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ㆍ기고 > 정진원 교수의 노래하는 삼국유사

김유신의 첫사랑 천관녀와 천관사

정 진원 | | 2024-05-30 (목) 08:01

   

                          정진원(튀르키예 국립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학과) 


천관녀는 김유신의 첫사랑에 불과할까

우리는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 프로젝트에 혁혁한 공을 세운 김유신과 김춘추 그리고 춘추의 부인이 된 유신의 여동생 문회와 보희의 이야기들을 알고 있다. 

이제 김유신의 그녀, 천관녀에 대하여 이야기할 시간이다. 이렇게 삼국유사 속 여성들은 한 사람을 조명하면 마치 감자 줄기에 열린 감자들처럼 우르르 다가온다. 역사에 길이 남은 김유신이 있게 한 뒤안길에는 어쩌면 그의 어머니 만명부인이나 여동생보다도 천관이 더 중요한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천관녀는 과연 김유신이 소싯적 사랑하고 무참히 버린 비련의 여인에 불과할까. 이 글을 쓰게 된 천관녀의 사연을 들어보자. 


천관녀여 천관사여 


2000년 어느 날

경주 오릉 근처 밭에서

천관사 와편과 석재가 발견되었네

우연의 일치일까

김유신의 집 재매정에서 500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


그 시절 기생이란 말은 나오지 않으니 유녀였을까

그러기엔 하늘을 주관한다는 천관의 이름이 너무 무거워...


신관이었을까

아마도 유신을 한눈에 사로잡을 기품과 카리스마 있었으리


무녀였을까

유신의 말조차 그 집을 기억하고 말았을 천관의 사당 


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은 성골 출신 공주 

진흥왕의 조카딸이자 진평왕의 누이였다네

그런데 그만 신라에 투항하고만 망한 나라 가야의 

왕손 김서현을 사랑하고 사랑하여 

결사 반대하는 결혼을 하고 말았네 

벼락 내린 하늘의 도움으로 갇혀 있던 별채를 탈출

왕녀의 지위와 신분을 버리고

멀리멀리 백제의 접경 만노 진천에서

20개월이라는 의미심장한 시간 끝에 낳은 아들 

그 이름도 거룩한 김유신 


열다섯 해 지난 뒤에야 자청한 유배 끝에 

천신만고 서라벌에 돌아와 

그 아들 화랑의 우두머리 되기 전까지

그저 미관말직 지방 태수의 아들 시골뜨기였을 유신


신라의 이팔청춘 로미오 줄리엣이 만났네 

천관녀는 하늘의 관을 쓴 하늘 사람

유신은 야생의 길들여지지 않은 훈남

서로에게 없는 매력에 끌려서

마침내 휘영청 달이 떴으리 


어렵사리 다시 귀환한 어머니 만명부인 신라 왕족의 자리

만명은 아들만큼은 자기처럼 사는 꼴 두고 볼 수 없었네


유신 또한 공주 신분 버리고 이름뿐인 가야 진골 아버지 따라 

고생만 했던 어머니 만명부인

알고 보니 천사옥대 진평왕의 귀하디 귀한 여동생이었음을 뼈에 새기며


유신은 다짐하고 다짐했겠지

어머니의 귀한 자리

다시는 나로 인해 낮추지 않겠노라


차마 어쩔 수 없는 유신의 심중을 읽고 

천관을 찾아간 애마의 목을 단칼에 벤 것은

애마를 벤 것인가 

자신을 벤 것인가 


돌아오는 길

둘의 애간장도 끊었으리 


천관은 그 길로 비구니가 되어 떠나고

먼 훗날 유신은 천관의 집터에 절을 세워 추모했다지

그 이름 천관이여 천관의 넋이 어린 천관사여



크게보기
(사진디자인=미디어붓다) 



천관녀의 정체, 천관녀는 기녀였을까 신녀였을까 무녀였을까

유신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에 반드시 등장하는 천관녀. 그의 정체는 무엇인가. 단순 기녀였을까 신녀였을까 무녀였을까. 우리는 주로 천관녀의 출신에 대해 고려시대에 쓰인 이인로의 ‘파한집’을 참고하곤 한다. 


김유신이 젊었을 때 어머니인 만명부인은 날마다 엄한 가르침을 더하여 교유(交遊)함에 잊지 말도록 하였다. 하루는 천관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만명부인은 얼굴을 마주하며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다. 주야로 너 하나 잘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공명을 세워 군친(君親)의 영광이 되어야 하거늘 지금 너는 천한 여자아이와 함께 음방에서 유희하며 술자리를 벌이고 있는구나" 하면서 울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김유신은 즉시 어머니 앞에서 스스로 맹세하기를 "다시는 그 집 앞 문을 지나지 않겠다"고 하였다. 하루는 피로에 지쳐 술을 마신 후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김유신이 탄 말은 옛길을 따라서 잘못하여 천관의 집에 이르렀다. 김유신은 한편으로는 기쁘고 또 한편으로는 원망스러웠다. 천관이 눈물을 흘리면서 나와 맞이하였다. 

그러나 공은 이미 깨달은 바가 있어 타고 온 말을 베고 안장은 버리고 되돌아왔다. 천관이 원망하는 노래를 한 곡 지었는데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경주에 천관사(天官寺)가 있는데 즉 그 집이다.


고려시대 13세기에 이 이야기를 쓴 이인로는 천관이 사는 집을 기생집으로 그리고 있지만 신라 시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유녀(遊女)’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녀’는 글자 그대로 ‘길에서 떠도는 여자’로 집과 정착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천관(天官)’이라는 이름으로 유추하면 하늘에 제사 지내는 신녀나 신관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풍습이 민속 신앙으로 이어져 무녀나 무당으로 불린 것이 아닌가 한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열일곱 살 된 화랑 김유신은 산속에서 수행하던 중에 신비한 노인을 만나, 그로부터 방술 즉 신선의 술법을 배웠다. 이듬해인 열여덟 살에 그는 산에서 향을 피우며 기도하던 중에 '천관' 즉 하늘 신으로부터 빛의 세례를 받았다. 


건복 29년(서기 612)에 이웃 적병(敵兵)이 점점 박도(迫到) 하니, 공은 더욱 비장한 마음을 격동하여, 혼자서 보검을 들고 인박산(咽薄山) 깊은 골짜기 속에 들어가서, 향을 피우며 하늘에 고하고 기원하기를 마치 중악(中嶽)에서 맹세하듯이 빌었더니, 천관신(天官神)이 빛을 내려 보검(寶劍)에 영기(靈氣)를 주었다. 


중국 도교에서도 천관은 천신(天神)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김부식은 ‘천관신’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데 이것이 천관녀와 관계를 미화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런 예들을 보면, 천관녀는 하늘신을 모시는 여성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구전을 거듭하며 흘러가다 조선시대에는 기생집 노비로 기록되는 등 그 시대의 모습으로 투영된다.


삼국유사 속 천관사 이야기 

삼국유사에는 천관녀 없는 천관사 이야기만 전하는데 삼국유사 권2 기이2 원성대왕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이찬 김주원이 처음에 상재(上宰)가 되고 원성왕은 당시 각간(角干)으로서 이재(二宰)의 자리에 있었다. 꿈에 머리에 쓴 두건을 벗고 흰 갓을 썼으며 12현금을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왕은) 꿈에서 깨어 사람을 시켜 점을 쳤더니 말하기를, “두건을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이고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쓸 징조이며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것을 듣고 매우 근심하여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때 아찬 여삼(餘三), 어떤 책에는 여산(餘山)이라고 하는 이가 와서 “이는 매우 좋은 꿈입니다.... 두건을 벗은 것은 위에 앉은 이가 없음이고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이며 12현금을 든 것은 12대 자손에게 왕위를 전할 징조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에 들어갈 상서입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안 되어 37대 선덕왕(宣德王)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은 김주원을 받들어 왕으로 삼아 장차 궁으로 맞아들이려고 하였다. 그의 집이 북천의 북쪽에 있었는데 갑자기 냇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었다. (원성)왕이 먼저 궁에 들어가 왕위에 오르자, 상재(上宰)의 무리들이 모두 와서 따르고 새로 오른 임금에게 축하를 드리니 이가 원성대왕(元聖大王)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삼국유사 기록은 ‘천관사’보다는 ‘천관사 우물’이 영험해 원성대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절의 우물이나 절의 연못은 용이 살거나 드나드는 곳으로 자주 등장한다. 이 기록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원성이 왕이 되기 전에 ‘흰 갓을 쓰고 천관사 우물에 들어가는 꿈’이 궁궐에 왕으로 들어갈 징조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하필 천관사의 우물로 들어가 신라의 왕이 되었다니 하늘의 뜻과 통해 있는 천관사의 우물의 영험은 김유신 후대로 갈수록 대단하기만 하다. 

신라 하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원성대왕 11년의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보자. 


왕이 즉위한 지 11년 을해(795)에 당의 사자가 서울에 와서 한 달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다. 그 하루 뒤에 두 여자가 내정(內庭)에 와서 아뢰기를 “저희들은 동지(東池), 청지(靑池)[청지는 곧 동천사(東泉寺)의 샘이다. 절의 기록에 의하면 이 샘은 동해의 용이 왕래하면서 불법을 듣던 곳이고, 절은 바로 진평왕이 세웠으며, 5백 성중(聖衆)과 5층탑과 전민(田民)을 아울러 헌납했다고 하였다.]에 있는 두 용의 아내입니다. 당의 사자가 하서국(河西國) 사람 둘을 데리고 와서, 우리 남편인 두 용과 분황사(芬皇寺) 우물에 있는 용까지 세 마리에게 술법을 써서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통에 넣어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왕은 하양관(河陽館)까지 쫓아가서 친히 연회를 열고 하서국 사람들에게 명하기를 “너희들은 어찌해서 우리나라의 세 용을 잡아 여기까지 왔느냐? 만일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반드시 극형에 처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제야 고기 세 마리를 내어 바치므로, 세 곳에 놓아주자 각각 물속에서 한 길이나 솟구치고 기뻐 뛰놀면서 가버렸다. (이에)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명철하고 거룩함에 감복하였다.


또 다른 동천사 연못은 동해의 용이 드나들며 불법을 들을 만큼 주요한 곳이라는 것이다. 분황사의 용과 황룡사의 용은 모두 왕을 상징한다. 실제로 용왕은 바다의 왕이 아니던가. 


천관사와 김유신의 재매정택의 우물이 품고 있는 다빈치 코드 

그런데 신기하게도 천관사에서부터 김유신이 결혼하고 산 집 ‘재매정댁’이 남천 건너 500미터 거리라는 것이다. 현재 그 유명한 천관사의 우물터는 찾을 수 없고 유신의 집 이름이기도 한 재매정댁(財買井宅), ‘재매부인의 우물집’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더욱 놀라운 것은 재매정 우물에서 말의 머리뼈가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천관녀의 집으로 데려간 말의 머리를 베었다는 대목이 떠오르지 않는가. 


경주 천관사지(天官寺址·사적 제340호)에서 남천을 건너 500m쯤 가면 김유신(金庾信)이 살던 옛날 집터와 우물이 있다. 당시 김유신의 가족이 즐겨 마시던 우물을 재매정(財買井·사적 제246호)이라고 한다. 2014년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이 우물에 대한 유적 발굴을 실시한 결과 ‘말의 머리뼈’가 출토가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전쟁에 나갔다가 돌아온 김유신이 백제의 침략 소식을 듣고 되짚어 와 다시 싸우러 갈 때 가족들도 만나지 않고 재매정의 물만 한 바가지 떠오라고 하여 마시고는 '우리 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 한 뒤 전쟁터로 떠났다고 한다. 여기서 재매부인은 김유신의 아내로 영모부인으로 알려져 있다. 차녀 신광부인은 문무왕의 후궁이 되었다. 곧 문무왕의 장모가 된다. 영모는 하종의 딸로 유모와 자매 간인데 유모는 자장의 어머니이다. 

김유신의 부인은 나중에 지소부인이 둘째 부인이 된다. 환갑에 김춘추와 유신의 여동생 문명왕후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는 것이다. 이로써 유신은 신라와 가야의 혈통을 기어코 하나로 잇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평생 가슴에 묻은 첫사랑 천관녀이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원성왕이 왕 되게 한 천관사의 우물은 어디로 간 것일까. 단지 발굴되지 못한 것일까. 재매정의 우물은 과연 물맛 때문인 걸까. 두 우물의 관계는 무엇일까. 우선 물음표라는 씨앗을 가슴에 품어보자. 앞으로 우리가 풀어야 할 다빈치 코드이다.


천관녀의 그 후와 천관사

그렇다면 유신과의 비인간적인 결별 이후 천관은 어디로 갔을까. 그녀는 만명부인의 엄혹한 감시 때문에 김유신을 만날 수 없게 되자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비구니가 된 그녀는 유신의 성공과 안녕을 기원하다가 죽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것이 사실일까. 

21세기 관점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비상식적인 사랑이다.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말의 머리를 베고 비정하게 돌아선 남자를 위하여 갑자기 제사 지내던 천관에서 비구니가 된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평생을 그의 성공을 기도하다 죽었다니...

여기에는 두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두 사람의 사랑에 반대한 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이 천관을 다시는 못 만나게 모종의 작업을 했거나 이미 천관으로서의 신분이나 직책이 유신과의 소문으로 그만둘 수밖에 없게 되었을 가능성도 짚어볼 수 있겠다.

그동안의 유신의 이야기에서도 가야계 후손이라는 출신에서 벗어나 신라인으로의 입신양명이 더 절실했을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마음은 천관에게 있었을지라도 말이다. 그러한 그녀를 위하여 김유신은 사랑을 잃고 떠난 천관에게 미안함을 천관의 사찰로 짓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불교는 국난극복의 국가 종교였고 유신은 원원사 등을 창건하기도 하였던 이력이 있다. 

천관사의 위치만 보더라도 바로 남쪽에 나라 최초의 궁궐, 박혁거세 탄생지, 6촌 시조들을 모시는 양산재가 있고, 북쪽에 반월성과 오릉 그리고 내물왕릉이 있는 곳이다. 전설에 내려오는 술이나 파는 천한 신분의 여자가 살 집의 위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재조명해야 할 천관녀의 위상

한창 꽃다운 나이에 걸출한 화랑 유신과 사랑을 했던 천관녀 또한 그에 걸맞은 대단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저 후대에 폄하되어 전하는 기녀나 유녀가 아니었다. 유신의 성공을 전 인생에 걸쳐 비구니스님으로 축원하였다면 천관 또한 자신의 신녀라는 직분도 버리고 결혼도 포기한 채 삼국을 통일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유신과 똑같은 통일신라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천관의 살신성인 없이 유신은 신라의 풍월주 딸 영모와 혼인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유신이 신라의 왕족과 귀족 사회에 편입할 수 없다는 의미이고 김춘추와의 합작도 삼국의 통일에도 참여하기 어려웠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천관을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녀라고 추정한다 하여도 그 신분이 높다고 할 수 없다. 화랑세기에는 왕족이나 귀족의 여인이 ‘천주(天主)’라는 역할을 하고 있으나 ‘천관’이라는 직분에 대한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관은 어쩌면 삼국사기의 ‘천관신’의 역할로 김유신의 성장을 돕고 천관사라는 절과 관련된 인물이 되어 신라인에게 높이 칭송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전혀 왕이 되리라 예측할 수 없던 김경신이 원성왕이 되는 영험의 역할로 등장하는 것이리라. 천관녀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


천관녀의 노래 


유신이여

나의 유신이여

나는 그대에게

무엇이었을까요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를 버려 행복했나요

영모 재매부인 만나

재매정 물만 마신 채

적진으로 달려가

삼국을 통일하셨더이다


그리하였으니

되었나이다

나 천관

하늘 제사를 주관합지요

나의 낭군이시여

나는 하늘에도 빌고

부처에게도 빌고 빌었습니다

나와 맺지 못할 운명이라면

삼국을 하나로 맺으시라고

누군가 나를

기녀로 읽고 가고

유녀로 읽고 가도

또 누군가 나를

무녀로 읽고

하늘 제사장으로 읽어도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 테요


그저 그대의 천관이었다는 것

길이길이 천관이었다는 것 

그것만이 나의 종요로운 일이었음을



기사에 만족하셨습니까?
자발적 유료 독자에 동참해 주십시오.


이전   다음
Comments
경담 2024-05-30 08:10:32
답변  
1.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구르며 춤을 춘다네
세상의 부귀와 공명은 부질없는 것
삼국을 일통 한들 남는 것은 백성의 주검뿐
천관을 쓰고 인간의 허물을 빌고 또 빌었다

2.
휘영한 달빛으로 걸어오는 이여
가슴엔 세상을 안고 남을 기상이 서리고
그대의 서늘한 눈매는 나를 바라보는가
아, 나는 더 이상 천관의 춤을 출 수가 없겠고나

3.
나는 무녀 당신은 화랑
그리움은 천형이 되어 지옥을 걷는구나
사랑을 맞이하는 애끓는 눈물은
붉은말의 피로 물들었느니
아, 춤을 잃고 버림받은
하찮은 목숨이여

4.
허공에서 다시 춤을 추던 세월이
얼마였던가
그대는 이제와 절을 세워
나를 다시 보려 하는가
가소롭도다 천관사여
애마의 목을 치던 결기는 어디 갔는가
적광명 2024-06-01 15:33:31
답변 삭제  
경담님은 천관을 이렇게 읽으셨군요.
비밀글

이름 패스워드

© 미디어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