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경 일본의 나가사키에는 많은 화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세계 어디서든 자신들만의 문화와 상권을 구축해나가기로 유명한 화교들은 일본에서도 어김없이 차이나타운을 형성해가고 있었다. 대부분이 불교도인 이들은 일본 사찰에 나가는 대신 중국에서 스님을 모셔와 본토와 똑같은 건물을 짓고, 똑같은 신행방식으로 중국불교를 신앙해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우지(宇治)의 만푸쿠지(萬福寺)는 인겐(隱元)이 중국에서 건너와 세운 황벽종의 본찰로, 지금까지 중국풍의 사세와 수행풍을 유지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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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큰 신망을 얻고 있던 인겐은 일본에 거주하는 화교들의 요청으로 잠시 건너온 것이었으나 일본내 중국인들은 물론 일본 현지인들조차 스님의 법에 큰 감화를 받자 당시 집권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인겐에게 절을 지을 토지를 주겠으니 일본에서 계속 법을 펼치기를 간청했다. 수차례에 걸쳐 도쿠가와 막부가 인겐의 출국 허가를 내려주지 않자 인겐은 자신의 인연이 일본에 남아있다고 판단해, 일본에서 중국 황벽선(禪)을 심기로 결심했다.

인겐은 우지에 만푸쿠지를 건립하는 한편 명나라에서 만들어진 가흥대장경을 수입해 들여왔다. 인겐의 문하에 있던 테쯔겐(鐵眼)은 인겐 스님의 허락을 받고 에도에 있는 아사쿠사(淺草)를 시작으로 남으로는 가고시마로부터 북으로는 홋카이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인 모금을 펼쳐 가흥대장경을 『황벽판일체경(黃檗版一切經)』이라는 대장경으로 복각하는 대불사를 진행시켰다.

가흥대장경은 명나라에서 정장(正藏)과 속장(續藏), 우속장(又續藏) 등 세 단계에 걸쳐 제작되었는데, 일본에서 복각된 대장경 속에는 정장만 있을 뿐 속장과 우속장이 없다. 테쯔겐은 속장과 우속장을 구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구하려는 의도가 없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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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가흥대장경 정장에 이어 속장을 편찬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테쯔겐의 제자 보주(寶洲)가 남긴 글에 따르면 스승 테쯔겐이 완성하지 못한 일을 완성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속장을 판각해 대장경판을 보충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이는 테쯔겐 당시 속장을 완성하려 했으나 완성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테쯔겐이 한창 대장경을 복각하고 있을 당시 중국에서 가흥대장경의 속장이 간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정황이 여러 곳에서 포착된다. 그렇다면, 테쯔겐은 분명 속장을 간행하고 싶어했을 것이고, 중국으로부터 속장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쯔겐은 속장을 구할 수도, 속장경을 판각할 수도 없었다.

크게보기최근 동국대 사학과 강사 이종수 씨는 가흥대장경 속장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을 밝혔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던 속장이 나가사키에 도착하지 못하고 조선에 표류했고, 그로 인해 테쯔겐이 간행한 황벽판 대장경에는 가흥속장이 빠지게 됐다는 것이다.

이같은 내용은 오는 12월 6일 일본 고마자와 대학에서 열리는 ‘동아시아불교연구회’ 학술대회에서 발표될 예정이다.

이종수 씨가 이 내용을 확인하게 된 것은 조선후기에 간행된 <화엄경소연의초(華嚴經疏演義鈔)>의 출처를 추적하던 중 혜성처럼 나타난 문헌들 때문이었다.

이종수 씨는 숙종 연간의 태풍 기록에서 가흥대장경 속장으로 보이는 문헌들을 찾아냈다.

조선 숙종 7년(1681) 6월 5일 태풍이 불어 전국에 막대한 피해가 있었다. 서울 근처 산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이 뽑혔으며 전라도 바닷가에서는 고기잡이 어부들과 해산물을 채취하던 어민 71명이 파도에 휩쓸렸다는 기록이 『숙종실록』에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그런 가운데 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도에는 낯선 선박들이 파도에 떠밀려 왔다.

“표류선에는 불경이 있었는데 표지가 아주 새것이었고, 불기(佛器) 등의 물건은 좋은 솜씨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것들이 물에 떠다니다 조수에 밀려와 잇따라 전라도∙충청도 등의 바닷가 여러 진과 포구에서 건졌는데, 그 서적의 총계가 1천여권이었다.”

이 물건들은 나주관아에서 수집해 조정에 올려 보냈다. 그러나 표류선에 있던 물건 중에 관아에서 건져내지 못한 것들은 근처 마을 주민들이 주워갔는데 그 중에 불서들은 인근 사찰의 승려들이 주워갔다. 그 승려들 중에는 백암성총(1631~1700)이 있었다. 성총이 주워간 책 중에는 <화엄경소연의초>가 포함되어 있었다.

성총이 쓴 ｢화엄소초후서｣에는 “근래에 대장경을 실은 배가 표류하여 우리나라에 왔다. 그 배에는 명나라 평림 섭기윤(葉祺胤) 거사가 편찬하여 간행한 80권 전부가 있었는데 다행히 내 손에 들어왔다“는 기록이 남아, 이 책들이 가흥대장경 속장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백암성총은 17세기 말에 전라남도 징광사를 중심으로 불서를 간행하여 널리 유통시킴으로써 조선후기 불교계가 새로운 발전의 전기를 마련한 인물이다. 그 중에서도 그가 간행한 서적 중 <화엄경소연의초>는 18세기 화엄학의 유행에 획기적인 역할을 하였다. <화엄경소연의초>는 조선전기에 이미 소실돼 <화엄경소>만이 유통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성총에 의해 <화엄경소연의초>가 간행됨으로써 조선후기 화엄학이 크게 유행하였던 것이다.

이종수 씨는 “당시 조선불교계는 이미 화엄경을 필수과목을 채택해 강원에서 교재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화엄경소의 참고서라고 할 수 있는 화엄소초가 없어서 학승들이 화엄의 자세한 뜻에 대해서는 참고할 자료가 없는 실정이었는데, 성총이 중국에서 표류한 『화엄소연의초』를 입수함에 따라 조선 화엄학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바닷가에서 이런 횡재를 한 성총의 기분이 어떠했을까. 어쨌든 이 책들은 조선후기 불교학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놓았고, 속장경에 포함된 책들은 조선시대 강원의 참고서로 널리 활용됐다.

400여년전 일본으로 향하다 서해에서 표류하던 가흥대장경 속장의 운명은, 결국 조선의 승려 백암성총을 만남으로 인해 조선 화엄학을 꽃 피우는 계기가 되었다. 어쩌면 애초부터 그런 운명이었던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