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여! 지금 내가 하는 이 말을 보고 들으십니까?

분명히 보고 듣는다면 보고 들을 줄 아는 그것이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십시오.

참 법신불法身佛은 진공묘지眞空妙智가 갖추어져 둥근 보름달 같고, 천개의 해가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허망하고 덧없는 꺼풀을 벗어버리고 금강석처럼 견고해서 무너지지 않을 참 몸을 얻었습니다. 청정한 법신에는 안팎이 없으니 육신의 생사 또한 지난밤 꿈과 같은 것입니다.’

고현 스님의 목소리가 너무나 비통하고 절절하여 나도 그만 침울한 부위기에 젖고 말았다. 아, 아내여 이제 허망하고 덧없는 꺼풀을 벗어버리고 금강석처럼 견고해서 무너지지 않을 참 몸을 얻으소서. 나는 어색한 대로 고현스님의 발원문을 따라 중얼거리며 합장을 풀었다. 느닷없이 당한 경험이었으므로 처음에는 놀았다가 잠시 후에야 편안한 마음을 되찾았다. 아내의 영가가 이승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왕생극락하는 순간처럼 법당 안으로 햇살이 강하게 비쳐들었다가 사라졌다. 나는 다시 법당 벽에 기대러 눈을 감았다. 이제는 고현스님의 목소리도 차분하게 가라앉아 한풀 꺾인 듯 작아지고 있었다. 산새 소리가 다시 귓속을 따갑게 울리고 계곡 물소리가 또렷하게 들여왔다.

‘영가여! 이러한 이치를 알아듣겠습니까?

서산으로 지는 해는 동녘에 다시 솟아오르고, 동녘에 솟은 달은 반드시 서산으로 기웁니다. 영가여! 이 다음 생에는 부디 좋은 인연의 몸을 받아 금생에 못다 이룬 꿈을 원만히 이루소서.

서방정토 아미타불께서 오늘 당신을 맞이하시니 열반의 기쁨을 누리소서.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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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를 지낸 고현 스님은 몹시 지쳐 있었다. 며칠 동안 재가 반복되었는지 얼굴이 꺼칠하고 입술은 물러 터져 피가 맺혀 있었다. 그러나 스님은 나를 보자마자 웃으며 만면에 생기를 띠었다.

“임 박사님, 연락도 없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냥 왔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아내가 살아 있다면 오늘 이곳에 오자고 할 것 같아서 들었습니다.”

“무슨 특별한 날이라도 됩니까?”

“사실은 오늘이 아내와 결혼했던 날입니다. 아내를 위해 재를 지낼 때는 아무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오늘 스님이 읽으신 발원문은 정말 가슴을 적시는 것 같았습니다. 제 아내를 위한 기도문 같았습니다.”

고현스님은 나에게서 뜻밖의 말을 듣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지금까지 아내가 원해서 절에서 천도재를 지냈을 뿐, 그 밖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종교에 대한 나의 시큰둥한 태도는 고현스님이 잘 알고 있었다. 과학적으로 끝까지 의심을 풀지 말아야 하는 식품공학 학자라는 것을 늘 감안하고서 나를 대해주었던 것이다.

고현스님은 내가 극락전으로 들어가 아내를 위해 기도하고 나올 때까지 법당 밖에서 기다려 주었다. 극락전 안에 이제 아내의 사진은 치워지고 없었다. 그 대신 낯선 얼굴의 사진들이 단 위에 놓여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허공에 한 조각의 구름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영가의 사진들도 그렇게 잠시 놓였다가 치워지고 없었다. 극락전 왼편에는 깃발이 하나 펄럭였다. 글씨가 큼직해서 눈이 안 좋은 내 눈에도 잘 보였다.

얻었다 해도 본래 있었던 것

잃었다 해도 본래 없었던 것

(得之本有失之本無)

인생이란 그런 것이니 너무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말라는 불가의 금언으로서 마치 가족을 잃은 재주齋主들의 상심을 어루만져주기 위해 일부러 내건 깃발 같았다. 나는 잠자코 고현스님이 안내하는 주지실이 있는 요사로 따라 들어갔다. 동향으로 자리 잡은 요사는 햇볕이 들지 않아 어둠침침했다. 나의 마음에는 이미 상심 같은 것은 없었다. 대원사의 고요한 분위기에 젖어 다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고현스님이 우려내주는 차를 마시면서 동시에 차향을 맡았다.

“연꽃차군요.”

“임 박사님은 연구소에서 차를 연구한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금지차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기 김지장전 앞에 자라는 차나무 잎으로 금지차를 만듭니다.”

“처음 들어보는 차입니다.”

“원래는 신라 땅에서 자라던 차나무였습니다만 천년 전 김지장스님이 중국으로 건너가면서 차씨를 가지고 가 구화산에 재배하여 얻은 찹니다. 중국에서는 금지차金地茶라고 하지요. 말하자면 김지장차라는 얘깁니다.”

나는 신라 흥덕왕 때 김대렴이 중국 사신으로 갔다가 차를 가져왔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본 적은 있지만 신라에서 중국으로 차가 건너갔다는 얘기는 처음이라 몹시 흥미를 느꼈다.

“정말입니까?”

“사실입니다. 김지장전 앞에 심은 차는 제가 중국 구화산에서 차씨를 구해와 뿌린 것입니다.”

“구화산에 금지차의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천년 전 지장스님이 수행했던 곳곳에 자생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장이라도 금지차를 생산한다는 중국 구화산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고현스님은 금지차보다는 김지장 스님에 대해서 더 얘기하고 싶어 했다. 나는 연꽃차를 홀짝이면서 김지장 스님을 찬탄하는 고현스님의 얘기를 들었다.

“김지장 스님은 지금 구화산 육신보전에 등신불로 모셔져 있는 지장왕보살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지장왕보살로 존숭하고 있지요, 그래서 구화산은 중국 불교의 4대 명산이 되었고. 그곳 사람들은 구화산을 연화불국蓮華佛國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신라인이 다시 불교를 중국으로 가져가 퍼뜨리고 수많은 중국인들의 귀의를 받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닙니까? 김지장 스님은 중국인들에게 지금도 지장왕보살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나는 이야기가 다소 생경하다고 느꼈지만 아내가 왜 김지장 스님의 등신불을 보려고 했는지 궁금하여 중간에 끼어들지 않고 주의 깊게 들었다. 고현스님 역시 김지장 스님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 않다면 대원사 경내에 김지장전을 지었을 리 만무했다. 고현스님은 나에게 생전 아내의 관심사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임 박사님 부인은 지장보살을 좋아했어요, 지장보살은 지옥이 텅 빌 때까지 성불成佛하지 않고 중생을 다 구제하겠다고 서원 誓願을 세운 보살이지요. 중국으로 건너간 우리 조상님 중에 그런 분이 등신불等身佛로 계신다고 하니 어찌 친견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나는 불심이 남달랐던 아내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던 부담감으로 묵묵히 고현스님의 얘기를 듣기만 했다.

“임 박사님이 원하신다면 제가 중국에 갔을 때 가져온 지장스님에 관한 서책들을 빌려드리겠습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고현스님의 몇 권의 책을 내 앞에 내밀자 나는 주저하면서 받았다. 그러자 고현스님이 강권하듯 말했다.

“임 박사님은 가셔야 합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부인의 영가를 위로해주어야 합니다.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고 했지요? 임 박사님이 김지장 스님의 등신불을 친견한다면 부인의 영가도 소원을 이룬 것처럼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더구나 부인은 김지장전을 지을 때 기둥 하나를 시주한 인연이 있습니다. 또한 나도 한 달이 지나면 그곳 구화산에 들를 일이 있습니다. 따라가시겠습니까. 어쩌시겠습니까?”

“아내가 김지장전을 짓는 데 기둥을 시주했다는 얘기는 처음 듣습니다.”

“시주는 아무도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본인 자신마저도 했다는 생각을 버려야 진짜 시주가 됩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부인은 불심이 돈독한 불제자였습니다.”

“스님께서 중국 구화산에 갈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아주 중요한 일이니 부인의 영가를 위해 가시겠다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지실에서 일어났다. 고현스님을 따라가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차를 연구하는 프로젝트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때 어디라도 나는 계획서만 제출하면 출장을 갈 수 있었다. 문제는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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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대원사에서 바로 서울로 돌아온 후 고현스님이 빌려준 책을 읽으면서 김지장 스님의 매력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김지장은 한중 수교가 된 후에야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등신불로 지금도 중국에서는 매년 70여 만 명의 참배를 받는,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통 받는 중국의 인민을 구원해주는 지장왕보살로 추앙받는 생불이었다.

사흘 후, 나는 당장 대원사로 전화를 걸었다.

“고현스님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제야 고현스님은 함구하고 있던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내가 가는 것은 김지장 스님의 존상을 국내로 모시고 오는 행사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님께서 열반에 드시면서 이렇게 유언하셨다고 합니다. ‘1200년이 지나면 조국에서 나를 찾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전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김지장 스님은 신승神僧이 분명하십니다. 스님의 예언대로 귀국을 하시게 됐으니 말입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았다. 나는 고현스님의 용의주도한 최면에 걸려 김지장 스님의 신도가 돼버린 느낌이 들었다.<계속>

글 정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