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학종
2025-06-20 (금) 08:47수행자가
분노와 위선에 빠지고
이득과 명성에 빠졌다면
올바른 가르침 속에서 성장하지 못하리,
좋은 밭에 썩은 씨앗처럼.
올바른 가르침을
이전부터 존중해 왔고
지금도 존중하고 있다면
그야말로 가르침 속에서 성장하게 되리,
젖은 땅에 약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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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확)
분노와 위선은 올바른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과 같은 것들이다. 분노와 위선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어(S. Kierkegaard, 1813~1855)에 따르면, 분노란 위선의 수동적 양태에 해당한다. 자기를 침해했다는 판단에서 유래한 분노와, 실재보다 더 선한 존재로 자기를 가장하는 위선은 사실상 동일하다는 이야기다. 둘 다 그릇된 자기 이해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몇몇에 해당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과거 학생운동의 핵심 역할을 했던 이들이 권력의 상층부에서 기득권 세력으로 행세하고 있는 경우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조금씩 세상에 물들고 현실과 타협한 데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키에르케고어의 말대로, 그들의 분노는 애초부터 위선의 다른 얼굴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선과는 동떨어진 진짜 자기를 능동적으로 감추기 위해서 사회적 불의가 발생했을 때 수동적으로, 그래서 책임을 질 필요도 없는, 분노를 폭발시켰던 것은 아닐까.
돈과 권세에 환장한 승려를 명리승(名利僧)이라고 부른다. 이득과 명성에 빠졌으니, 이런 이는 형식으로는 출가하였으나 내용으로는 속세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명나라의 고승 운서주굉(雲棲株宏, 1535-1615)은 출가에는 사요간(四要揀)이 있다고 했다. 첫째는 출가의 출가요, 둘째는 재가의 출가이며, 셋째는 출가의 재가이고, 넷째는 재가의 재가가 그것이다. 출가의 출가란, 오욕의 집착을 벗어나고 출가하여 생사를 해탈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재가의 출가란, 몸은 비록 세간에 있지만 욕망과 집착을 벗어나 보리심에 머물며 생사와 해탈이 둘 아님을 체득하는 것이다. 출가의 재가란, 비록 출가하였으나 탐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생사의 업을 쌓아 가는 것을 말한다. 재가의 재가란, 삼보를 알지 못하고 영원히 생사 가운데 머물러 해탈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 명리승은 출가의 재가에 해당하는 것이니, 진정한 출가수행자라고 말할 수 없다. 이와 관련된 청허휴정(1520~1604)의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출가하여 스님이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편안함을 구하는 것도 아니요,
따뜻하고 배부름을 구하는 것도 아니요,
이익과 명예를 구함도 아니다.
오직 생사를 해탈하기 위함이요,
번뇌를 끊기 위함이다.
불조의 혜명을 잇기 위함이요,
삼계를 벗어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다.
본분 일대사에 충실하지 못하고, 닭 벼슬보다 못한 명예와 이익에 탐착하고 있는 수행자들에게 내리는 추상같은 꾸짖음이 아닐 수 없다. 청허휴정의 일갈이 아니더라도 출가사문이 명리를 탐하면 사문으로서의 생명이 단절되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네 종류의 사람을 언급하신 적이 있다. 분노에 빠져 올바른 가르침을 존중하지 않는 자, 위선에 빠져 올바른 가르침을 존중하지 않는 자, 이득에 빠져 올바른 가르침을 존중하지 않는 자, 명예에 빠져 올바른 가르침을 존중하지 않는 자가 그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또한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네 종류의 사람을, 올바른 가르침을 존중하고 분노에 빠지지 않는 자, 올바른 가르침을 존중하고 위선에 빠지지 않는 자, 올바른 가르침을 존중하고 이득에 빠지지 않는 자, 올바른 가르침을 존중하여 명예에 빠지지 않는 자로 구분해 설법하셨다.
여기서 전자는 ‘네 가지의 그릇된 원리’, 후자는 ‘네 가지의 올바른 원리’이다. 그릇된 원리는 사람이 성장하지 못하고 끝내 파멸로 이끌어지는 원리이고, 올바른 원리는 사람이 성장하여 끝내 쓰라리고 기나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원리를 말한다.
이 시는 <앙굿따라니까야>4:44 ‘분노에 빠짐의 경 ②(Dutiyakodhagarusutta)’에 등장한다. 네 가지의 ‘그릇된’ 원리와 ‘올바른’ 원리를 구분 짓는 키워드로 분노, 위선, 이득, 명예를 제시한 혜안이 놀랍다.
좋은 밭에 썩은 씨앗처럼 살아갈 것인지, 물기가 있는 밭에 약초처럼 살아갈 것인지는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올바른 가르침을 존중할 것인지, 존중하지 않을 것인지에 달려 있다는 준엄한 말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