순간이 긍정이다. 순간순간이 이것이면서 순간순간이 저것이고, 순간순간이 위로 향하면서 순간순간이 밑으로 향한다…’ 저는 이것이 바로 불교의 주요한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사상이기 전에 현실 속에서, 우리 몸속에서, 모든 존재의 변화 속에서 거짓 없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론 이전에 현실인 거죠. 이런 사실을 깨달은 부처님은 그것을 말로 표현했을 뿐이지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낸 게 아닙니다. 이처럼 순간순간이 이것이고 순간순간이 저것이며 매순간이 상향(上向)이고 하향(下向)인 것뿐만 아니라, 이 모두는 변화하고 무화(無化)이며 공화(空化)이고, 또 유화(有化)입니다. 이런 사실을 삼각형, 사각형, 또는 다이아몬드 형태나 원으로 나타낼 수 있지요. 이것이 바로 『법화경』과 『화엄경』, 『금강경』, 중관 사상이면서 동시에 삼세실유의 사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경제 현상이나 사회 현상 속에서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은 마치 그렇지 않은 양 말해왔지요. 만유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정체는 무엇일까요? 뉴턴은 그것을 만유인력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는 모든 삶이란 현상의 밑바탕은 순수 기증 혹은 순수 증여의 차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순수 기증, 순수 증여의 차원을 잘 모릅니다. 망각하고 있지요. 순수 증여를 부처님이 하신 말씀으로 바꾸어보면 바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예요. 그러면 무주상보시라고 말하지 않고 왜 순수 증여에 대해 이야기했느냐. 무주상보시를 먼저 말하고 순수 증여에 대해 말하면 순수증여 같은 말을 무주상보시의 해석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1세기에는 21세기의 용어를 쓰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고전의 해석에 그친다면 살아 있는 사상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가장 많이 경험하여 알고 있는 것은 이런 순수 기증이나 증여가 아닌 ‘교환과 분업의 차원’입니다. 그리고 이런 교환과 분업의 원리에 의하여 사회가 잘 조화되어 움직여나간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서양 사상가들은 여기에 머물면서 서로 치고 받으며 싸웁니다. 이 차원의 오른쪽에서 나온 것이 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고 왼쪽에서 나온 것이 사회주의․공산주의 체제입니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의 저자며 자유주의 사상가의 비조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죠. 이 양반은 사실 국부론을 쓰기 전에 『도덕정조론』을 쓴 것으로 유명합니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교환의 법칙을 이야기하기 전에, 『도덕정조론』을 통해 시장경제의 교환이 성립하려면 그 바탕이 되는 도덕적 정서나 윤리적 감정이 제대로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볼까요? 『파우스트』를 쓴 괴테는 신보다 밝은 태양과 아름다운 자연환경, 생명력, 사랑을 더 좋아했던 사람입니다. 굉장히 냉철한 지식인이면서도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어요.
『파우스트』에는 어느 왕국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왕국의 재정이 빈곤해지자 한 간신배가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이 왕의 소유인데 뭘 걱정하십니까? 왕이시여, 선포를 하십시오. ‘지금부터는 물건으로 세금을 바칠 수 없고 물물교환을 할 수 없으며, 이 땅에서 생산되는 것은 모두 왕이 발행한 돈으로만 교환하고 세금을 내라’고 말입니다.” 황당무계한 이야기인 듯하지만 사실은 이런 일이 인류역사상 있어왔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자유주의 사상의 발생 근거에 의문을 던진다고 할진 몰라도 그렇지 않습니다. 왕권신수설과 절대 왕정제도, 가톨릭 종교 원리가 서로 결합되면서 만든 것이 절대국가요 근대국가의 시초입니다. 근대국가의 화폐제도는 바로 그런 질서 속에서 발생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약간의 제한적인 시장경제가 있긴 했죠. 물물교환이나 초기 화폐역할을 하던 경우가 있었으니까요.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하이옠(Hayek)은 그처럼 역사상 자연적 자생적 자유주의가 시장경제 속에 있었다고 하면서 자생적인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라고, 인위적으로 그것에 개입하지 말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사회주의라면 아주 싫어하는 가장 반(反)사회주의 사상가였습니다. 저도 하이옠을 존경하지만 이 분의 주장에는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과거에 약간의 시장이 있었다고 해서, 물물교환이 있었다고 해서 근대 이후의 시장경제를 합리화하는 근거로 삼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 있습니다. 그 어떤 시장경제 체제도 강제적인 장치가 뒷받침 되지 않았던 적은 없었습니다. 잘 들여다보면 고대나 중세나 그 이후에도 권력자의 통제나 강제적 질서의 적용을 받지 않는 시장은 없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시대에도 그랬어요. 당시 발흥한 신흥 상인 계층들 역시 그들의 거래질서에 왕과 권력자들의 강제적인 정치적 도움을 받은 게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일반적인 사회 차원에서 정치적 장치에 의한 강제성 없는 순수한 교환이란 없었단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치 순수한 교환이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서로 의식하지 않은 순수교환은 말없는 생태계에 있어서는 생명의 질서예요. 각자의 입장에서는 순수증여와 같은 상황입니다. 자연 생태계 속 식물들 사이, 동식물 사이를 보면 공존과 투쟁과정에 이런 순수교환, 증여, 순수 증여 같은 움직임들이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주는 생물체의 입장에서는 결과적으로 무의식 속에서 순수한 증여의 정신과 원리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보고 무주상보시를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말 못하는 생명들은 거의 무주상보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식물들은 영역지키기나 텃세 같은 게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주상보시, 즉 순수 증여 상태에서 살아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순수 증여 및 기증과 교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순수 증여에는 자타가 둘이 아니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너와 나라는 이분법적 관념의 초월을 뜻하죠. 증여는 무주상 차원은 아닙니다. 정신적 보답이나 상찬이라도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그게 여의치 않으면 섭섭함과 원망의 감정이 생기는 차원입니다. 반면 교환은 표면적 명분상으로는 교환이지만 이용과 착취의 작동이 개입됩니다. 교환의 차원은 완전히 평화로울 수는 없어요. 이 교환의 차원에는 끊임없는 마찰과 투쟁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건 사회주의건 그 어떤 경제 체제에도 영원한 평화와 안정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 속에 저것이 있으며, 아(我) 속에 비아(非我)가 있고, 비아 속에 아가 있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역사란 아와 비아의 투쟁의 역사”라고 말했습니다. 즉 아 속에는 비아가, 비아 속에는 아가 있으며, 이것들이 끊임없이 위치를 바꾸며 섞이면서 전개되는 것이 역사라는 거죠. 굳이 이 이야기를 들먹일 필요도 없습니다. 부처님 사상에 바로 그런 내용이 있으니까요. ‘교환’은 단순한 교환이 아닙니다. 복잡한 원리들이 얽히고 설켜 있습니다. 교환이 주로 의식차원에서 일어나지만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의 충동 같은 작용에 영향을 받지요. 불교의 유식(唯識)에서는 육식(六識)→마나식(末那識)→아뢰야식(阿賴耶識)→아말라식(阿末羅識)으로 갈수록 순수의식으로 향한다고 봅니다. 아말라식으로 갈수록 순수 증여의 차원으로 향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헤겔이나 칸트는 모두 의식에 대해서 말했는데, 실은 의식으로 갈수록 아집이 생깁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보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게 되죠. 의식을 가진 인식은 선입감이나 기득관념 쪽으로 끌어당기고 자기중심적으로 통일하려고 합니다. ‘나는 나’라는 생각이 강하며, 내가 좋아하는 것을 중심으로 사물을 보려 합니다. 이게 의식에 기초한 철학의 특징이기도 하죠. 바로 동일 철학(의식 철학, 표상 철학)의 특징입니다. 오늘날 프랑스의 들뢰즈(Deleuze)나 가타리(Guattari), 데리다(Derrida) 같은 사람은 비동일 철학, 즉 비표상 철학으로 향하면서 주체를 파괴하고 해체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비표상과 표상이 싸우는 차원은 의식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아뢰야식이나 아말라식은 의식 등 육식과 대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의 철학, 비의식의 철학, 표상 철학, 비표상 철학, 동일 철학, 비동일 철학의 서양철학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유식에서 말하는 것과 다릅니다. 서양인들은 이런 세계에 대해 인식이 다르거나 관심을 덜 갖는 것 같아요.
교환의 질서가 중심이 되는 시장경제 체제를 통해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이후 근대자본주의 사조와 체제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 반동으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가 생겨났죠. 그들은 ‘자유방임으로는 안 되며 국가가 사회 공작적으로 사회를 계획하고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강제력 및 장치가 있어야 합니다. 정치적 장치란 경제적 재화의 교환만이 아니라 정치적 권력의 교환을 의미합니다. 권력자가 국민에게 배급을 하면 국민은 권력자에게 배급의 권한을 주는 것이죠. 그럼으로써 새로운 상층계급이 생겼고 그 계급으로 기존 질서가 재편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보수주의가 나타난 셈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백날 왔다갔다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상이나 사회주의 사상이나 그 모두는 의식(意識) 중심의 윤리적 도덕적 차원에서의 사회 혁명 사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가 말하는 것은 당위적(sollen)인 윤리규범이나 도덕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주상보시를 규범이나 윤리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안 됩니다. 무주상보시는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자연 질서 속에서, 존재(sein)의 질서 속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것(werden / becoming)입니다. 이미 자연 상태 속에서 잘 돌아가고 있는 아름다운 질서죠. 그런데 사람들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나 계율 등을 자꾸 규범으로만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규범이 아니라 자연적 존재(sein)의 현실(reality)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변의 법칙이란 뜻은 아닙니다. 불교는 고정된 사상이 아닙니다. ‘다양하게 사고하되 머물러 안주하지 않은 사유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본다면 자연마저 절대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실의 사회 세계는 대부분 교환의 차원에 편입되어 있습니다. 자유경제 사상이나 사회주의 사상, 혼합경제, 수정자본주의, 사회적 시장경제주의, 제3의 길, 실용주의 할 것 없이 모두 다 교환의 원리가 중심이 된 차원에서 나온 발상입니다. 그 원리의 모태는 계몽주의입니다. 제가 볼 때 근대세계는 어설픈 계몽주의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신(神) 중심에서 벗어난 것은 좋지만 인간 중심으로 만 치닫다보니까 어중간한 반(半)계몽주의가 되어버렸죠. 오로지 교환의 원리만으로써 세상을 다스리면 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이처럼 교환의 질서에 편입되어 있는 이 세상에서 정치권력이나 법적 제도적 장치, 또는 ‘살인하지 말라’, ‘싸우지 말라’며 재래식 인습적 규범이나 계율 차원에서 사회를 관리하려고 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베버(Max Weber)가 지적하였듯이 생활세계의 식민화를 초래합니다. 고답적인 도덕주의자가 되어서 ‘어떤 어떤 것은 해야 한다. 어떤 어떤 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식도 불교의 도리가 아닙니다.
다양한 차원이 존재하고 변하며 조화와 절충과 타협의 과정(process) 속에서 함께 어울려 있습니다. 그 바탕에는 아름다운 조화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교환의 차원 속에 살더라도 순수 기증, 순수 증여의 차원이 있음을 깨닫고 그러한 차원을 아름답게 보고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차원에 걸맞도록 스스로 실천해야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풀려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걸 다른 이에게도 권장하면 경제도 훨씬 잘 돌아가게 마련입니다.
이제는 여백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여백은 외부의 여백만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내부의 여백, 획일과 통제가 지배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교환의 원리가 전횡을 하지 않는 사회, 타협과 절충과 조화가 적절히 이루어지면서 변화 발전하는 사회의 내부에서 감지하고 향유할 수 있는 여백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숨통을 터주고 기(氣)를 불어넣어주기도 하는 여유와 여백을 말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여백의 경세제민학’을 하자고 감히 주장합니다. 아담 스미스 시절에는 기술이 정치화(精緻化, sophiscated)되진 않았습니다. 권력 장치가 있다 해도 그것이 사람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속속들이 구속하진 못했어요. 여지(餘地)가 있었단 말이지요. 그런데 세월이 흐를수록,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 구도로 가면 갈수록 권력 장치는 더 정치화되었고 더 촘촘해지면서 모든 걸 편입하고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정치경제학적 원리는 그에 맞춰 발전하지 못했어요. 그저 ‘모든 것은 교환의 원리에 의해서 어느 정도 잘 돌아간다’는 소박한 차원에 머물고 있을 뿐입니다. 미국식 계량경제학이란 것도 정치경제학적 원리하고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수학적 방법을 통해 기존 경제학을 다른 측면에서 부분적으로 보완하는 것일 뿐 실제의 경제학원리는 크게 바뀌지 않았어요. 제도경제학이란 것도 입각하고 있는 차원은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복잡계 경제학이 약간 주목을 받았습니다만, 아직 차원을 달리하는 획기적 원리는 제시하지 못한 상황에서 세계 경제의 위기를 만나고 있는 겁니다.
이제 불교적인 사상과 소양을 지닌 사람들이 여백을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모든 식물과 동물, 모든 사람의 평화로운 살림살이에 관한 기본을 국가의 교환이나 통제원리에 의한 정치․경제 시스템에 편입시켜 관장하는 식으로는 문제해결이 안 된다는 자각이 필요합니다. 국가의 지배권이나 교환 차원의 시장 시스템이 모든 것을 완전히 장악하는 건 자연 질서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인간은 경제적 합리성에 의해서만 행동하는 동물이 아니에요. 경제적 원리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만화경 같은 존재인 인간의 마음은 종잡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경제적 동물이면서도 미학적․감성적이며 동시에 이성적 동물이기도 합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예요.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신체의 유기적 관계는 아무도 완전히는 알 수 없습니다. 동식물과 자연 생태계는 더 그렇습니다.
부처님처럼 정직한 분은 없을 겁니다. 그분은 세상을 다 아는 듯한 표현법을 쓰지 않았어요. ‘영혼이 있는가, 없는가’, ‘세상은 영원한가, 그렇지 않은가’와 같은 질문에 결정적인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관점에서는 미지(未知)와 여백이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실행할 수 있도록 여백을 만들고 숨통을 터주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국가가 다 해주고 사회가 다 해주면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타율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율성은 사라집니다. 불교도일수록 그런 자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 불교도는 앞서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진정한 자긍심을 가진 사람은 남들의 들러리가 아닌 주인공이 됩니다. 극소수 부유층이나 권세가, 아니면 위인이나 스타 같은 인물들의 생활을 부러워하고 뒤쫓느라고 부산을 뜨는, 들러리 신세는 사람다운 삶이 아닙니다. 부러움의 대상인 열병든 듯한 그러한 생활양식 자체가 사실은 대부분이 허영의 산물입니다. 재미나고 행복하고 보람 있는, 뒤끝이 좋은 삶의 길은 각자 다 따로 있고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게 불교입니다.
그렇다면 사회세계의 교환의 차원에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중도적인 생산과 소비 생활양식 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불교도 가운데 1만 명만 바뀌어도, 아니 1천 명만 용기를 내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가령 생태계 운동을 하다보면 보수와 진보가 접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환경운동가나 진보주의자들이 생태계 보호를 주장하지요? 그러나 실은 제일 오래된 질서로서 우리 삶을 지탱시켜주고 있는 바탕이 바로 생태계거든요. 그러니까 보수주의자였던 아담 스미스나 하이옠이 주장했어야 합니다. 생태계가 뭡니까? 가장 자생적 자연적 질서 아닙니까? 따라서 자율과 자유주의를 외치면서도 생태계를 무시하는 사람은 자기배반의 행동을 일삼는 사람이라고밖에 볼 수 없어요. 진보주의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보주의자라고 자처하면서도 인위적인 공작을 추구하는 사람, 세상을 억지로 바꾸려는 사람, 생태계를 보존하자면서 수천 수백 년 된 관습과 질서는 한꺼번에 없애버리자는 사람 또한 자가당착에 빠진 거지요. 진보주의자나 보수주의자 모두 한 꺼풀만 벗겨보면 다 그런 식으로 허점이 있어요.
부처님이 뭐라고 말했던가요? 진(眞) 속에 속(俗)이 있고 속 안에 진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잇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고 했어요. 이 연기론에 많은 설명이 들어 있습니다. 중도란 정해진 게 아니라 부단히 움직이며 관계 속에서 변화하면서 적절한 지점을 찾아서 보다 더 깊은 곳을 향해, 보다 아름다운 곳을 향해서 발전하고 전진하는 과정입니다. 모든 것이 편입되고, 폐쇄되고 통제되며, 고정된 시스템 안에서만 움직인다면 중도란 이루어질 수 없어요. 미지와 여백과 무한의 바탕이 깔려 있기에 중도가 성립할 수 있고 끝없는 움직임이 전개될 수 있습니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라는 철학자는 실재(實在)를 실체로 보지 않았습니다. ‘현실의 구체적 사물은 일어나는 어떤 움직임이나 사건들이 연속되고 합성(合成)하는 계기’라고 말했죠. 연기와 유사한 개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정된 어떤 것이 실체나 시스템으로 존재한다고 보면 잘못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당시 기독교의 유일신적 신 개념을 부정했어요. 이 사람의 신 개념은 스피노자(Spinoza)와 닮은 데가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유일신이나 인격신 같은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스피노자는 ‘수많은 우주의 존재하는 움직임 속에 뭐라 말하기 어려운 작용과 원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특정 유일신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주장에 굉장히 반대했어요. 그래서 유대 사회에서 파문을 당하기도 했지요.
화이트헤드는 서양인이었기 때문에 ‘신’이란 개념을 버리지 않고 사용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철저한 자연과학자였습니다. 스피노자와 화이트헤드, 그리고 프랑스 현대 철학자 들뢰즈(Deleuze) 같은 사람들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왜냐면 불교사상을 현대적 용어로 설명하고 다른 이들을 이해시키는 데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좀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인간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동식물이나 무생물과의 관계까지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관계를 중시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공동체만 강조하는 건 아닙니다. 공동체가 개인보다 우선한다는 식의 공동체주의나 전체주의적 발상 역시 불교 사상에 맞지 않는 것이죠.
불교는 더불어 살아가자고 말하고 자비 사상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불교가 공동체를 우선시한다고 보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공동체건 개체건 아집을 가지고 실체적 주장을 하는 것은 넘어서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함께 살아가는 생명체를 도외시하는 개인주의도 문제가 있으며, 개인 원리를 손상시키는 공동체주의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의주장들에 거짓이 기재되어 있거나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목적이 들어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공동체를 무시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처럼 사람을 존중하고 생명체의 삶을 존중하고 개체의 생명을 존중하는 분이 어찌 여러 사람들의 삶을 위하지 않았겠습니까?
아까 교환의 차원에서 사람들은 모든 교환이 잘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게 바로 교환 질서의 의제화(擬制化)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억지로 그런 것처럼 만들어가는 거지요. 세상엔 머리좋은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운동(movement)도 만들고 교단도 만들고 종교도 학교도 만듭니다. 모두 나름대로 의의는 있어요.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이건 의제화다’ 하고 솔직히 자인하고 성찰만 하면 그런대로 해악은 덜할 겁니다. 고집 부리지 않고 위력(威力)을 쓰거나 쟁투로 치닫지 않으면 말입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그 속엔 교묘한 이익과 이용 관념이 들어서게 마련입니다. 순수 증여는 물론이고 기증이나 증여는커녕, 교환도 안 되고 순전히 이용과 착취만 하는 상태로 떨어집니다. 철학자들은 이걸 물화(物化)라고 하며, 이용이나 획득 대상물의 우상화 단계를 물신화(物神化)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고상한 곳을 향해 올라가다가도 어느 순간 밑으로 떨어지곤 합니다. 지, 수, 화, 풍의 4대로 구성된 인간은 여러 가지 성질의 요소를 합성하며 지금까지 진화했습니다. 다른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예를 들어 자기 보존의 기능, 자기 영역을 표시하며 텃세부리기를 하는 변연계가 우리 뇌 속에 남아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관성이 작용하여 상대를 배척하면서 또 이용하려고 합니다. 그처럼 상대를 나와는 다른, 인격이나 생명성 없는 물건으로 취급해서 이용하는 것은 곧 자기를 물화하는 것과 다름없죠. 그러면 상대도 나를 그렇게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물화 현상이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모두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불교에는 그런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해 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불자들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하고 끊임없이 자문해야 합니다. 이것이 순간순간 마무리이면서 새출발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문제를 찾고 상황을 개선시키며 나중에는 후배들에게 그런 움직임을 전달해야 합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제대로 나아갈 때 우리는 부처님 사상을 가장 잘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경제에도 그런 원리를 정착시킬 수 있습니다. 교환의 법칙만 강조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든 걸 시장화하고 경제화한다면, 그리고 서로 이용하고 적대시하다 보면 이윤의 윤리나 이익관념만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 야박하고 각박해질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되면 모두가 자기만 옳다고 떠들고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강퍅한 상태로 전락되어, 사회는 황폐화로 가는 겁니다.
불교의 이치를 어느 정도 통찰하면 새로운 경제학이 탄생합니다. 현대적인 모든 사조를 섭렵하고 그 문제점을 파악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하면 그 지평 위에 새로운 원리가 나타납니다. ‘나’ 속의 어리석은 중생심도 생각하고 동포를 생각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절절할수록 사회문제의 화두도, 생사 문제의 화두도 저절로 생깁니다. 자비심이나 출리심(出離心), 염리심(厭離心)과 공심(公心)이 있어야 화두가 제대로 잡힙니다. 출가를 했어도 동포나 민족, 나라와 인류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상 어떤 원리가 불교처럼 성속(聖俗)을 아우르고 통섭적이며 융합적일 수 있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우리 부처님은 종합적이고 포괄적이며 유연한 복잡계 경제학자입니다. 단 복잡․다단한 데로 빠지지 않으면서 복잡하고 복합․중층적인 여러 차원을 잘 아울러서 원만하게 돌아가도록 안내하는 훌륭한 경세제민학자입니다. 우리가 21세기 새로운 경제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자유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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