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타폰의 달빛20

                                  토스카나 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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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정윤경 작가)

 정 작가는 권 회장에게 중요한 원고를 메일로 받았다. 책 한 권 분량의 원고였다. 빌리 씨에게 작곡을 공부했던 제자 마틴 스캄레츠(Martin skamletz)가 스승의 ‘음악 인생’을 인터뷰해서 기록한 원고였다. 마틴 스캄레츠는 베른 예술대학 음악이론 강사이자 해석연구소 소장이었다. 인터뷰는 독일어로 했겠지만, 권 회장은 정 작가가 읽을 수 있도록 고맙게도 한글로 번역한 원고를 보내주었다. 

 정 작가는 한글 번역 원고를 보는 동안 빌리 씨가 작곡에 관심을 갖게 된 때가 마리안느 부인을 만났을 무렵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한편, 원고에는 빌리 씨가 이탈리아로 가게 된 이유 등이 상세하게 실려 있었다. 내용은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 성년기 순이었는데, 성년기의 1986년도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그해 8월에 결혼했습니다. 저는 마리안느와 몇 년 전부터 알고 지냈습니다. 몬타폰 계곡의 슈룬스(Schruns) 마을 축제 때 열린 댄스 행사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었지요. 당시 그녀는 펠트키르히 문법학교(Gymnasium)에 다니고 있었으며, 저는 오케스트라 음악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인스부르크에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댄스 행사 중에 그녀를 보고 다가가서 함께 댄스 무대에 올라가 한두 시간 정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거의 말을 하지 않았지요. 이후 어느 날 제가 그녀를 집으로 데리고 갔고 그날부터 함께 지냈지요. 그때가 70년대 말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작곡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요. 당시 마리안느는 저보다 현대음악을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현대음악을 연주하는 콘서트에 자주 갔었지요. 물론 현대음악 콘서트에 저와 함께 간 날도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저는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아내는 교사가 되어 중등학교에서 독일어와 음악을 가르쳤습니다. 결혼 후 제가 작곡가로서 몇 년 동안 경력을 쌓아갈 때 그녀는 저를 응원해주었고 제 편이 되었으며, 제가 작곡하거나 공연을 위해 여행하는 동안 저를 항상 이해해 주었지요. 한 마디로 훌륭한 아내였습니다.’

 한편, 1987년 빌리는 성 게롤트(St. Gerold) 수도원에서 열리는 콘서트에 나다니엘 신부의 초대를 받아 간 적이 있었다. 1987년 5월 초였다. 콘서트 관현악단의 지휘자는 루돌프 바움가르트너(Rudolf Baumgartner)였는데, 빌리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를 다시 만나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는 빌리의 작곡에 은근히 관심을 보였고, 빌리의 음악적 계획들을 물었다. 그가 그렇게 관심을 보인 것은 빌리가 작곡가로서 점점 이름이 알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87년 비엔나 콘체르트하우스가 주최하고 아르디티 콰르텟이 심사해서 연주하기로 한 경연대회에서 빌리의 곡이 비트 푸러(Beat Furrer)의 곡과 함께 1등을 차지했던바, 아르디티 콰르텟은 1974년 영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어빈 아르디티(Irvine Arditti)가 주도하여 결성된 현악 사중주단이었던 것이다. 빌리의 곡은 아르디티 콰르텟이 초연하였으며 그의 곡이 더 큰 무대로 나아가는 첫걸음 중 하나가 되었다. 빌리의 곡이 처음으로 포랄베르크 주 밖에서 연주되었는데, 신문 방송 등이 ‘자연의 법칙을 음악적으로 응용한 작품’이라고 찬사를 보냈던 것이다. 당시 비엔나 콘체르트하우스 사무총장이었으며 훗날 취리히 오페라하우스 감독이 된 알렉산더 페레이라를 만난 것도 그때였다.

 루돌프 바움가르트너를 만난 지 7개월 만이었다. 1987년 12월 초에 그가 취리히로 빌리를 초대했다. 빌리는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로마로 가는 장학금을 받았지만, 대도시보다는 이탈리아의 조용한 곳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세상에 알려진 자신의 곡이 찬사와 시기를 받기보다는 몬타폰에서 그랬듯 침묵 속에서 조용하게 살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취리히에서 만나 긴 대화를 했습니다. 음악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관심사에 대해 몇 시간씩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때 그의 아내도 알게 되었지요. 그녀는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조각가였고 일본불교 절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스위스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여성이었습니다. 

 바움가르트너 부부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에 별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곳에서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움가르트너는 제가 로마로 가는 대신 자신의 별장에 머물면서 작곡을 했으면 좋겠다고 제의했지요. 저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지요. 1988년 1월 초 저는 아내 마리안느와 함께 며칠 동안 시간을 내어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이후 모든 일이 빠르게 결정되었습니다. 마리안느는 1년 동안 휴직하기로 했고, 우리는 1988년 2월에 토스카나로 이사했습니다.’  

 빌리는 대평원의 토스카나가 산악지대인 몬타폰과 지형적으로 달랐지만 고요하고 매력적인 곳이었으므로 로마로 가지 않고 바움가르트너의 별장에 머물겠다고 결정했던 것이다. 물론 바움가르트너는 빌리의 곡을 기대하고 자신의 별장을 빌려주었던바, 빌리가 작곡한 곡을 보고자 4월에 와서 며칠 동안 머물다 가기도 했다. 

 1917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난 루돌프 바움가르트너는 빌리보다 39살이 많은 아버지뻘이었다. 그리고 그는 오스트리아 바이올리니스트 볼프강 슈나이더한(Wolfgang Schneiderhan)과 1956년에 실내악 오케스트라인 루체른 페스티벌 스트링스를 함께 창설하고 오랫동안 이끌었으며, 루체른 음악원 원장과 1969년부터 1980년까지 루체른 페스티벌 예술감독을 역임한 지휘자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바움가르트너는 제 곡을 보더니 긍정적으로 평가했지요. 그래서 저는 1988년 내내 그곳에 더 머물렀습니다. 또한 바움가르트너는 저에게 루체른 페스티벌 스트링스를 위한 곡을 작곡해달라고 의뢰했는데, 저의 첼로협주곡이 그 결과물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로마 장학금을 받지 못했습니다. 제가 포기한 것이지요. 저는 시골 토스카나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완전한 침묵을 확보하고자 결심했던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강제로 병원에서 침묵했지만, 이제는 자발적으로 완전한 침묵으로 돌아가 내 안에서 음악이 어떻게 들렸었는지 알아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프리랜서 작곡가가 될지 말지 결정하는 기준이었지요. 저는 여행, 강연, 리허설, 콘서트 등의 활동을 하면서도 원칙은 작곡을 위해 오랜 시간 완전한 침묵 속으로 물러나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제가 프리랜서 작곡가로 살고 싶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제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지요. 저는 제 결정을 후회하거나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지요. 의사들이 저는 죽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러니 제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토스카나에 위치한 루돌프 바움가르트너 별장은 피렌체와 시에나 중간쯤 호젓한 시골에 있었다.

 ‘쇼핑하고 우편물을 받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마을이 8킬로미터나 떨어진 외딴 곳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별장은 대단했지요, 별장의 본관에는 큰 테이블과 벽난로, 피아노의 전신이라고 불리는 건반악기 하프시코드(Harpsichord)가 있는 음악실, 방대한 독서실과 음반 컬렉션 보관대가 자리한 거대한 홀이 있었습니다. 별장 정원 앞에는 큰 포도밭, 에트루리아 고분(Etruscan Tombs), 조화로운 비율로 지어진 오래된 예배당, 춘분 정오의 햇빛은 둥근 창문을 통해 예배당 안에 들어와 비쳤습니다. 별장에서는 제가 원하던 분위기에서 음악감상을 할 수 있었고, 작곡을 위한 내적, 외적 평화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영감으로 가득한 영적 세계에 몰입할 수 있었지요.

 첫날밤 저는 나이팅게일(밤꾀꼬리) 노랫소리가 너무 커서 잠을 잘 수가 없었지요. 수백 마리가 노래하는 것 같았어요.’

 수백 마리의 나이팅게일이 토스카나 언덕을 이동하면서 노래하는 소리였다. 별장 주변의 황량한 언덕과 거대한 숲이 나이팅게일의 서식지였던 것이다.

 ‘별장에 머물면서 저는 몇 달 동안 긴 산책을 했습니다. 고슴도치, 멧돼지, 뱀 등을 많이 만났지요. 숲은 울울했고, 산길은 찾기 힘들었습니다. 썩어서 넘어진 참나무나 계곡 때문에 곧잘 가던 발걸음을 멈추곤 했지요.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듯한 풍경은 마치 ’원시 자연‘ 같았지요. 이런 자연의 절대고요를 만나면서부터 저는 내면의 절대고요를 발견하곤 했습니다. 교육과 종교에 갇혀 있던 내 안의 원초적인 본성을 발견하고 본래의 나를 찾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빌리는 원시 자연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면 피렌체보다는 시에나로 갔다.

 ‘저는 시에나 캄포광장을 좋아했습니다. 구시가지 중심부 캄포광장에서 열리는 세계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팔리오(Palio) 경마대회에 군중들과 함께 참여하기도 했으니까요.’

 시에나 캄포 광장에서 열리는 팔리오 경마대회는 매년 두 번 개최되었다. 7월 2일과 8월 16일에 4일간 축제가 진행되는데, 경마대회는 마지막 날에 열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