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진원
2024-12-26 (목) 12:29정진원(동국대학교 세계불교학연구소
/K Classic 콘텐츠연구소 소장)
사금갑(射琴匣)’의 주인공 궁주와 분수승은 누구일까
삼국유사 속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사금갑’ 이야기는 그중 백미라 할 만하다.
이 이야기 속에는 왕과 왕후, 승려의 삼각관계가 1차 스토리텔링으로 서술되지만 그 안에는 당시 정치 상황과 권력을 둘러싼 긴박감 넘치는 이야기, 왕의 암살을 막아준 동물들을 기리는 우리나라 세시풍속의 유래들이 가득 차 있다.
마치 21세기의 작금의 한국을 보는 것 같은 최고 권력과 무속 비기가 어우러진 사금갑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거문고 갑을 쏘다
신라 21대 비처왕(毗處王) 이름은 우리말 이름
밝게 지혜로 세상을 비추는 소지왕(炤智王)이란 뜻이지
왕이 된 지 10년(488년) 천천정(天泉亭)에 거둥 하였네
갑자기 쥐와 까마귀가 나타나 사람 말로 까마귀를 따라가라 하네
말 탄 병사 돼지 싸움 보다 까마귀를 놓치네
비처왕, 우두망찰 하고 있는 사이
연못 속에서 노인이 나타나 편지를 주네
금도끼도 아니고 은도끼도 아니고
겉봉에 열 면 둘이 죽고 안 열면 한 사람이 죽는다네
예언가 점성술가 일관 그 한 명이 왕이니 열어보라 주문하네
거문고 갑을 쏘라는 한 줄
그 길로 궁궐에 돌아와 거문고 갑을 쏘았네
그 안에 간통하던 왕비와 왕실 승려 있었네
두 사람은 사형당하고
해마다 정월 첫 돼지날(亥日), 첫 쥐 날(子日), 첫 말 날(午日) 삼가하고
정월 보름은 까마귀날((烏忌日)로 정해 찰밥으로 제사 올리네
이것이 무슨 뜻일까
21세기에도 궁중을 드나드는 선무당이 칼춤을 추네
쥐도 까마귀도 말도 돼지도 일구월심 나라를 돕고
천지신명이 나타나하시는 한 말씀을
혹시 우리는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21세기 나라의 주인은 국민 하나하나
대한국민의 지혜로 비춰보라는 비처왕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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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디자인=미디어붓다)
신라 최고의 스캔들, 비처왕의 왕비와 왕실 승려의 로맨스
특히 삼국유사 기이편 ‘사금갑(射琴匣)’조에 나오는 거문고 갑 속에서 복주(伏誅:형벌을 순순히 받아 죽음)되었다는 분수승과 궁주는 구체적으로 누구였을까. 나는 이 두 남녀가 오랫동안 궁금하였다. 이 의문의 실마리를 풀어주는 이야기가 이번에도 ‘삼국사기’와 ‘화랑세기’, ‘남당유고’라는 책에 있었다. 그들은 단순히 잘못된 사랑에 희생된 것일까. 또 하고 많은 곳 중에서 왜 하필 거문고 갑 속에서 사랑을 나누었을까. 이러한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이 ‘사금갑조 이야기는 얼핏 동물이 말을 하는 등 전설로 치부될 소지가 많지만 역사서에 구체적인 연대가 기록된 사건이다. 우리말로 비처왕, 한자어 번역으로 소지왕炤智王이라고 하는 21대 신라왕이 등장하는 488년에 일어난 이야기이다.
비처왕이 즉위한 지 10년이 되던 488년 천천정에 거동할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왕에게 울며 말을 했다는 것이다. 쥐가 읍소한 대로 왕의 말몰이꾼이 까마귀를 따라갔는데 양피촌에 다다르니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었다 한다. 기사가 구경하다 까마귀를 놓치게 된다. 이때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한 노인이 연못 속에서 나타나 편지를 주었는데 겉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내용을 열어 보면 둘이 죽을 것이고,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그 한 사람이 왕이라는 일관의 말에 왕은 편지를 읽게 되는데 단지 ‘거문고 갑을 쏘라(射琴匣)’는 한 줄이었다. 왕은 궁궐에 돌아가 거문고 갑을 쏘니 그 속에서 두 남녀가 간통 중이었다는 것이다. 남자는 궁궐에서 분향하고 수도하는 내불당 승려(焚修僧)였고 여자는 궁주(宮主)였는데 그 둘을 죽였다는 것이다.
사금갑의 겹겹 다빈치코드 : 왕비 선혜와 승려 묘심의 거사 계획
비처왕이 분노에 차 죽일 만큼 엇나간 불륜로맨스의 대상이라면 일단 비처왕의 부인이 유력하지 않을까. 짐작은 적중했다. 화랑세기에는 그의 왕후 선혜(善兮)와 승려 묘심(妙心)이 서로 사통해 오도(吾道)라는 딸을 낳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불륜으로 인해 왜 왕이 죽는다는 것일까. 단순 삼각관계에서 제2라운드가 펼쳐지는 장면이다. 그 전말인즉슨 묘심이 선혜왕후를 통해 왕을 암살할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사 겉봉을 열면 둘이 죽는다는 이야기가 이해가 간다. 둘의 사통뿐 아니라 암살계획이 함께 폭로가 되어야 영문 모르고 죽을 뻔했던 비처왕은 살게 되고 그 음모가 발각된 두 사람은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죽었다던 선혜왕후는 화랑세기의 내용에서는 죽지 않는다.
선혜왕비의 가계를 추적해 보자. 선혜황후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아버지가 내숙이벌찬인데 화랑세기에서도 기록이 일치한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기보갈문왕의 딸로 나온다. 어찌 됐든 이벌찬은 신라관등 중 제1관등이다. 게다가 선혜의 어머니는 눌지왕의 딸이다. 왕의 딸이나 손녀의 가계로 나오는 선혜를 과연 왕이라고 해서 쉽게 사형시킬 수 있었을까. 선혜는 출궁하여 제주(祭主)가 되었다고 한다.
신라 불교 기록을 앞당기는 묘심
여기서 특기할 것은 묘심이 신라 왕실의 승려였는데 그때가 488년이라는 사실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신라불교공인은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에 따라 527년이 정설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이처럼 불교가 우리 역사에 등재되기 훨씬 전부터 전래되고 수용되었음을 알려주는 단서들이 무수히 흩뿌려져 있다. 가령 고조선 단군왕검의 할아버지 이름이 ‘제석환인’인 것부터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이 태어날 때(BC 69) 석가모니가 마야부인 우협에서 태어나듯이 계룡의 좌협(삼국사기는 우협)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에 이어 이 사금갑조에서는 이미 분향수도승이 비처왕 때 궁궐 내에서 막강한 권력자로 존재했다는 구체적인 일화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기원전부터 서기전후로 최소 수 백 년 앞당길 수 있다.
천주사지(추정)
비처왕 암살 계획의 두 가지 버전또 하나 삼국유사 이야기에서 궁금했던 것은 신라시대 거문고 갑이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눌 수 있을 만큼 컸을까 하는 것이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불륜상대인 승려 묘심은 얼굴이 아름답고 섹시 가이여서 후궁들과 상통하였다고 한다. 화랑세기 필사본의 주인공인 박창화의 또 다른 저서 ‘남당유고’에서는 묘심이 天柱寺의 도인으로 나온다. 묘심의 아버지라는 천주공이 진흥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으나 소지왕 재위(479~500)와 진흥왕 재위(540~576)는 최소 60년 정도의 격차가 있기 때문에 같은 인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천주사에 거주하였다는 기록이 신빙성 있어 보인다. 이 천주사 터에 관해 김시습은 신라왕의 내불당으로 당시 제석원으로 불리며 나라 사람들이 해마다 이름 있는 꽃을 뜰에다 심어서 바치며 복을 빌었다고 하였다.
그는 선혜왕후를 시켜 거문고 갑 안에 자객을 숨겨 왕의 침소에서 비처왕 암살을 시도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죽은 두 사람은 암살에 실패한 묘심과 그의 심복이 된다. 비처왕은 살던 궁이 요사스럽다 여기고 천궁에서 월성으로 거처를 옮긴다. 삼국사기에서 짧게 거처를 옮겼다고 기록한 내용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신라의 세시풍속 유래와 그 의미
이 편지를 노옹이 들고 나온 곳이 지금의 경주 서출지(書出池)이다. 그리고 까마귀와 쥐, 돼지가 나와 사람의 말도 하고 임금을 구한 세 동물의 날을 조심하고 까마귀에게 찰밥을 주는 정월 대보름의 풍습이 여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금도끼 은도끼의 옛날이야기의 원조가 될 법한 신령스러운 노인이 연못 속에서 등장해 편지를 주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서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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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 서쪽에 연밭이 조성되어 있는 곳을 포함하여 연밭과 안압지 사이의 대나무 밭이 있는 곳(사진=정진원)
단순한 승려와 왕후의 잘못된 만남이 아니라 왕을 시해하려는 음모와 그것을 막으려는 세력과 천지신명의 도움, 그로 인한 세시풍속의 유래까지 ‘거문고 갑을 쏘다’에는 신라인의 사랑과 배신, 음모와 구출에 이르는 스릴과 서스펜스 넘치는 드라마틱한 영화 한 편이 펼쳐지고 있다. 거기에 사람 말을 하는 쥐와 까마귀, 돼지 두 마리는 ‘해리포터’ 환타지 영화가 차용했나 싶을 정도로 스펙타클하다. 이처럼 삼국유사에는 서양의 신화나 전설과는 비견할 수 없는 스토리텔링 소재가 역사와 함께 치밀하게 조직되어 있다. 앞으로 K classic의 원류가 삼국유사에 있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한편 새해가 되는 2025년에는 이 땅에 사는 유정무정 천지신명까지 모두 도와 한 뼘 더 성장한 비 온 뒤 땅이 굳는 대한국민의 저력이 발휘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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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묘심의 아버지라는 천주공이 진흥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으나 소지왕 재위(479~500)와 진흥왕 재위(540~576)는 최소 60년 정도의 격차가 있기 때문에 같은 인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천주사에 거주하였다는 기록이 신빙성 있어 보인다. 이 천주사 터에 관해 김시습은 신라왕의 내불당으로 당시 제석원으로 불리며 나라 사람들이 해마다 이름 있는 꽃을 뜰에다 심어서 바치며 복을 빌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