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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행복에 정신줄 놓지 말라”

이 학종 | | 2024-02-16 (금)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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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산 대전사(사진=미디어붓다)
 


불쾌가 

쾌락의 모습을 하고,


미움이 

사랑의 모습을 하고,


고통이

행복의 모습을 하고,

 

그야말로 

제정신 아닌 자를 정복하네.


온갖 고초를 겪으며 살아온 사람이, 말년에 이르러 어떤 행복하거나 만족스러운 일을 맞이하고는 기쁨에 겨워 ‘행복하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 다시 태어나도 같은 삶을 살아가겠다.’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를 종종 만난다. 순간의 만족이나 기쁨, 환희, 쾌락 등이 고통으로 점철된 그의 삶이 준 쓰라림을 송두리째 망각시킨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정신줄’을 놓았기 때문이다. 정신줄을 놓았다는 것은 제정신에서 벗어난[insanity] 상태라는 것이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사띠(sati)를 놓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이 있다. ‘정신줄을 놓은 것’과 ‘망각’을 등치 시키는 것이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망각을 축복의 조건으로 역설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크든 작든 행복을 행복으로 만드는 것은 ‘잊을 수 있다는 것’에 의해 실현된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니체식으로 표현하면,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과 흡사하다.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역사는 사라지고 비역사적인 느낌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느낌에 의해 망각은 행복의 주인이 되고, 따라서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없다는 것이다. 

2년 전쯤, 한 지상파 방송이 방영했던 드라마 ‘그 남자의 기억법’은 니체의 문장,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로 시작된다. 이 드라마는 1년 365일 8760시간을 모두 기억하는 ‘과잉기억증후군’으로 인해 망각 없는 삶을 사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지나간 모든 시각을 기억하는 이 남자에게 망각은 축복이며 저주이다. 

망각이 축복의 조건이라는 말은 매우 그럴듯해 보인다. 과거의 기억에 매여 있는 삶은 모든 것의 기준이 과거가 된다거나, 몸은 현재를 살면서도 마음은 과거에 살고 있는 것이라거나 그것이 좋은 기억이든 아니면 좋지 않은 기억이든 거기에 구속되고 자유롭지 못하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없다는 주장들은 상당한 논리를 갖춘 것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니체도 그의 저서 《반시대적 고찰Ⅱ》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망각이 필요하다.’고 했고, 《도덕의 계보》에서는 망각이 갖는 효용을 상세하게 설명했을 정도이니 논리적으로 들린다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니체는 망각의 효용성을 필요한 것으로 언급했을 뿐, 무조건 찬양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망각과 기억은 건강하고 좋은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라는 점,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망각과 기억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요약하자면 ‘제때 기억할 줄 알아야 하고, 제때 잊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시는 <쿳다까니까야>에 속하는 <우다나- 감흥 어린 시구>의 ‘무짤린다의 품’에 속한 ‘쑵빠와싸의 경(Suppāvāsāsutta)’에 나온다. 

이 시가 설해진 인연은 산고로 큰 고통을 받던 한 여인의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부처님께서 꼴리야 국의 도시인 꾼다나 시 근처에 있는 한 숲에 계실 때, 쑵빠와싸라는 여인이 칠 년 동안이나 임신하고도 칠일 간 산고를 겪는 일이 있었다. 쑵빠와싸는 꼴리야 국의 공주이자 씨왈리(Sivali) 존자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괴롭고 날카롭고 아리고 쓰린 고통을 경험하며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괴로움을 버리도록 가르침을 설하셨다. 훌륭하게 실천하는 부처님의 제자들의 모임은 이와 같은 괴로움을 버리기 위해 수행한다. 최상의 행복은 바로 이와 같은 괴로움이 없는 열반이다.’라는 세 가지 사유를 하면서 견뎠다. 그러던 중 쑵빠와싸는 남편 마할리(Mahali)에게 부처님을 찾아가 예배하고 자신이 처해 있는 소식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쑵빠와싸의 남편으로부터 그녀의 딱한 소식을 들은 부처님은 그 자리에서 “꼴리야 국의 딸 쑵빠와싸는 행복하고 건강하길 바라고 건강한 아이를 낳기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이렇게 말씀하시자마자 쑵빠와싸는 행복하고 건강했고 건강한 아이를 낳았다. 

쑵와바싸의 남편 마할리는 세존의 말씀에 감사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린 후 집으로 돌아가, 아내가 행복하고 건강하고, 건강한 아이를 낳은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그 놀라운 광경에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보, 정말 놀라운 일이오. 이것은 예전에 없던 일이오. 여래께서 커다란 신통과 광대한 능력을 지니셨소.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마자 이 꼴리야 국의 딸 쑵빠와싸가 행복하고 건강해지고 건강한 아이를 낳게 되다니 말이오.”

남편의 말을 전해 들은 쑵빠와싸가 남편에게 다시 부처님을 찾아가 부처님과 수행승의 무리들에게 7일 간 공양을 올릴 것을 청하라고 부탁했다. 부처님은 마침 미리 공양을 초대받았던 목갈라나에게 그 공양을 미루도록 당부하면서까지 그들 부부의 간곡한 공양 요청을 수락했다. 

이렇게 해서 꼬리야 국의 딸 쑵빠와싸는 부처님을 비롯한 수행승의 무리에게 칠일 간, 훌륭하고 단단하고 부드러운 갖가지 음식을 대접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아들을 인사시켰다. 그녀의 아들 씨왈리는 어머니의 몸에서 7년 7일을 머물러 있었기에 태어나자마자 모든 것을 곧바로 할 수 있었기에 대화도 가능했다. 그녀의 아들 씨왈리를 본 싸리뿟따 존자가 물었다. 

“아이야, 너는 잘 지내느냐? 건강하냐? 아픈 데는 없느냐?”

“존자여, 제가 어떻게 잘 지내겠습니까? 제가 어떻게 건강하겠습니까? 칠 년 동안 저는 피의 가마솥 속에서 지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쑵빠와싸는 ‘나의 아들이 가르침의 장군과 함께 대화를 한다.’라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희열과 만족으로 가득 찼다. 마침 부처님께서는 꼴리야 국의 딸 쑵빠와싸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희열과 만족으로 가득 찬 것을 보시고 그녀에게 물었다. 

“쑵빠와싸여, 그대는 이와 같은 다른 아들을 원하는가?”

그러자 그녀가 이렇게 대답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와 같은 다른 아들 일곱 명을 원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순간의 행복과 희열에 휩싸여 지난 7년 동안의 고통을 까맣게 잊은 그녀의 마음 상태를 헤아려, 위와 같은 감흥 어린 시구를 읊으신 것이다. 

   

이 시는 궁극적으로 달콤하지 않고, 사랑스럽지 않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지만 전체 윤회와 관련된 형성에서 생겨난 포기되지 않은 전도(顚倒), 이치에 맞지 않는 정신활동 때문에 원하는 것처럼, 사랑스러운 것처럼, 축복된 것처럼 변하여 접근하면서 사띠, 즉 알아차림을 잃어버린 사람을 공격하고 정복하고 삼켜버린다는 것을 노래한 것이다. 쑵빠와싸도 이와 같이 일곱 번이나 달콤하지 않고, 사랑스럽지 않고, 고통스러운 것이 달콤하고 사랑스럽고 축복인 것 같은 모습을 한, 아이로 상징되는 축복에 정복당한 셈이다.


- 시구 ‘제정신이 아닌’은 사띠를 놓쳐 번뇌망상에 휩싸인, 즉 방일한 마음상태를 말한다. 수행자들에게 한 번 사띠를 놓치는 것은 열반의 기회를 한 번 놓치는 것으로 간주될 만큼 수행자에게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된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는 ‘늘 깨어 있는 삶’은 열반을 성취하게 하고, 윤회의 쓰라린 고통에서 해탈하게 하는 길이므로, 모든 수행자들이 지향하는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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