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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진실을 전달하는가 왜곡하는가

염정우 기자 | bind1206@naver.com | 2023-11-13 (월)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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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밝은사람들 학술연찬회”가 『언어, 진실을 전달하는가 왜곡하는가(밝은사람들총서 18)』를 대상 도서로 불기2567(2023)년 11월 18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개최된다. 


안국선원 후원, 도서출판 운주사 협찬으로 개최되는 이번 학술연찬회에서는 한자경 교수 (이화여자대학교)를 좌장으로 <언어, 깨달음으로 가는 길 (한상희 교수, 경북대)>, <은유로 나타나는 세계 (김성철 교수, 금강대)>, <불립문자와 불리문자의 이중주 (김방룡 교수, 충남대)>,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로서의 인간 (박찬국 교수, 서울대)>, <말과 마음의 관계 (권석만 명예교수, 서울대)>를 각각 발표한다.



 

편집자 서문(한자경 이화여대 교수)


이 책은 세계의 존재 및 그에 대한 인식의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있는 언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언어가 과연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유용한 도구인지, 아니면 오히려 진실을 가리고 왜곡하는 불편한 도구인지를 밝혀보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언어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다섯 분야를 골라서 다섯 분의 전문가에게 언어에 관한 논의를 부탁드렸다. 초기불교(한상희), 대승불교(김성철), 선불교(김방룡), 서양철학(박찬국), 심리학(권석만) 다섯 분야의 전문가의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보았다.  


   ▲초기불교의 언어관은 한상희의 <언어,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서 살펴볼 수 있다. 언어를 절대시하던 정통 바라문 사상과 달리 붓다는 언어를 조건, 즉 합의나 관습 등에 의해 만들어지는 일종의 사회적 산물로 간주하며, 따라서 존재와 명칭 간의 자연적이고 절대적인 일대일 대응을 부정한다. 붓다에 따르면 언어는 인식의 전개과정 상에서 일어나는 개념의 확산(papañca)인 희론이며, 그럼에도 그 희론이 다시 인간의 사유와 삶을 규정하는 순환을 보인다. 한상희는 그 안에서 우리가 행해야 할 바람직한 언어생활이 무엇인지를 붓다의 설법과 제자들의 설법 듣기 및 깨달음으로 다가가는 언어의 실천적 사용을 통해 제시한다. 그러면서 그는 언어가 진실을 가리는 면이 있어도 궁극적 진실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수단은 역시 언어라는 것을 강조한다.

   ▲김성철은 <은유로 나타나는 세계>라는 제목 하에 대승불교의 언어관을 논한다. 그는 우선 인도 정통 언어철학자 바르트리하리의 언어관, 즉 언어의 지시대상이 은유적 실재라는 관점을 설명하며, 그것이 유가행파 안혜의 은유론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김성철은 『유가사지론』 「보살지, 진실의품」에서는 언어적 분별이 사(事)를 산출함을 논하되 중관의 손감견과 달리 그러한 언어 표현의 기반으로서 언어적 분별 너머 불가언설의 궁극적 실재가 있음을 인정한다고 밝히고, 이어 세친의 『유식30송』의 제1게송에 대한 안혜의 주석에서 안혜가 일체의 언어적 분별 및 표현의 기반으로 식의 전변(轉變)을 논한다고 밝힌다. 유식에서 일체의 언어적 표현을 은유라고 칭하는 것은 그러한 언어에 의해 지칭된 사물이 아뢰야식 내 함장된 명언종자의 현현이며, 따라서 아뢰야식의 전변활동을 떠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유가 아니라 식의 현현으로 드러나는 가유이기 때문이다. 언어적 분별은 분별로써 가유를 형성함으로써 실재를 은폐하는 성격을 갖지만, 그럼에도 그런 분별과 가유의 실상을 여실지견하기 위해 언어에 대한 통찰이 요구된다는 언어의 이중성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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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불교 분야에서의 언어관에 대해서는 김방룡이 <불립문자와 불리문자의 이중주>라는 제목의 글에서 논하고 있다. 경‧율‧론 3장(藏)에 기반한 교종과 달리 선종은 처음부터 ‘교외별전, 불립문자’를 내세우며 언어적 차원을 넘어선 ‘이심전심(以心傳心)’에 의한 본성의 깨달음을 강조하였다. 김방룡은 붓다와 가섭 간의 염화미소를 출발점으로 삼은 중국의 선불교가 마조 이후 ‘조사선’에서 조사와 제자 간의 언어적 선문답이 중시되었어도, 이때 언어는 즉심즉불의 본래면목을 직지하는 ‘직지인심’의 방편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라고 논한다. 그러다가 당말과 오대를 거쳐 북송에 이르면 선사들의 수많은 어록과 등록이 등장하여 언어로써 선의 세계를 표현하는 요로설선(繞路說禪)의 ‘문자선’이 유행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그는 이 과정을 문자를 세우지 않는 ‘불립문자’에서 문자를 떠나지 않는 ‘불리문자(不離文字)’로의 전환이라고 설명한다. 그러한 문자선의 유행을 따라 불립문자의 정신이 흐려지고 언어적 사량분별로 치우치게 됨을 경계하고자 북송 말 대혜 종고는 간화선(看話禪)의 수행법을 제시하였다. 간화선은 선문답의 공안인 화두를 의심을 일으키는 수단(방편)으로 사용하여 수행자로 하여금 의정(疑情)과 의단(疑團)을 일으켜 스스로 사유 내지 언어의 한계인 은산철벽에 맞딱뜨려 그 무명의 철벽을 타파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김방룡은 이와 같은 대혜의 간화선을 문자선의 ‘불리문자’에서 다시금 선종 본래의 ‘불립문자’로 재전환시키는 수행법이라고 평가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선불교의 언어관을 ‘불립문자와 불리문자의 이중주’라고 표현한다.  

   ▲언어는 동양 내지 불교철학에서뿐 아니라 서양철학에서도 존재와 인식을 논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주제 중의 하나이다. 서양철학의 언어관을 소개하기 위해 박찬국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이라는 제목 하에 서양 고대와 중세 및 근대와 현대의 언어관을 총괄적으로 정리한다. 그는 고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관을 언어가 객관적 실재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실재론적 언어관’이라고 부르며, 이를 언어가 인간의 주관적 표상의 반영일 뿐이라고 보는 중세의 ‘유명론적 관점’이나 근세의 ‘경험론적 관점’과 대비시킨다. 나아가 박찬국은 이들의 재현주의적 관점을 넘어서는 현대철학에서의 ‘언어적 전회’를 강조하는데, 이를 헤르더와 훔볼트와 카시러 그리고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과 데리다를 통해 해명하고 있다. 그들의 ‘언어적 전회’에 따르면, 언어는 더 이상 객관 실재의 반영도, 주관적 표상의 반영도 아니고 오히려 세계를 구성하는 능동적 틀이며, 인간은 그러한 언어에 의해 구성된 세계 속에 살면서 그 언어적 질서를 따라 생각하고 행동한다.

   ▲권석만은 <말과 마음의 관계: 언어가 삶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중심으로>에서 심리학 분야에서 언어가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를 논한다. 그는 우선 인간이 영아기와 유아기와 아동기를 거치면서 어떤 방식으로 언어를 습득하게 되는지를 밝히고, 그러한 언어습득 과정에 대한 학습론자와 생득론자의 입장 차이 및 그들을 종합하는 상호작용이론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리고 언어발달상의 장애의 예로 의사소통장애, 특정학습장애, 자폐스펙트럼장애 등을 제시한다. 그는 언어와 사고가 서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언어가 한편으로는 인간 상호간의 의사소통 수단으로서 인간의 환경 적응 및 생존에 기여하는 바가 크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사고와 삶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말하자면 언어가 일체를 명사화하고 실체화함에 따라 인간의 사고가 ‘인지적 융합’에 빠져 실상을 간과하기도 하고, 언어의 이분법적 개념틀을 따라 흑백논리적 사고에 치우쳐 중도적 사유능력을 상실하기도 하며, 언어적 권위에 굴복하며 심리적 경직성에 빠져버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는 유용한 도구이면서 동시에 위험한 도구이기도 한 양날의 칼과 같으니, 문제는 언어를 사용하되 언어의 속박에 걸려들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의 함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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