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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저렇게 웃으며 죽고 싶어요"

| | 2008-11-21 (금) 11:24

*불교소설가 정찬주 선생의 소설 '다불'을 저자의 허락을 얻어 게재합니다. 이 소설은 기이 발표되었으나, 빼어난 구성과 높은 문학적 완성도를 갖춘 소설이라는 문단의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에게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소설입니다. 이에 소설가 정찬주 선생이 미디어붓다의 독자들을 위해 소설의 게재를 흔쾌히 승낙하시여 연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다불, 지장보살이었던 김교각 스님의 삶과 사상을 이 소설을 통해 만끽하기기 바랍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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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난 지 2년-. 나는 또다시 아내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사십구재를 지냈던 대원사를 가고 있었다. 대원사 주지 고현古玄스님은 사십구재를 극락전에서 일주일 간격으로 한 번씩 주재하면서 마지막 일곱번째가 끝나고 나서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임 박사님 부인의 영가는 왕생극락하셨습니다.”

대원사 극락전 벽화 크게보기

불가에서는 영혼을 영가靈駕라고 불렀다. 그러나 아내의 영혼은 저잣거리에 발을 딛고 있는 내 곁을 떠나지 못했다. 아내는 내 꿈속에 생전의 단정한 모습 그대로 나타나곤 했다. 어떤 날은 꿈속에서 내가 외출을 못하게 자물쇠로 문을 잠그곤 했다. 나를 방에 가두어놓고는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아내의 영혼이 아직도 왕생극락하지 못하고 이 사바세계를 떠돌고 있다는 증거가 분명했다.

아니면.

거꾸로 내가 아내의 영혼을 붙들어 매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사십구재를 지내는 동안 고현스님은 가끔 내게 이런 당부를 했었다.

“재란 영가가 미련 없이 극락으로 갈 수 있도록 살아 있는 사람들이 할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산 자의 도리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산자의 죄업을 씻는 일도 영가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 줄 것입니다. 그래야 영가가 뒤돌아보지 않고 훨훨 가겠지요.”

나는 주암댐 호수 옆으로 난 국도를 달리면서 내내 아내를 섭섭하게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아내의 가슴을 멍들게 했던 기억들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부부간의 경우, 남자는 좋은 일만 기억하고 여자는 그 반대라고 했던가. 그렇다고 이미 유명幽冥을 달리한 아내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막연히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내가 불쌍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아내가 티베트와 중국 불교의 냄새가 혼재된 대원사에 가기를 좋아했다는 사실, 그뿐이었다. 아내는 대원사 입구에 있는 티베트 박물관과 김지장의 존상을 봉안한 김지장전金地藏殿을 살아생전에 유난히 자주 가고 싶어 했던 것이다. 내가 사십구재를 대원사에서 지낸 것도 사실은 그런 이유가 있었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

나는 어느 때부터인가 납덩이처럼 무거운 후회를 하고 있었다. 아내의 영혼이 왕생극락하는 데 가장 큰 장애는 바로 나라고 여기고 있었다. 아내에게 생일 한번, 결혼기념일 한 번 제대로 기억하여 치러준 적이 없었을 뿐더러 아내가 김지장의 등신불을 보고 싶다고 몇 년 전의 결혼기념일에 중국 여행을 졸랐지만 학술회의를 핑계 댔던 위인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아무튼 때늦은 지금에야 아내와의 결혼기념일을 생각해내고는 허둥지둥 대원사로 달려가고 있는 한심한 작자가 바로 나였다. -그래, 아내의 영혼이 왕생극락하지 못하고 나를 자꾸 뒤돌아보는 것은 당연하지.

나는 대원사로 들어가는 정자 옆에 승용차를 세워놓고 잔잔한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오는 산그늘이 내리어 중음中陰의 세계처럼 어둡고 우울하게 보였다. 담배를 한 대 피우는 동안, 구름 사이를 빠져나온 정오의 해가 환한 햇살을 호수에 떨어뜨리자 물결은 잠시 고기비늘처럼 반짝였다.

나는 다시 승용차를 움직여 산길을 서행으로 올라갔다. 좁은 산길에는 가로수로 심어진 벚나무들이 그림자를 차갑게 드리우고 있었다. 둥치가 굵어진 벚나무들은 좀이 되면 꽃의 터널을 만들었다가 바람이 불면 산지사방으로 꽃비를 흩뿌렸다. 차창의 브러시를 작동해야 앞이 보일만큼 낙화가 점점이 허공을 덮어버렸다.

지금은 피딱지처럼 붉은 낙엽이 우수수 지고 있는 가을-. 앓던 자국같이 붉은 반점이 박힌 나뭇잎들이 산길 위를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는 가을의 한낮이었다. 이미 단풍의 불길은 천봉산天鳳山의 온 산자락을 붉고 노란 빛깔로 태우고 있었다.

대원사大原寺.

한때는 대나무 숲이 울창하다 하여 죽원사竹原寺로 불렸으나 송광사의 제5대 국사인 충경冲鏡 천영天英이 절 이름을 대원사로 바꾼 절인데, 처음ㅁ에 나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고구려 출신 승려 아도阿道가 대원사를 창건했다는 흥미로운 이유 때문이었다.

더구나 아도는 신라 미추왕 때 신라 땅으로 들어가 불법을 포교하려다가 여의치 않자, 선산의 모례 집에서 3년 동안 숨어 살다가 죽었다고 전해지는 수행자인 것이다. 이러한 아도가 어찌하여 신라를 거쳐 배제 땅으로 들어왔는지 미스터리였다.

아도가 백제 땅으로 잠입해 왔다면 아마도 모례 집에서 숨어 산 이후, 즉 아도에 관한 삼국유사의 기록이 증발해 버린 시시가 아닐까. 모례 집도 더 이상 안전한 곳이 될 수 없었으므로 또다시 신라 땅을 벗어나 피신해야 했으리라.

나는 문득 아도가 걸었던 산길을 나도 지금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봉황이 날아가는 곳을 좇아 절터를 잡았다고 하는 아도를 따라, 천년이 지난 지금 나도 고구려와 신라 땅을 거친 아도의 마지막 행선지, 백제의 절로 가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박물관을 들리지 않고 대원사 경내로 바로 들어갔다. 언젠가 아내와 박물관 지하층에 마련된 ‘사후체험실死後體驗室’ 앞에서 사소한 언쟁을 벌였던 일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벽에 붙은 티베트 속담을 놓고 아내가 뜬금없는 소리로 나를 건드렸다.

티베트박물관 사후체험실의 모습크게보기

“저 속담처럼 죽는다면 잘 죽는 거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앞날이 창창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나도 저렇게 웃으며 죽고 싶어요.”

“이젠 수도승 같은 소릴 하는군 그래.”

내가 퉁명스럽게 쏘아주자, 아내를 그날 낮 동안 내내 입을 다문 채 굳은 표정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지금도 생각나지만 고승이 입적하기 전에 남기는 깨달음의 노래 같은 티베트 속담은 이런 내용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나는 울었고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웃으며 기뻐했다.
내가 내 몸을 떠날 때 나는 웃었고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슬피 울고 괴로워했다.

나는 잰 걸음으로 경내를 지나 고현스님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극락전에서 누군가의 재를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마이크를 타고 들려오는 소리였지만 애절하고 쉰 듯한 음성으로 보아 나는 금세 고현스님이 누군가의 재를 주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왕생극락하라는 ‘나무아미타불’을 계속 외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경내에서 햇볕이 가장 잘 드는 김지장전 쪽으로 올라갔다. 김지장전은 극락전 오른편 위쪽에 있었다. 대숲에서는 산새 소리가 귓속을 후비듯 따갑게 들여왔고, 거기에다 며칠 전에 지나간 태풍의 뒤끝이었으므로 계곡물이 돌돌 소리치며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대원사 김지장전크게보기

나는 ‘신라대각 김지장전新羅大覺 金地藏殿’이란 편액 밑에서 한줌의 햇볕을 쬐며 고현스님이 주재하는 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김지장전 둘레에는 금싸라기 같은 샛노란 금국 金菊이 제철을 만난 듯 만개해 있고, 바위 사이사이로는 차나무 잎들이 댓잎처럼 푸르게 번들거렸다.

찻잎 둘레는 톱니바퀴처럼 들쭉날쭉했다.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찻잎이었다. 나는 찻잎을 하나 따서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었다. 마침 내가 다니는 식품연구소에서는 우리 차와 중국의 차를 연구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다니는 식품연구소는 국내 굴지의 D재벌회사 산하에 있는 연구소로서 이제 D회사는 차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에 대비해 외국산 차 수입을 은밀하게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텁텁하고 떫은 찻잎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잎 모양은 다르지만 맛은 우리 찻잎과 다를 게 없군.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나무지장보살’ 하는 소리가 아주 작은 소리로 들여와 내 귀를 쫑긋거리게 했다. 그 소리는 단 한 번에 끝나지 않고 나를 유혹하듯 반복해서 들려왔다.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귀를 기울이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나는 그 속삭이는 소리를 좇아 김지장전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소리는 법당 한쪽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반복적으로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법당은 썰렁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후의 햇살이 비쳐들어 온기가 돌았다. 나는 법당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잠시나마 눈을 붙인 채 장시간 운전의 피로를 풀었다. 극락전에서는 어느새 재가 끝나 가는지 고현스님의 천혼발원문薦魂發願文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발원문을 들으며 편하게 뻗었던 다리를 개었다.

‘옛 부처님도 이렇게 가셨고, 현세의 부처님도 이렇게 가시며, 오늘 영가도 이렇게 가고,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도 언젠가는 이렇게 갈 것입니다.

영가여!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어는 곳에서 왔으며, 이 세상을 하직하고서는 이제 어느 곳을 향해 가십니까?

태어나는 것은 허공에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구름 자체는 실체가 없는 것. 생사거래生死去來 또한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생사와 상관없는 한 물건이 있어 온갖 이름이나 모양에서 벗어났으므로 밝고 고요하고 청정함이 뚜렷이 드러나 생사를 따르지 않습니다.

영가여! 이 도리를 분명히 아십시오. 이러한 도리를 알고자 한다면 허공처럼 마음을 텅 비워 청정하게 하십시오. 번뇌와 망상을 떨쳐버리면 마음 내키는 일마다 거리낌이 없을 것입니다.’

첫 부분에서, 그러니까 옛 부처도, 현세의 부처도, 오늘 영가도,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언젠가 간다는 구절에서 나는 무심코 압정을 잘못 밟은 것처럼 움찔했다. 맨살에 얼음이 얹어지는 듯해서 나는 어! 하고 허둥지둥 일어나 자세를 고쳐 앉았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나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순식간에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나를 굽어보고 있는 김지장 존상의 시선이 강하게 스쳤다. 누군가의 영가를 위한 천도재일 텐데 아내와 나를 위한 것처럼 고현스님의 목소리가 내 가슴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마이크를 타고 울리는 고현스님의 목소리가 커지자, 대숲에서 들여오는 산새 소리와 계곡의 물소리, 법당 안의 지장보살의 창불 소리가 상대적으로 작게 들렸다.<계속>

글 정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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