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타폰의 달빛5

                                    절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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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정윤경)

 승용차 운전대를 잡은 베르너 박사는 일행 중에 키가 가장 컸다. 키가 180센티미터쯤 된다고 하니 160센티미터 안팎인 일행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셈이었다. 운전석 바로 옆은 권 회장이, 뒷좌석은 정 작가 부부가 앉았다. 베르너 박사는 앉은키도 컸으므로 머리 정수리가 승용차 천정에 닿을 듯했다. 

 승용차가 비엔나 외곽을 벗어나 크렘스 시 쪽으로 달리자, 도나우강이 나타났다. 강폭이 아주 넓지는 않았으나 수량이 넉넉하고 수심은 깊어 보였다. 도나우강은 원경과 근경의 표정이 달랐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목가적이고 평화로웠으나 강변을 달리는 승용차 차창으로 드러난 도나우강 강물은 강가 풀숲을 핥으며 동쪽으로 거칠게 흘렀다. 인스부르크 시가 있는 서쪽으로 갈수록 수심이 얕아진 도나우강 상류의 계곡물은 옥빛으로 반짝거렸다. 권 회장은 멀리 솟은 산을 응시하면서 반쯤 열린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쐬더니 빌리 씨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작가님, 인스브루크가 얼마 남아 있지 않습니다. 빌리 씨가 태어난 주는 포랄베르크이고 몬타폰 계곡의 상트 안톤마을이랍니다. 빌리 씨 아버지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연주할 줄 아는 목수였답니다. 빌리 씨 할아버지도 목수였고요. 장롱 같은 가구를 만드는 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아버지는 빌리 씨에게는 음악 가정교사였던 셈이지요.”

 아마도 알프스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빌리 씨를 소환한 듯했다. 빌리 씨가 알프스 산골짜기인 몬타폰의 상트 안톤 전원마을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베르너 박사는 빌리 씨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 입을 다물고 운전만 했다. 흥미가 없다기보다는 아내의 일에는 가능한 한 간여하지 않고 존중하는 그런 태도처럼 보였다. 개인주의가 몸에 밴 서양인들에게는 그런 태도가 더 당연한지도 몰랐다. 그러나 정 작가 부부는 납치라도 해서 만나고 싶다는 빌리 씨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빌리 씨는 모차르트 후신 같아요. 어떤 귀족이 모차르트 미완성 악보를 완성해 달라고 빌리에게 의뢰하기도 했거든요.” 

 권 회장이 들려주는 작곡가 빌리의 음악적 성취는 눈부셨다. 빌리는 세계 최정상의 작곡가가 틀림없었다. 작품으로는 관현악곡 <기운>, 오페라 <개구리-쥐 전쟁>, 앙드레에 타르코프스키 회상곡 <공간들(Raume)>, 오스트리아 건국 1천 년 기념작으로 로베르트 슈나이더의 소설이 원작인 오페라 <잠의 형제(Schlafes Bruder)>,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탄생 150주년 기념곡 <만남(Begegnung)>, <오케스트라를 위한 론디노(Rondino)>, 트럼펫을 위한 협주곡 <이레네>, <상당한 시간> 등이 있고,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생각하며 구상한 심포니 <정(情) Dsong>이 있으며 수상 경력도 화려했다.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수여하는 ‘젊은 작곡가상’, ‘오페라 작곡상’, ‘학문과 예술을 위한 영예 십자 대통령 훈장’ 등을 수상했다. 또한 잘츠부르크 카메라타 아카데미카의 전속작곡가, 잘츠부르크 축제의 전속작곡가, 빈 필하모닉오케스트라를 후원하는 비엔나음악협회 및 비엔나 콘서트 페라인 전속작곡가를 역임했다. 그뿐만 아니라 빌리의 작품들은 뉴욕의 카네기홀, 런던 로얄 알버트홀, 비엔나 뮤직페라인, 비엔나 콘체르트하우스 등에서 베를린 필하모닉, 비엔나 필하모닉,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 뉴저팬 필하모닉 등에 의해 연주되었으며 클라우디오 아바도, 세이지 오자와,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 등이 초연하기도 했다.

 “빌리 씨의 작품은 유럽 전역에서 호평하고 있어요, 또 여러 오케스트라들은 빌리 씨에게 작품을 위촉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지요.”   

 그러나 정 작가는 빌리의 화려한 음악적 성취보다는 그것이 빌리의 어떤 내면과 정신으로부터 시작됐는지가 더 궁금했다. 클래식 음악에 문외한인 정 작가로서는 작곡가인 빌리의 정신세계 내지는 작가정신에 관심이 더 컸다. 

 “빌리 씨는 작곡하면서 어디에서 영감을 얻습니까?”

 “빌리 씨는 2004년 저와 함께 한국에 들른 적이 있어요. 일본 도쿄에서 뉴저팬 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빌리 씨의 트럼펫을 위한 협주곡 <이레네>를 초연했는데, 그것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한국에 들른 것이지요. 9월 22일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특강도 했어요. 그때 저는 빌리 씨 옆에서 통역을 담당했지요.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이나 신문기자들이 질문하면 제가 통역했기 때문에 빌리 씨의 답변을 지금도 대부분 기억할 수 있어요. 빌리 씨는 작곡의 영감을 절대고요 속에서 얻는다고 했어요.”

 “절대고요라고요?”

 정 작가는 흥미가 솟구쳤다. 대학생 시절 소설을 습작하면서 삼매에 들어 하루 동안 책상에서 단 한 번도 떠나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밤낮이 지나간 줄 모르고 외부인들의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는데, 나중에 스승인 법정스님께 물어서 안 일이지만 그것이 바로 선정(禪定)이었고, 그 상태가 절대고요, 절대적막 그 자체였던 것이다.

 “어느 신문기자가 묻자 빌리 씨가 이렇게 대답했어요. 내 삶과 작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절대적인 고요입니다. 그러한 고요, 적막을 찾아 며칠이고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알프스 숲 속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안의 깊은 곳에서 음악이 들리기 시작하지요. 그 순간은 이성적인 판단이나 분석은 사라지고 자아를 벗어난 무한한 우주가 열립니다. 저절로 영감이 떠오릅니다. 그때 작곡합니다.”

 정 작가는 비로소 빌리 씨가 몹시 궁금해졌다. 빌리 씨가 권 회장에게 정 작가를 납치라도 해서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 반대 처지가 돼버렸다. 정 작가가 권 회장에게 빌리 씨를 만나게 해달라고 하소연하고 싶을 정도였다. 빌리 씨는 서양의 중세 신비주의자 같기도 하고, 동양의 은둔 선사를 연상시켰다. 빌리 씨는 시비분별을 앞세운 서양식 합리주의보다는 동양식 직관이나 통찰이 성정에 맞는 작곡가가 분명한 듯했다.

 “또 어느 음악잡지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어요.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해 몇 달이고 기다리다가 고요를 만납니다. 영혼 속의 적막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조그만 점 같은 음악이 점점 커지기 시작합니다. 점은 커다란 구(Sphere, 球)로 변해 우주와 일치합니다. 그 둥근 구는 모든 종류의 색채로 나타납니다. 그 색채는 소리로 변하지요. 음악은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닌 전체가 됩니다. 그러니까 음악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음악의 힘이 작곡가를 이끌 뿐이지요.” 

 불교전문작가인 정 작가는 빌리 음악의 본질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불교를 잘 모르겠지만 그가 하는 말은 거의 불교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권 회장이 빌리 씨의 통역을 했다는 것도 정 작가가 빌리를 이해하는 데 크나큰 도움을 주었다. 

 “빌리 씨의 사고가 왜 동양적이고 불교적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됩니다. 빌리 씨가 선사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실제로 빌리 씨는 일일 일식하고 채식주의자예요. 단 한국음식은 너무 맛있다고 예외입니다. 살생을 매우 싫어합니다. 무엇보다 동양의 선사처럼 ‘인간과 우주는 하나다’라고 말합니다. 서양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요.”

 “권 회장님께서 2004년 9월에 빌리 씨와 함께 해인사를 갔다는 얘기를 하셨지요. 해인사로 간 이유가 있었습니까?”

 “산사는 고요하잖아요. 빌리 씨가 좋아할 것 같았어요. 저는 두 번째였어요. 성철스님께서 해인사에서 입적하셨을 때 봉암사를 갔다가 우연히 어떤 스님을 만나 따라갔기 때문이에요. 어쨌든 빌리 씨는 한국의 가을이 몬타폰의 날씨처럼 청명하다고 하면서 마치 몬타폰의 집에 온 듯하다며 좋아하고 즐겼어요.”

 “빌리 씨가 가을 산사의 고요를 느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일행은 해인사 여기저기를 구경하는데 빌리 씨는 법당인 대적광전에서 시종 꿈쩍 않고 벽화를 보기만 했어요.”

 “대적광전 벽화라면 <팔상도(八相圖)>일 겁니다.” 

 “권 회장님, 벽화의 색채를 볼 때 빌리 씨에게 벽화의 내용이 소리로 들렸을까요?”

 “모르겠어요. 빌리 씨를 만나면 꼭 물어보세요.”

 팔상도란 부처의 일생을 여덟 단계로 나누어 그린 그림을 뜻했다. 정 작가는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부분으로 나눈 그림인 <팔상도>의 이야기를 <부처님 8대 인연이야기>란 제목으로 산문집을 낸 적이 있었다. 정 작가는 부처 일생의 여덟 단계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그대는 태어나기 전에 무엇이었는가?’ ‘피고 지는 연꽃도 고통이었구나.’ ‘틸라우라코트 숲길에서 아침 햇살을 공양받다.’ ‘그대의 가르침에서 나는 멈출 수 없다네.’ ‘아, 싯다르타는 이미 목숨을 마쳤구나.’ ‘보리수 아래 가부좌를 트니 신심이 솟구치는구나.’ ‘진리를 들으면 진리를 깨달을 것이다.’ ‘고통받고 어리석은 이와 함께한 부처님이시여.’ ‘눈을 떠라, 빛이 보이리라.’ ‘자신을 등불 삼고 법을 등불 삼아 의지하라.’ 등으로 나누어 산문집을 발간했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