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타폰의 달빛19

                             한 달 동안의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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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 정윤경 작가)

 2월 하순이 되자 정 작가 부부의 산방(山房) 이불재 마당가에도 청매나무, 홍매나무, 백매나무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정 작가는 매화나무들의 부풀어 오른 꽃봉오리들을 보면서 지난 3년 동안 집필했던 대하소설 <이순신의 7년>을 되돌아보았다. 매주 한 회도 거르지 않고 연재해 온 소설이었다. 그 결과물로 정 작가의 서가에는 ‘작가정신’ 출판사에서 발간한 대하소설 7권이 놓여 있었다. 매주 2백 자 원고지 55매 안팎으로 8800여 매를 집필했으니 에베레스트산 높이를 연상시키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실제로 정 작가는 한 발 한 발 에베레스트산 정상을 등정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또다시 정 작가에게 연재 제의가 있었지만 심신이 지쳤으므로 적어도 한 달간은 휴식을 취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국외로 나가 한두 군데 낯선 여행지에서 숙소를 정해놓고 온전하게 쉬고 싶었다.

 박 여사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3년간 매주 연재하는 동안 정 작가가 한 회분씩 원고를 끝낼 때마다 교정을 보곤 했던 것이다. 도자기 수업 수강생들에게 강의하고 실습하면서, 또 자신의 도예작품을 만들면서 틈틈이 교정을 보았으니 박 여사도 휴식을 원할 만도 했다.

 “여보, 시베리아 횡단열차나 남미 마추픽추는 어렵겠지요?”

 “10년만 젊었어도 갈 수 있을 텐데 지금은 워낙 장거리 여행이라서 힘들 것 같군요.”

 “그렇다면 어디로 갈까요? 그리스는 어때요?”

 “그리스는 작년 11월에 갔잖아요? 비록 크루즈 여행이라서 주마간산이긴 했지만.”

 “크레타섬에 내렸을 때 나만 카잔차키스 묘를 가보지 못해 아쉬웠어요.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세 번이나 읽었는데. 당신과 총장님, 그리고 당신 후배 한 사람하고만 갔잖아요. 그것도 그렇지만 그리스 유적지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작년에 우리는 그리스 겉만 본 것이에요.”

 “택시를 한 대만 빌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어요.”

 작년 11월에 동국대 전 총장 홍기삼 은사님을 모시고 제자 몇 명이 베네치아에서 출발하는 10만 톤 대형 크루즈 여객선을 타고 그리스까지 다녀온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를 갔지만 여객선이 정박하는 아테네와 크레타섬만 다녀왔을 뿐 박 여사 말대로 다른 유적지들은 가보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정 작가는 크레타섬에 있는 카잔차키스 묘를 참배한 것만으로도 그리스의 다른 유적지를 다 본 것만큼 만족했다. 카잔차키스가 유언으로 남겨 새겼다는 그의 묘비명은 큰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때 정 작가는 ‘나는 자유다’를 ‘나는 열반이다’로 바꾸어 읽고서는 카잔차키스가 불경에 심취하지 않았나 하고 짐작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은 탐욕과 집착을 내려놓았다는 뜻이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안,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의 소멸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열반, 즉 니르바나는 고통의 원인이었던 온갖 번뇌의 불이 완전히 꺼진 상태로 절대자유와 절대평화의 경지일 터였다. 

 정 작가는 잔 속의 커피가 식어갈 무렵 말했다.

 “작년에는 은사님을 위해 크루즈 여행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77세[喜壽]를 맞이한 은사님을 위해 가깝게 지내는 제자들 뜻이 그렇게 모아졌으니까요.”

 “나는 총장님 선상(船上) 강의가 정말로 좋았어요. 메모해 둔 노트를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은사님 강의는 고준한 문어체인데 받아 적으면 그대로 좋은 문장의 글이 돼버리지요.”

 “쇼펜하우어, 니체, 바그너 등을 말씀하신 부분이 특히 좋았어요.”

 “그 노트 좀 보여줘 봐요.”

 박 여사는 손바닥만 한 노트를 가져와 정 작가에게 보여주었다. 노트 여러 페이지에 깨알 같은 글씨로 은사님의 선상 강의가 적혀 있었다. 은사님의 선상 강의를 노트에 적은 사람은 아마도 박 여사가 유일한 것 같았다. 정 작가는 불교경전 <법구경>이 나오는 부분이 있어서 주의 깊게 정독했다.

 ‘독일 불교사상과 불교문학 아버지라 불리는 쇼펜하우어에게는 널리 알려진 대로 니체와 바그너라는 두 천재 제자가 있었다. 바그너가 기독교 문화권에서 태어난 대표적인 천재 음악가이며 작가라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그는 1865년 <승리자들>이라는 오페라를 씀으로써 독일 불교문학에 신기원을 이룬다. 독일 불교문학 제1기를 1865년에서 1890년까지로 보는 학자들 견해도 역시 이 오페라가 1865년에 쓰여진 사실에 근거를 둔다. 바그너가 이 오페라 제목을 <승리자들>이라고 명명한 근거는 다음과 같은 <법구경> 내용에 있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자는 모든 승리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은 전장에서 수천의 적을 무찌르는 것보다 어렵다. 신도 건달바(乾達婆)도 마왕도 범천(梵天)도 능히 자신을 제어하는 자의 승리를 뒤집어 패망케 하지는 못한다.” 세계를 정복한 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극복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자라는, 자력(自力) 신앙으로서 불교를 잘 드러내는 이 가르침이 <승리자들>이라는 오페라를 촉발한 것이다. 바그너 생애에서 가장 의미 깊은 만남은 마틸드 베젠동크 부인과의 사랑이었다. 그는 많은 작품을 그녀에게 바쳤고 오페라 주인공으로 삼기도 했다. 그런 그녀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그너는 “불교 세계관에 비교하면 다른 어떤 도그마도 바보 멍청이같이 보이고 맙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바그너의 대표적인 오페라인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보고 니체가 <비극의 탄생>이라는 명저를 남긴 것도 유명한 일화지만 이 오페라 서곡에 대해 바그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유일한 해탈은 다만 죽음, 소멸, 두 번 다시 눈 뜨지 않는 것, 그것은 다만 죽음으로 가는 것, 가장 빠르게 존재를 벗는 것, 저 이상한 나라의 최후, 해탈의 기쁨뿐!” 석가모니 가르침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말하고자 나는 저명한 서양 예술가를 끌어온 것은 아니다. 우리 동양 것이 탁월한지를 확인하기 위해 서양인 반응을 조회하려 한다면 이 얼마나 못난 일이랴.’

 그때였다. 정 작가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에서 1년 동안 살았던 빌리 씨가 떠올랐다. 빌리 씨가 40세 때 은둔한 곳이 이탈리아 북쪽 토스카나 원시림 부근이었던 것이다. 작곡가로서 명성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는 자신이 깨달았던 절대고요가 그리워서 토스카나에 있는 지인의 별장으로 떠났던바, 이후 4년 동안은 작곡하지 않고 은신하면서 침묵하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음이었다. 정 작가는 몬타폰 빌리 씨 집에서 들었던 그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부끄러운 얘기입니다. 저는 40세 때까지 작곡자로서 영광스럽게도 웬만한 상들은 다 수상했지요. 작곡자로서 제 꿈을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제 이름이 알려지면서 제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소리들이 들려왔어요, 경쟁이랄까, 시샘 같은 비난이었어요. 빌리가 더 이상 상을 받아서는 안 된다느니, 실력이 과대평가 됐다는 등 저를 고민하게 하는 험담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은둔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몬타폰을 떠나 낯선 곳에서 은둔하기로 제 아내 마리안느와 상의했습니다. 마리안느는 학교 교사였는데 휴직하고 저를 따라가기로 했어요. 이탈리아 토스카나로 잠적하기로 한 것입니다. 지인의 별장은 다음 집이 10키로미터 떨어져 있을 만큼 정말로 한적한 곳에 있었습니다. 토스카나에서는 1년 정도 살았습니다만 그때부터 4년 동안 저는 작곡을 의도적으로 하지 않은 채 주님께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주님께 이전보다 더 확실하게 저를 바쳤던 것입니다.”

 그때 정 작가는 빌리 씨가 ‘자신을 주님에게 바쳤다’는 고백을 ‘주님의 종이 되겠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 앞에 나를 내려놓겠다’로 이해했다. 나를 내려놓지 않고는 절대고요를 만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나를 내려놓아야만, 즉 무아(無我)가 되어야만 세상의 모든 존재 속으로 스며들어 전체로 사는 내가 될 수 있는 이치였다. 정 작가가 박 여사에게 말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로 갑니다. 빌리 씨가 자신을 주님한테 바쳤다는 그곳으로 갑시다.”

 “원래 빌리 선생님은 로마로 가려고 로마에서 주는 장학금을 신청했지만 받지 못해 토스카나  지인 별장으로 갔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로마로 먼저 갔다가 토스카나에서 머물면 되겠지요.”

 정 작가의 생각도 그랬다. 또다시 이탈리아를 언제 가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정 작가는 이탈리아로 갔다가 15일쯤 보내고 15일은 오스트리아 베엔나에서 보낼 계획을 세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