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홍 스님
2024-11-26 (화) 10:27아왕켄뽀의 보성론 강의(010)//
강의 : 켄뽀 아왕상뽀
(북인도 둑 다르마까라 승가대학 교수사/ 서울 성북구 캄따시링 센터장)
번역 및 정리 : 자홍스님 (캄따시링 법회 통역)
교정 : 캄따시링 역경원(지성남, 김지아)
아상가 논사의 탱화
린뽀체 스승께서는 내가 설법을 할 때 종종 나를 부처님이라고 불러주셨다. 물론 나는 부처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스승께서 나를 부처라고 상냥하게 불러주신 것은, 나에게 용기를 주시고, 전하는 법의 무게와 가치를 사람들이 바로 알 수 있게 하기 위함이셨을 것이다. 마치 결혼을 앞둔 남성에게 예비 신랑이라는 호칭이 붙으면 뿌듯함과 용기를 느끼듯, 범부가 자신이 예비 부처임을 알면 확신과 용기가 생겨난다. 부처님은 너무 위대해서 저 멀리 있고, 나는 범부중생이니 이곳에서 그저 초라하고 비천하게 살고 있다고 좌절한다면, 결단코 성불할 수 없다.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용기를 일으킬 때, 우리는 비로소 성불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부처가 되는 일은 준비 없이 바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30에서 말하는 것처럼, 믿음, 뛰어난 지혜, 삼매, 연민을 닦아 객진(客塵)의 염오(染汚)를 모두 제거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부처의 법신(法身)을 성취한다. 지혜를 통해 깨닫는다고 하면, 지혜는 깨닫는 주체이고 여래장은 대상이라고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법신(法身)은 대상과 주체를 초월하기에 대상과 주체가 차별되지 않는다. 다만 굳이 설명을 하기 위해서, 지혜로 깨닫는 대상을 자성신(自性身, Tib. ngo bo nyid sku, Skt. svābhāvika kāya)이라고 지칭하고 지혜를 깨닫는 주체를 법신(法身)이라고 하는 것이다.
학생 : 여래장을 설하는 주요 경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켄뽀 : 『대반열반경』 (大般涅槃經, Tib. mya ngan las 'das pa chen po'i mdo, D119), 『입능가경』 (入楞伽經, Tib. lang kar gshegs pa'i mdo, D107), 『승만경』 (勝鬘經, Tib. 'phags pa lha mo dpal phreng gi mdo, D 92)이 여래장을 주제로 하는 경전이다. 『보성론』은 여래장의 주요 교리를 시구 즉 게송(偈頌, Tib. tshigs bcad, śloka)의 형태로 정리한 논이다.
학생 : 제가 알기로는 일체 중생의 실상은 무아(無我)·무자성(無自性)·공성(空性)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성론』에서 중생의 자성(自性)을 봐야 한다고 하니, 마치 어떠한 자성(自性)이라는 것이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켄뽀 : 『보성론』에서 이야기하는 자성(自性)은 마음의 본성이며 여래장(如來藏)이다. 그런데 이 자성(自性)·여래장이 무엇인가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티베트 불교사에서는 중관학파(中觀學派)를 해설하며 자공설(自空說, Tib. rang stong)과 타공설(他空說, Tib. gzhan stong) 2가지가 분기하였다. 자공설에 따르면, 여래장은 무자성(無自性)이며, 자성(自性)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은 바로 무자성(無自性)을 증득하라는 의미이다. 반면 타공설의 입장에서 여래장은 일반적인 유(有)와 무(無)를 초월한 궁극적인 유(有)이다. 이렇게 보면, 타공설에는 뭔가 깨달아야 하는 실체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마음의 본성을 강조하다 보면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유변(有邊)에 치우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성론』을 읽다 보면, 여래장(如來藏)을 강조하기에 그 어떤 무엇이 존재한다고 강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유(有)에 집착하면, 다시 『반야경』과『중론(中論)』 등에서 공(空)을 강조함으로써 균형을 맞추었다.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미혹하면, 그 생각은 그릇되다고 설한다. 여래장의 가르침을 듣고서 있음(有)에 집착해도 잘못이고, 반야공(般若空)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아무것도 없다는 공무(空無)에 빠져도 잘못이다. 유와 무는 어디까지나 세속유(世俗有)에서의 구분이다. 승의(勝義)의 영역에서는 이러한 차별이 없다. 마음의 본성을 본다고 하지만, 눈으로 형상을 보거나 귀로 소리를 듣는 것처럼 인식 주체(有境, Tib. yul can)와 인식 대상(境, Tib. yul)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능소(能所, Tib. gzung 'dzin, Skt. grāhya-grāhaka)나 좋고 나쁨 등의 이원적 분별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 마음의 본성은 일차적으로는 논리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 관행(觀行)을 수습(修習)하여, 마침내 마음에서 분별망상과 희론(戱論)이 모두 적멸(寂滅)하여 능소(能所)의 분별이 사라진 상태가 되면, 이때 마음의 본성에 상응한다. 또 어떤 이는 법과 스승에 대한 지극한 헌신의 마음이 일어날 때, 마음속에서 분별과 희론이 모두 고요해지고, 형언할 수 없는 환희와 평화를 경험한다. 이러한 경험도 마음의 본성의 드러남과 상응한다.
위력, 다르게 변하지 않음,
적심의 속성(潤性)의 자성으로 인하여
이것들은 여의보주(如意寶珠), 허공,
물(水)의 덕과 속성이 비슷하다. [1.31]
།མཐུ་དང་གཞན་དུ་མི་འགྱུར་དང་། །བརླན་པའི་ངོ་བོའི་རང་བཞིན་ཕྱིར།
།འདི་དག་ནོར་བུ་རིན་ཆེན་མཁའ། །ཆུ་ཡི་ཡོན་ཏན་ཆོས་མཐུན་ཉིད།
"위력, 다르게 변하지 않음, 적심의 속성(潤性)의 자성으로 인하여"라고 하였다. "위력"은 여래장(如來藏)에 선(善)을 발생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이다. "다르게 변하지 않음"은 그러한 위력을 갖춘 여래장은 조건에 의해 생겨나는 법인 '행(行, Tib. 'du byed, Skt. saṁskāra)'이 아니므로, 결코 다른 것으로 변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심의 속성(潤性, Tib. brlan pa'i ngo bo)"은, 위력이 있고 변질됨이 없는 여래장은 무미건조한 것이 아니라, 자비의 물기가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들은 여의보주(如意寶珠), 허공, 물(水)의 덕과 속성이 비슷하다."라고 하였다. 여래장은 첫 번째로 "여의보주(如意寶珠)"와 같다. 여의보주는 중생의 빈곤함을 제거하고 소원을 성취시키는 위력이 있다. 마찬가지로 심자성(心自性)은 중생이 열망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여의보주와 같다. 모든 것이 심자성으로부터 비롯된다. 심자성에 미혹하면 윤회를 이루고, 심자성을 증득하면 열반에 도달한다. 두 번째로 여래장·계(界)·심자성(心自性)은 "다르게 변하지 않음"의 속성이므로 마치 "허공"과 같다. 마지막으로 "물(水)의 덕"이라고 하였다. 물에 의지하여 세간의 온갖 작물들이 양육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여래장에는 자비의 힘, 연민의 능력이 내재해있기에, 그것에 의지하여 자비심과 보리심 등을 일으키고 유정(有情) 제자들을 이롭게 할 수 있다.
여의보주와 같고, 허공과 같고, 물과 같은 이 여래장·계는 어디에 있는가? 바로 나의 심상속(心相續) 안에 있으니, 이것을 알면 바로 아는 것이고, 모르면 전도(顚倒)된다. 마음속에 있음에도 알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알지 못하게 하는 장애가 있기 때문이다.
법에 대한 분노, 아견(我見),
윤회의 고(苦)로 인한 두려움,
유정(有情)의 이익을 살피지 않음 [1.32]
།ཆོས་ལ་ཁོང་ཁྲོ་བདག་ལྟ་དང་། །འཁོར་བའི་སྡུག་བསྔལ་གྱིས་འཇིགས་དང་།
།སེམས་ཅན་དོན་ལ་ལྟོས་མེད་ཉིད།
여래장을 알지 못하게 막는 장애에는 4가지가 있다.
①첫 번째로 "법에 대한 분노"는 여러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법(法, Skt. dharma)을 광의적 의미로 본다면, 불교의 가르침을 넘어서서 사회 전체에 통용되는 윤리와 도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윤리와 도덕으로서의 법을 싫어하고 위반하다면, 그 사람은 범죄자가 되고 악인이 된다.
세부적으로는 대승(大乘)의 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대승법이란 무엇인가? 자비와 지혜가 바로 대승의 법이다. 누군가에게 장점이 있더라도, 그를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은 그의 좋은 점을 보면 오히려 화를 내고 비난을 할 것이다. 허물은 최대한 찾아낼 것이고, 장점은 조금도 보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승의 법을 싫어하고 그것에 화를 낸다면, 그 법의 좋은 점은 결코 볼 수 없으므로, 심각한 장애가 된다. 자비와 공성을 깨닫는 지혜를 좋아하지 않고 되려 그 이야기를 들으면 분노하는 이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여래장을 결코 볼 수 없다.
② 두 번째 장애는 "아견(我見)"이다. 심자성(心自性)은 아(我)와 무아(無我)의 2변(邊)을 모두 떠난 것이다. 그런데도 '아(我)'가 존재한다며 집착한다면, 아와 무아를 초월한 본성을 가로막는다.
③ 세 번째 장애는 "윤회의 고(苦)로 인한 두려움"이다. 심자성(心自性)은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그런데 윤회의 고통을 두려워하여 윤회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이 또한 마음의 본성에 근접하지 못하고 멀어지는 일이다. 두려움도 공포심도 없어야 마음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다. 편안하게 머물 수 있으면, 비로소 사물의 실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 사물의 실상을 바로 인식하면 전도(轉倒)되지 않으며, 신구의(身口意)의 3업(三業)도 바르게 되어 실수가 없게 된다.
④ 네 번째는 "유정(有情)의 이익을 살피지 않음"이다. 심자성(心自性)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자비의 습기를 머금고 있다. 중생에 대한 자비심이 없다면, 마음의 본성으로부터 멀어진다.
욕망이 큰 자, 외도(外道), 성문(聲聞),
독각(獨覺)들의 장애로 4가지이다.
정화의 원인은, 탁월한 믿음
등의 법으로 4가지이다. [1.33]
།འདོད་ཆེན་མུ་སྟེགས་ཉན་ཐོས་དང་། །རང་བྱུང་རྣམས་ཀྱི་སྒྲིབ་རྣམ་བཞི།
།དག་རྒྱུ་ལྷག་པར་མོས་པ་ལ། །སོགས་པའི་ཆོས་ནི་རྣམ་བཞི་ཉིད།
이 4가지 장애는 주로 어떤 이들에게 각각 있는가?
첫 번째로 "욕망이 큰 자"라고 하였다. 매우 큰 욕망을 지닌 이들에게는 '법에 대한 분노'가 있다. 법(法)이란, 기본적으로 나보다는 남을 배려하고 남을 위하는 일이다. 남을 아끼는 마음에서 자비심을 일으키고, 자비심에 의지하여 지혜와 보리심도 일어나며, 마침내 훌륭한 과(果)를 성취한다. 그러나 욕망이 큰 이들은 이 과정을 전혀 즐거워하지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기 혼자 욕망을 충족하고, 자기 혼자서 당장 편안하고 쾌락을 누리기를 욕망할 뿐이다. 그런 욕망에 가득 찬 사람에게 자비심을 내라, 공성(空性)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아무리 말을 한들, 그는 되려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이고 무의미한 말은 듣기 싫다며 성을 낼 것이다.
두 번째로 "외도(外道)"라고 하였다. '아견(我見)'의 장애는 주로 외도에게 있다. 고대 인도에서 외도들은 대체로 인과(因果, Tib. las 'bras)의 체계를 깊이 믿었기에, 업을 짓는 자와 그 과(果)를 경험하는 주체로서의 '나'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외도들은 이 '나'는 단일하게 성립하고 불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나'가 없다면 전생에서 현생으로 혹은 현생에서 내생으로 갈 수 있는 존재가 없어진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불변하는 '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로 '윤회의 고(苦)로 인한 두려움'을 주로 겪는 이들은 "성문(聲聞)"이다. 성문(聲聞, Tib. nyan thos, Skt. śrāvaka)의 길을 가는 이들은, 이때까지 너무나 오랫동안 윤회에서 고통을 겪었기에 이제 지치고 피로하니,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번 생에 반드시 윤회의 고로부터 해탈하여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이 너무나 지겹고 고통스러우므로,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겠다며 좌절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문들이 이 윤회는 무의미하므로 그것을 염리(厭離)하여 다시금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성문들에게는 윤회에서 벗어나서 새롭게 도달하는 곳에 대한 희망이 있다. 현대인들은 이 세상이 싫고 염증을 느낀다고 하지만, 달리 갈 곳을 알지 못하기에 급기야 절망하고 만다. 희망이 없으면 마음이 공허하다. 그러나 희망이 있으면 늘 마음이 충만하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희망이다. 불법(佛法)을 수행하면 반드시 성취하는 것이 있다고 수행자가 확신한다면, 그 마음에는 늘 힘이 가득하고, 우울함이 결코 그를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네 번째로 "유정(有情)의 이익을 살피지 않음"은 "독각(獨覺, Tib. rang sang rgyas, Skt. pratyekabuddha )"들의 주된 장애이다.
이상의 4가지 장애를 현대 수행자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도 있겠다. 우선 첫 번째로 법에 대한 분노는, 극도로 이기적이고 욕망에 가득 차서 오직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의 장애이다. 두 번째로 아견(我見)은, 아만(我慢)이 매우 큰 사람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최고이고 자기만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자이다. 세 번째로 윤회의 고(苦)로 인한 두려움은, 겁이 많고 공포심에 잘 사로잡히는 사람의 장애라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유정(有情)의 이익을 살피지 않음은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조금도 없는 사람에게 있는 장애이다.
"정화의 원인은, 탁월한 믿음 등의 법으로 4가지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4가지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4가지 대치법(對治法, Tib. gnyen po, Skt. pratipakṣa)이 필요하다. 4가지란 무엇인가? 1.30에서 제시했던 ①법에 대한 믿음 ②뛰어난 지혜 ③삼매 ④연민이다. 이 4가지를 갖추면 4가지 장애를 제거할 수 있다. 4가지 장애를 제거하고 법에 대한 믿음 등의 4가지 법을 마음에 갖추면, 마침내 마음의 본성을 증득한다.
최상승(最上乘)에 대한 헌신은 종자(種子)이고,
지혜는 부처의 속성을 산출하는 어머니이며,
선정(禪定)의 편안한 태(胎)에 머물고, 비(悲)라는 유모를 지니니,
바로 그런 이가 능인(能人)의 후예인 법왕자(法王子)이다. [1.34]
།ཐེག་མཆོག་ལ་མོས་ས་བོན་ཤེས་རབ་ནི། །སངས་རྒྱས་ཆོས་བསྐྱེད་མ་དང་བསམ་གཏན་གྱི།
།བདེ་བའི་མངལ་གནས་སྙིང་རྗེའི་མ་མ་ཅན། །གང་ཡིན་དེ་དག་ཐུབ་པའི་རྗེས་སྐྱེས་སྲས།
내용을 정리해보자. 마음의 본성은 여의보주, 허공, 물과 같다고 했다. 그러한 심자성(心自性)이 늘 내재하지만 그럼에도 보지 못하는 것은 4가지 장애가 덮고 있기 때문이다. 4가지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4가지 법이 필요하다. 1.34는 4가지 법에 대한 부연 설명이다.
"최상승(最上乘)에 대한 헌신은 종자(種子)이고"라고 하였다. 최상승(最上乘)이란 대승법(大乘法)을 말한다. 대승의 법에 대한 헌신이란, 그 가르침을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헌신의 마음은 씨앗과 같다. 대승법을 좋아하고 기뻐하면, 마치 종자를 잘 심으면 싹이 반드시 나는 것처럼, 마땅한 과(果)를 반드시 얻게 된다. 법에 대한 헌신의 마음이 있는 이는 법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멀고 험난한 곳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나아갈 것이고 노력할 것이다. 또 종자는 다른 의미로는 장차 태어나서 사람으로 성장할 정수를 의미하기도 한다.
"지혜는 부처의 속성을 산출하는 어머니이며"라고 하였다. 지혜는 종자를 품고 길러서 아이로 태어나게 하는 어머니와 같다. 지혜란 무아(無我)를 아는 지혜, 공성(空性)을 아는 지혜, 여래장(如來藏)을 아는 지혜이다. 이러한 지혜는 마치 어머니와 같아서 부처의 여러 속성이 생겨나게 한다. 공성을 깨닫는 지혜인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Tib. shes rab pha rol tu phyin pa, Skt. prajñāpāramitā)는 위대한 어머니라고 한다. 어째서인가? 그것에 의지하여 성문, 독각, 부처가 모두 나오기 때문이다.
"선정(禪定)의 편안한 태(胎)에 머물고"라고 하였다. 종자가 있고 어머니가 있더라도, 그 모태(母胎)에 편안히 머물 수 없다면 아이가 태어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대승법에 대한 믿음과 지혜가 있더라도, 올바른 선정(禪定, Tib. bsam gtan, Skt. dhyāna)을 닦지 않는다면 올바른 결과를 획득할 수 없다.
"비(悲)라는 유모를 지니니"라고 하였다. 종자가 어머니의 모태에 편안하게 머무르다가 마침내 태어난다 할지라도, 젖을 물려줄 유모가 없으면 아기가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대승법에 대한 헌신, 대승의 지혜, 선정을 갖추었더라도, 비심(悲心)이 없다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없다.
"바로 그런 이가 능인(能人)의 후예인 법왕자(法王子)이다."라고 하였다. 능인(能人, Tib. thub pa, Skt. muni)이란 바로 부처님을 일컫는다. 이러한 4가지 법에 의해 태어나서 자라는 아이가 바로 부처님의 후예이니, 법왕자(法王子)란 바로 보살을 가리킨다. 법왕자(法王子) 즉 부처의 자식에는 3종류가 있다. 몸의 자식은 혈육을 가리키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경우에는 라후라(羅睺羅, Tib. sgra gcan 'dzin, Skt. rāhula) 존자이다. 말씀의 자식은 부처의 설법을 듣고 아라한과를 이루는 성문(聲聞)과 나아가서는 독각(獨覺)들이다. 그리고 마음의 자식은, 부처의 마음속에 있는 덕을 따라 배우고 마침내 그것을 성취하는 보살들이다. 여기서 법왕자는 부처의 마음의 자식인 보살들을 의미한다.
정(淨), 아(我), 낙(樂), 상(常)의
덕(德)의 바라밀다는 과(果)이니,
괴로움을 염리(厭離)하여 적정(寂靜)을 성취하기를
열망하고 발원하는 작용을 한다. [1.35]
།གཙང་བདག་བདེ་དང་རྟག་ཉིད་ཀྱི། །ཡོན་ཏན་ཕ་རོལ་ཕྱིན་པ་འབྲས།
།སྡུག་བསྔལ་ཡིད་འབྱུང་ཞི་ཐོབ་པར། །འདུན་དང་སྨོན་པའི་ལས་ཅན་ནོ།
현재 우리는 여래장의 10상(十相)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10상은 자성(自性), 인(因), 과(果), 작용(業), 갖춤, 행입(行入), 단계(時差別), 편재성(遍在性), 상주불변의 덕(不變徳), 무차별(無差別)이다. 1.30에서 1.34까지의 내용을 다시 살펴보자. 여래장을 큰 보석, 허공, 물과 같다고 한 것은, 10상 중의 첫 번째인 여래장의 자성(自性)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그 다음 법에 대한 믿음, 뛰어난 지혜, 삼매, 연민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한 것은, 두 번째인 인(因)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이제 1.35에서는 10상 중의 세 번째인 과(果)와 네 번째인 작용(業)을 함께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