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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의 구원자는 보시”

이 학종 | | 2024-06-07 (금)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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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상(사진=미디어붓다)



불타는 집에서 

재물을 구원하면, 이용할 수 있으나

그 속에서 불타는 것은

이용할 수 없네.


늙음과 죽음으로

사람이 불타지만,

보시로서 구원할 수 있네. 

보시가 최상의 구원자이기 때문이네. 


몸으로나 말로나 마음으로

자신을 올바로 제어하여

살아 있는 동안 공덕을 쌓으면

그것이 죽은 뒤의 행복이 되리.


북한산 높은 곳에 올라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 그 높던 건물도, 그 많던 사람도 작거나 보잘 것 없는 두두물물(頭頭物物)에 지나지 않는다. 조물주 다음이 건물주라는 시쳇말도, 검사나 판사 따위의 지위도 정상에 올라 가슴이 탁 트인 경지에서는, 잠시이기는 하지만 보잘것없는 것으로 다가온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훌훌 털어버린 수행자에게 있어 세속적 욕망들도 아마 이와 같은 것이다. 길고 긴, 어쩌면 끝없이 이어지는 쓰라린 윤회의 고통과 방황을 끝장내고자 대발심을 하고 단단한 서원을 세운 이에게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높은 곳에 올라야 멀리 볼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이처럼 한 사람의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길어야 100년을 살아가고, 그 100년 가운데 행복한 시간은 형편없이 짧기만 한데, 사람들은 그 부질없고 알량한 행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심지어 살생을 하기도 한다. 

세계를 욕계와 색계, 무색계로 나누어 설파한 부처님의 광대한 스케일에, 얼마든지 세속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야사 등 바라나시의 청년들이 모든 것을 훌훌 털고 출가를 단행한 것은, 궁극적 행복은 나고 죽고 나고 죽는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 즉 열반의 성취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세속적 지위와 부와 권력과 명예를 가진 사람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행자의 삶을 선택하는 것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버릴 것이 많은 사람이 버릴 것이 없는 사람보다 수행자의 길을 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부처님을 비롯하여, 수많은 왕자들, 엄청난 재산을 보유한 장자들의 출가를 ‘위대한 포기’라고 일컫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부처님의 이 시는 <앙굿따라니까야> 3:52 ‘두 브라만의 경(Dutiyadvebrāmaṇasutta)’②에 나온다. 늙어서 말년에 이른 120세의 두 노 브라만이 어느 날 부처님께 다가와, 그 나이가 되도록 이렇다 할 공덕을 쌓지 못한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며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하소연을 했던 것이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늙고 연로하고 나이가 들고 만년에 이르러 노령에 달해 향년 백이십 세가 된 브라만들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아직 선행을 하지 못했고, 착하고 건전한 일을 하지 못했고, 두려움에서 피할 곳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저희들에게 오랜 세월 동안 이익과 행복이 있도록 세존께서 충고하여 주십시오. 저희들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다. 


“브라만들이여, 이 세상은 늙음과 병듦과 죽음으로 불타오릅니다. 브라만들이여, 이 세상이 늙음과 병듦과 죽음으로 불타오를지라도 어떤 사람이 신체를 제어하고, 언어를 제어하고, 정신을 제어하면, 그 사람에게 그것이 죽은 뒤의 구원이과 동굴이고 섬이고 피난이고 피안입니다.”


부처님은 이어 당신의 가르침을 한 편의 시로 정리해 읊으신 것이다. 

부처님은 이 시에서 행복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잘 제어하는 것,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악업을 멀리하고, 선업을 닦으라고, 노브라만들에게 가르치셨다. 즉 십악업을 짓지 말고 십선업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십악(十惡)은 몸과 말과 뜻(마음)으로 짓는 열 가지 죄악이다. 살생, 투도, 사음, 망어, 기어, 양설, 악구, 탐욕, 진에, 사견이 그것이다. 십선(十善)은 10종류의 선행을 총칭한 것으로, 십악과 반대의 개념이다. 십악을 철저하게 제어하는 것, 즉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양설, 불악구, 불기어, 불탐애, 부진에, 불치암이 십선인 것이다. 십선은 선업이 되어 반드시 그 결과를 남기므로 십선업도(十善業道)라고도 한다. 

풀어서 설명한다면 몸으로 짓는 선한 행위는 살행을 하지 않고, 도둑질을 금하며,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입으로 짓는 선한 행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이간질을 하지 않는 것, 저주를 퍼붓지 않는 것, 무의미한 잡설을 지껄이지 않는 것이다. 또 마음으로 짓는 선한 행위는 흔히 모든 번뇌의 근본으로 지목되는 탐욕과 분노와 무지의 삼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오계와 비교해볼 때 십선의 특징은 입에 관한 계를 세분한 것과, 마음을 계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결국 십선은 후에 대승불교에 와서 지계바라밀의 의미로 발전되는데, 대승 유식학파 문헌인 <유가사지론> ‘보살지(菩薩地)’는 삼취정계(三聚淨戒)라는 틀 속에서 계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확대 해석하고 있다. 삼취정계, 즉 섭율의계((攝律儀戒)는 부처님이 정한 계율을 지켜 악을 막는 것이고, 섭선법계(攝善法戒)는 자진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며, 섭중생계(攝衆生戒)는 중생을 교화하고 그 이익을 위해 힘을 다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 시를 통해 ‘최고의 보시’는 계를 잘 지키는 것, 특히 십선의 실천을 통해 공덕을 짓는 것이라고 역설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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