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지영
2025-06-18 (수) 16:511989년 동유럽의 체제전환과 이후 우경화, 그리고 가톨릭 교회
1989년에 발생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전환은 20세기 현대사의 중요한 변곡점 중의 하나이다. 20세기 유럽의 역사는 구제도의 붕괴, 두 번의 세계전쟁, 새로운 이념에 의한 시민국가의 탄생, 냉전으로 호칭되는 이데올로기적 열전, 그리고 이념 대립에 의한 갈등의 일상화로 점철되어 왔다. 이러한 현대 유럽사의 격랑을 가라앉힐 세계사적 사건이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체제 전환이다. 동유럽 국가의 체제전환은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좌우 양 진영의 냉전이 끝내고 세상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희망의 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동유럽의 비교적 순진한 인민들은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가치관에 기반한 낙관적 미래, 즉 우리도 서유럽 사람들과 같은 수준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 속에서 체제전환을 성공시켰던 반공에 기반한 민족주의적 정당을 선택하였지만, 이들의 선택을 받은 민족주의적 정당들은 4년에 걸친 시행착오 끝에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를 틈타 다시 구 공산세력의 잔재들인 사회당이 집권하여 체제전환 그 자체가 물 건너가는 듯한 상황이 도래하였다. 그러나 이들 잔재세력들은 더 참담한 실패를 겪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아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한번 실패한 사회주의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재생할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보여주면서!
이제 두 번의 실패에서 더 이상 마음 둘 곳을 잃은 동유럽의 (이제는 순진하지 않은)인민은 자신들에게 ‘우리의 불행은 유럽연합과 그들의 지지를 받는 중동의 난민들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유럽연합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고, 유럽연합이 요구하는 중동의 이민자 수용을 거부하는 것만이 우리의 살길’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포퓰리즘적 극단주의 정당을 선택하였다. ‘우리가 못사는 이유는 우리가 게으르고,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남, 특히 우리에게 부자 서유럽 방식의 제도와 가치를 강제로 요구하는 그들 유럽연합과 그 뒤에 숨어 덕을 보려는 사악한 세력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극단주의 정당의 선전이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희망과 좌절이 교차하며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보는듯하다.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헝가리 등 네 나라에서 공히 유사하게 나타나는 이러한 양상은 일란성 쌍둥이를 보는듯한 느낌이 든다. 이 현상은 이제 유럽연합의 통합성을 위협하는 중대한 이슈가 되었다. 사회주의는 한물갔지만, 무덤 속에 잠들어 있던 극단주의가 그 악취를 풍기며 다시 거리를 활보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에 더하여 한술 더 뜨는 보수주의 단체가 가톨릭 교회이다.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는 좀 다르지만, 가톨릭 세력이 강한 폴란드와 헝가리는 심상치 않다. 특히 가족의 가치, 가정 공동체의 중요함을 헝가리인의 정체성과 동일시하는 운동에 헝가리 가톨릭교회가 기꺼이 협력하고 있다는 의심을 저버릴 수 없다. 문득 작년 1월 부다페스트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페렌치엑 테레(프란치스코수도회 광장)의 유서 깊은 페렌치엑 템플롬(프란치스코 성당)벽면에 걸려있던 어마어마한 크기의 광고판이 기억났다. 그 광고판에는 “고백(성사)을 하세요, 편안히 오세요, 교회의 품으로, 마치 당신의 집인 것처럼.. 우리(사제)는 당신들을 24시간 기다립니다.” 당최 광고나 선전을 크게 하지 않는 헝가리의 문화에서 무슨 자동차나 가전 신제품 선전도 아니고, 신부의 기도하는 모습이 걸려 있다는 점은 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워낙 가난한 헝가리 가톨릭교회의 재정 형편상 엄두도 못냈을 장소이자 광고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지원이 없이는 불가능할 듯 보였다.
특강차 들렸던 ELTE(외트베스 로란드대학교)의 사학과 학과장인 동기는 더욱 어처구니없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파즈마니 피테르 가톨릭 대학교의 본부가 교외의 필리쉬처버에서 부다페스트 시내로 옮겨 온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380년 전통의 ELTE 바로 옆에 건물과 부지를 매입하여 건물을 신축하여 이전한다는 것이다. 그 예산을 전부 정부에서 지출한다고 하니, 5년 동안 임금이 동결되고, 겨울에 난방비가 없어 교수들의 등교를 제한하고 있는 ELTE 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헝가리 정부와 헝가리 가톨릭의 유착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은 합리적 의심일 수 밖에 없다. 가톨릭 교회의 가족주의와 정부의 출산장려 정책이 만나 오히려 반이민, 반외국인 정서를 자극하는 형국이 되었다는 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헝가리 정부는 오르반 수상이 개신교도이며, 가톨릭 교회의 캠페인과는 별개로 자녀 출산수당을 인상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정치와 교회의 유착은 늘 있어왔던 일이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사회에 다양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부의 정책이 아무리 합목적성을 갖는다 해도, 그것의 여파가 사회의 다양성을 해치고, 특정한 소수집단을 공격하거나 배척하는 무기로 사용되서는 안될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를 시끄럽게 했던 여러 사건, 그리고 그러한 양상에 조응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며, 교회와 권력이라는 해묵은, 그러나 심각히 중요한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본다.
김지영_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논문으로 〈미국과 영국의 트란실바니아 문제 해결 방안: 1941-1947〉, 〈헝가리의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 기억 논쟁〉, 〈헝가리 백과사전에 나타난 한국에 대한 서술: 1833-1930〉등이 있고, 저서로 《메타모포시스의 현장: 종교, 전력망, 헝가리》(공저), 《헝가리 현대사의 변곡점들: 역사의 메타모포시스》 등이 있다.
* <한국종교문화연구소> 뉴스레터 887호에 실린 글입니다. 저작권은 한국종교문화연구소(http://kirc.or.kr)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