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1912~1993). 한국불교 현대사에서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스님을 꼽는다면 단연 성철스님일 것이다.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며, ‘가야산 호랑이’라는 별칭을 가질 만큼 대단한 카리스마를 발휘했던 성철스님의 영향력은 입적한 지 20년이 넘도록 굳건히 유지되고 있는 중이다.

그렇기에 성철스님에 대해 이런저런 평가를 하는 것은, 찬사와 호평을 빼고는 사실상 불가능했던 게 사실이었다. 성철스님의 위력은 마치 제갈공명이 그랬던 것처럼 사후에도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기 때문이다.

성철스님 이후 여러 종정이 배출되었지만, 아직도 일반 불자들이나 국민들에게 종정스님은 성철스님으로 각인되어 있다. 아직은 그 누구도 성철스님의 그림자를 온전히 벗어난 이가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크게보기

그런 성철스님을 군사독재 정권에 부응한 정치적 인물이라고 정면으로 비판한 책이 출간됐다. 이 ‘문제’의 책은 서강대 종교학과의 프랑스인 교수 서명원 신부가 쓴 <가야산 호랑이의 체취를 맡았다>(서강대학교 출판부)이다. ‘퇴옹성철, 이뭣고?’라는 다소 도발적인 부제를 단 이 책은 성철스님이 ‘독재정권과 조응’했다는 주장 외에도, 성철스님이 고려 지눌스님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도 조계종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감히 범접할 수 없었던 큰 산에 대한 한 이국인 교수, 그것도 가톨릭 신부라는 성직을 가진 학자의 저술을 통한 성철 비판은 당연히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특히 조계종의 반발이 일어날 것으로 보였다. 솔직히 이 책이 출간된 지 한 달여 만에, 그러니까 뒤늦게 책 소개를 하는 것은, 이 책과 관련해 불교계 종단이나 학계의 반박이나 공식적인 반발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포함해서 다뤄야겠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자의 이런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불교계 어느 학자, 어느 단체에서도 이를 공식적으로 이 저술에 실린 문제의 내용에 대해 문제를 삼고 나오는 곳이 없다. 성철 탄신 100년을 전후에 열었던 여러 차례의 세미나에서 침이 마르게 성철스님에게 찬사를 던졌던 학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저자 서강대 종교학과 서명원 교수는 현직 신부라는 점에서, 성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 세간의 화제를 모았고, 특히나 종교의 구분을 넘은 학문적 교류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동안 서 교수는 실제로 불교계에 각종 세미나에도 참석해 논문을 발표하거나 토론을 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최근 성철스님의 삶과 사상을 비판적 입장에서 다룬 책을 펴냈다는 것은 일종의 사건이다. 그러나 이 책은 성철스님 탄신 100주년을 전후에 쏟아져 나온 찬사 일변도의 성철 평가에서 벗어나 성철불교의 장단점 조명을 시도한 점에서 일단 평가할 만하다고 할 것이다.

서 교수는 프랑스에서 성철스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국내에서도 성철스님 관련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던 성철 전문가 중의 한 사람이다. 이 책에서 서 교수는 그동안의 성철스님에 관한 연구를 토대로 성철스님의 번역 및 저술서, 돈점논쟁 등에 대해 조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논란거리를 제공한 것은 책 마지막에 영문으로 수록된 ‘20세기 한국사와 퇴옹성철의 사자후-깨달음과 역사인가, 역사와 깨달음인가’라는 논문이다.

그런데 서 교수는 이 논문은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수록해 놓았다. 서 교수는 한글로 번역할 경우 곤란한 문제(issue)를 일으킬 수 있다는 어느 학자의 의견을 수용했다며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들고 있다. 사실 이런 태도는 학자답지 않다. 영어로 수록하면 이슈가 안 될 것이라는 시각은 나이브하다. 서 교수가 제시한 성철 비판이 ‘정당하거나, 정당하지 않거나’와 관계없이 이 책이 갖는 최대 오점은 문제의 논문을 영어로 게재한 것이라고 본다.

아무튼 서 교수의 이런 납득하기 어려운 생각이 '맞아떨어진' 것인지는 몰라도, 현재까지 이 책에 대해 불교학계의 반박이나 공식적인 반응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성철스님의 상좌인 원택 스님이 이사장으로 있는 백련문화재단에서 “새로 쓴 것(문제의 논문 지칭) 중에…, 박영재 교수(서강대)가 써준 것(추천사) 중 성철 스님의 열반송을 왜곡한 부분이 있고, 서명원 교수가 영어로 쓴 논문 내용 중 성철 스님이 독재와 조응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위 부분에 대해서 (저희는) 상당한 왜곡이라고 서 신부와 서강대 출판부 쪽에 항의했다. 돈오돈수나 돈오점수에 대한 상호 비판과 합리적 논쟁 등은 얼마든지 수용하지만 사실과 다르게 성철스님이 거의 독재에 부역한 듯 쓴 것은 상당히 유감스럽다. 박정희가 찾아와도 큰절에 내려가지 않던 예만 보아도 그것이 아니고, 전두환 국보위도 거절한 것도 그렇다”는 입장을 각 언론사 출판담당 기자들에게 메모 형식으로 전달한 것이 전부다.

성철스님 관련 전공을 했거나 세미나에 참석 발제 또는 토론을 했던 수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은 납득이 안 된다는 지적이 많다. 조계종의 고질병이 된 일단 ‘뭉개고 보는’ 망종적(亡宗的) 풍토가 불교학계에서도 통용된다면 불교의 미래는 참으로 암담하다. 일각의 지적대로 서 교수의 이번 저술이 문중을 중심으로 고승을 일방적으로 미화하려는 섣부른 효행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차제에 일부 학자들의 이른바 주최 측의 주문에 따라 논문을 쓰는, 이른바 ‘OEM’ 논문 양산 관행이 일소되는 전환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서명원 교수의 ‘성철 비판’을 한국불교를 한 단계 성숙시키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에 불교학계가 답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