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진원
2024-11-06 (수) 23:54정진원(동국대학교 세계불교학연구소
/K Classic 콘텐츠연구소 소장)
악플의 여왕 진성
이상하게도 진성여왕에 대하여서는 역사서에 폄하일색이다. 삼촌인 각간 위홍과 부적절한 관계였다느니 미소년 두셋과 음란한 짓을 일삼았다느니 그리하여 나라가 도탄에 빠지고 도적들이 벌떼같이 일어났다는 둥 신라 최고 존엄에게 못하는 말이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각간 위홍이 당당하게 남편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덕여왕 또한 삼촌인 용수, 용춘과 결혼하였다. 선덕의 결혼은 성골을 유지하기 위한 신라왕실의 노력으로 아버지 진평이 주도한 가히 눈물겨운 상황으로 연출된다. 결국 선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사촌인 진덕을 끝으로 성골은 마감되고 김춘추가 무열왕이 되면서 진골시대가 열린다. 물론 김춘추는 진지왕의 손자라 원래 성골이지만 진지왕이 폐위되면서 진골로 강등되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도 진골이 된 것이다.
신라에 공식적으로 세 여왕이 있었다. 그나마 선덕에 대하여서만 첫 여왕이어서인지 왈가왈부 설왕설래 말들이 많고, 진덕은 선덕과 무열 사이에서 징검돌 역할로 소극적으로만 그려진다. 그러니 진성은 차라리 무플이었던 진덕보다 악플의 여왕이 낫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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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디자인=미디어붓다)
진성여대왕의 노래
나의 이름은 진성여대왕
신라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여왕에 대한 예우일까
후세 사람들은 신라 시대 자연스러운 골품 간의 근친결혼도
나의 경우 불륜이나 음사로 몰아붙이고
미소년들을 총애한 여왕으로 폄하하네
나는 선덕여왕이 숙부와 결혼한 것과 같이
숙부 각간 위홍과 정식으로 결혼하여 국정을 도모하였네
신라의 노래를 모은 향가 삼대목 편찬도 대구화상과 우리 부부의 작품이었네
당나라 유학한 최치원을 등용하고 시무십조를 받아들여
견훤과 궁예가 세운 후삼국에 맞서 국정 도모에 최선을 다하였네
화무십일홍 기울어 가는 신라, 아버지 경문왕과 오빠 헌강왕, 정강왕이 못다 한
나의 신라, 나의 백성을 위하여 내 목숨 다하는 날까지
신라와 살고 신라로 죽었네
누군가는 그런 나를 다라니 대자보로 비방하고
전성기 신라로 회복 못한 한풀이를 하겠다면
이 또한 나의 신라를 나의 백성을 위한 일일진대
그 무엇이 대수로우랴
이러한 나의 신라의 신라에 의한 신라를 위한 충정을
삼국유사가 알아준다면 그것으로 족하리
나는야 누가 뭐라 해도 진성여대왕
하늘을 우러러 그 이름에 부끄럼 없으리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맞대놓고 보면 여왕에 대한 표기가 흥미롭다. 삼국유사 왕력에는 세 여왕을 모두 ‘여왕’이라고 명기한 반면, 삼국사기에는 모두 ‘선덕왕, 진덕왕, 진성왕’이라고 중립적으로 표기하고 있다. 얼핏 선덕을 암탉이라 폄하한 삼국사기의 김부식의 표기방식이 웬일일까 싶지만 한 글자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는 우리 선조들의 글쓰기 방식에 어떤 원칙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그러나 삼국유사 기이편 제목에는 선덕왕, 진덕왕 등으로 ‘여왕’이라 쓰지 않는 반면 진성왕은 ‘진성여대왕’이라고 구분 지었다. 혹시 우리의 주인공이 삼국유사에 ‘진성여대왕’으로 서술돼 있다는 점은 그간의 편견과 선입견을 재고해야 할 단서가 아닐까. 진성이 불륜과 음사에 빠져 나라가 도탄에 빠지게 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면 과연 이러한 칭호를 받을 수 있을까. 일연은 어떤 서술 태도를 지니고 있는가. 21세기에도 전혀 손색없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각주 방식을 견지하는 선지식이 아니던가.
진성여왕과 최치원의 기록
무언가 있다. 특히 최치원을 등용하여 시무10조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최치원이 남긴 기록에 성군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서 진성은 반드시 다시 보기가 필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진성은 생년은 미상이나 그녀의 부모인 경문왕과 문의왕후가 860년에 혼인했고 진성여왕이 그들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난 점 그리고 어머니가 870년에 사망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860년대 중후반에 태어나 887년에 즉위, 897년까지 살다 간 인물이다. 젊은 나이인 20대 초반에 왕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치원이 쓴 양위표(讓位表)와 사사위표(謝嗣位表) 그리고 낭혜화상탑비 등에 의하면 진성은 성군(聖君)이었다고 전한다. 게다가 삼국유사에는 막내아들로 양패를 두었는데 당나라 사신으로 가다 생긴 거타지와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어 흥미롭다. 그렇다면 진성에게 자식들도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런데 왜 오빠 헌강왕의 서자까지 찾아서 왕을 세운 것일까. 또다시 물음표를 찍게 된다.
위홍은 진성의 남편으로서, 선덕의 남편이자 재상 을제처럼 정치적 역할을 도맡아 하다 일찍 죽는다. 진성의 유모 부호부인의 남편으로 나오기도 하는 바 양패를 위홍의 자식이고 막내라고 하기에는 개연성이 적다. 죽은 후 총애하는 신하 몇이 권력을 잡고 전횡하는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이라면 정식 결혼이 아니므로 입지가 굳지 못했을 것이다. 이 또한 풀어야 할 숙제이다.
최치원의 시무십조
시무십조 또는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는 894년(진성왕 8년)에 신라의 최치원이 진성왕에게 올린 사회개혁안이다. 6두품 유학 지식인을 중심으로 신라 왕실의 안녕과 신라 국가의 위상을 강조한 존왕적 정치 이념을 담았다고 전하나 내용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왕권이 이미 약화된 채 진골 세력이 거세게 반발하고 호족 세력이 지방 곳곳에서 성장한 상황에서 이 정책이 실현되기는 어려웠다.
후삼국 시기 사회 혼란 수습을 위한 최치원 이후 최언위, 최승로 등 신라 출신 당 유학 지식인에 의해 강조되었다. 후에 이 시무십조는 고려의 국가 체제 정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최치원이 시무십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진상하기 전에 편찬하거나 작성하였던 『계원필경(桂苑筆耕)』과 『사산비명(四山碑銘)』의 내용을 연관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국학(國學)을 통한 유학 교육의 강화, 당나라에 유학생 파견과 그 활용 방안 모색, 문관의 관직 서열 승격 도모, 유학적 소양을 기준으로 한 관료 임용과 승진 방안 구축이 담겼을 것이다. 또한 지방의 백성이 떠나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보완 장치 마련, 세금제도의 개선과 지방제도에 대한 개편 등이 사회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왕의 교화로 설득되지 않는 반국가 세력에 대한 철저한 응징 방안도 담겼을 것이다. 진성여왕은 기뻐하며 최치원을 아찬의 벼슬을 내렸고 최치원이 헌강왕 때 이후 왕실 측근 문한관으로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아 시무십여조의 진상에는 진성왕의 요청도 반영되었을 듯하다.
다라니 대자보의 여왕 진성
그 와중에 역사상 아주 유식한 최초의 대자보가 탄생한다. 도적이 생기고 백성들은 다라니로 그것을 비판하는 글을 길 위에 던져 놓았다고 한다. 이 기록으로 우리는 진성여왕 때 이미 다라니의 형태를 패러디해 시국을 비판하는 글을 짓고 백성 모두 이해할 정도로 일반화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어서 ‘왕거인’이라는 당대 지식인이 용의자로 잡혀온다. 왕거인이 대단하기는 한 모양. 또다시 시를 지어 무고함을 하늘에 호소하니 시의 내용대로 감옥에 벼락이 쳐서 모두 겁을 내어 풀려났다고 한다. 왕거인이 무죄로 풀려났다는 것은 그 말고도 다라니로 글깨나 짓는 식자층이 또 있다는 말이 된다. 어쩌면 왕거인이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듯 그는 왕실과 겨룰만한 예사롭지 않은 풍채와 지식을 지닌 경계의 대상이었을지 모른다.
다라니는 이러하다.
“남무망국(南無亡國) 찰니나제(刹尼那帝) 판니판니소판니(判尼判尼蘇判尼) 우우삼아간(于于三阿干) 부이사바하(鳧伊娑婆訶)”
해설하는 사람은 이렇게 풀이하였다.
‘찰니나제’는 여왕을 말한다. ‘판니판니소판니’는 두 소판을 말한다. 소판은 벼슬 이름이다. ‘우우삼아간’은 세 명의 총애 받는 신하를 말한다. ‘부이’란 유모 ‘부호부인’을 말한다.”
나라 망함에 귀의합니다
찰니나제 신라의 진성여왕
판니판니 두 소판
우우 세 아간
부이 부호부인이
그리하여지이다
이처럼 여왕이 다스리는 것은 난이도가 훨씬 높다. 내용이 나라 망하는 것에 귀의한다니.. 나라의 여황제가 17관등 중 3관등에 속하는 잡간 또는 소판이라 부르는 남편 위홍과 또 다른 소판, 그리고 6관등인 아간 셋, 유모와 함께 나라를 망하게 하려는 염불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속 진성여왕
과연 그럴까. 진성여왕은 삼국사기에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이름은 만(曼)이며, 헌강왕의 여동생이다. 최치원의 「사추증표(謝追贈表)」에는 이름이 탄(坦)으로 나온다. 즉위한 후 1년간 모든 주와 군의 1년간 세금을 면제하여 민심을 수습한다. 황룡사 백고좌법회를 연다.
2년째 각간 위홍과 대구화상에게 명하여 향가 수집 정리한 삼대목을 편찬케 한다.
3년째부터 국고가 비고 재정이 궁핍해진다. 세금을 독촉하니 원종과 애노의 난이 일어난다.
5년에는 궁예가 강원도를 차지하고 6년에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운다. 그러는 가운데에서도 최치원 훈요십조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의 보필을 받는다.
9년째 헌강왕의 서자 요를 진성왕 집안의 골격의 남다름으로 확인하고 태자로 삼는다.
10년에는 붉은 바지를 입은 적고적이 서라벌 모량리까지 침략하였다.
11년 6월에 15세 된 태자를 효공왕으로 세우고 그해 12월 세상을 떠난다.
10년의 통치기간 동안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어 보인다. 삼촌이자 남편인 각간 위홍을 의지해 성군이 되고자 세금 면제와 예악의 상징인 삼대목을 정리하며 야심 차게 출발했던 진성. 그러나 이듬해 각간 위홍이 죽자 정치드라이브가 크게 흔들린다. 미소년과 음란하려 한 것이 아니라 위홍같이 늙은 정치가는 앞날을 장담 못 하니 젊은 피를 수혈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최치원의 등용과 보필이 꾸준히 이어지는 것을 보아도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가난한 효녀 지은이 남의 집 종으로 들어가 홀어머니를 봉양하는 소식이 전해지자 곡식과 집을 내려주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도 전한다.
진성은 왕으로 준비되지 못한 채 20대 꽃다운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 보면 최치원의 「납정절표(納旌節表)」에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저의 큰형인 국왕 정(헌강왕)이 지난 광계(光啓) 3년 7월 5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나, 저의 조카 요(嶢)는 태어나 아직 1년이 되지 않았으므로, 저의 둘째 형인 황(晃 정강왕)이 임시로 나라를 다스리다가, 또한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라고 하였다.
오빠 정강왕은 병이 깊어지자 여동생 만이 천성이 명민하고 체격이 장부와 같으니 선덕과 진덕을 본받아 왕으로 세우라고 시중 준흥에게 유언하였다.
그랬다. 진성은 선덕과 진덕의 여왕 자리를 이어 잘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진성은 남편이자 경륜 많은 정치인 각간 위홍에게, 선덕과 진덕을 든든히 받쳐주는 을제나 알천, 춘추와 유신을 기대했을 것이다.
선덕이 완성한 황룡사에서 백고좌법회도 열고 최치원의 나라 잘 다스리는 방법도 수용한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대장부 같던 진성의 그러한 여러 노력을 삼국유사는 그리하여 ‘진성여대왕’이라 칭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여왕 진성여대왕의 다빈치 코드
여기서 드는 궁금증 하나, 35대 경덕왕은 천기를 거스르면서까지 아들 36대 혜공왕을 고집하여 기필코 남자로 왕을 세운다. 어찌하여 이미 27대 선덕과 28대 진덕의 두 여왕이 다스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던 것일까. 물론 선덕왕이 여왕이 되고 나서도 당태종의 조롱, 모란이 향기 없는 꽃이라든지 외부의 침략을 막기 위해 당나라 귀족을 하나 보내 섭정을 시키겠다든지 모욕적인 언사가 많았다. 진덕은 비단을 짜고 태평가를 지어 바치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해석학의 문제. 자국의 이익을 위해 21세기에도 각국의 국가원수들은 세일즈 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선덕은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고 진덕은 당태종에게 외교적인 실리를 얻어낸다. 혜공왕은 결국 아들로 왕 노릇했지만 반란으로 죽음을 맞는다. 그렇게 세우고 싶지 않던 마지막 여왕으로 등장한 진성. 48대 경문왕의 딸인 진성은 헌강, 정강 두 오빠의 뒤를 이어 삼남매가 나란히 왕위에 오른다.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편견과 선입관으로 쉽게 한 줄로 사람을 재단해 왔는가. 똑같은 삼촌이 선덕에게는 정식 남편으로 인정되고 진성에게는 불륜녀 꼬리표를 붙인다. 오늘 이 자리에서 애석하게도 진성의 진면목을 구체적으로 나툴 길은 없지만 이 억울한 주홍글씨만 삭제해도 진성여대왕에 들어있는 그 이름의 가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