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담바라 핀 청계사(1)

                                                   수원사람  김성채 객원기자

반백 년 살았을 때, 청계사를 다녀왔습니다. 그로부터 세월이 23년이 지난 지금은 “청계사”라는 절 이름과 “우담바라”라는 단어만 기억에 남았습니다. 

당시 ‘3000년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가 청계사에 피었다’는 기사가 온갖 매스컴에 도배되었습니다. 수많은 방문객이 모여들었고, 저도 이때를 놓치면 자칫 못 볼세라, 긴 줄 끝에서 차례를 기다려 우담바라를 보았습니다.

불제자는 당연하고, 그도 저도 아닌 대중들까지 청계산 청계사를 방문하게 한 우담바라는 어떤 의미를 지녔기에 세상이 들썩들썩했을까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반열반하시기 바로 전. 제자들을 향해 “계행 가짐을 항상 삼가라. 마침내 정각을 얻어 나와 같이 무너지지 아니하는 몸을 얻어 삼십이상과 팔십종호를 구족하게 하라. 진실로 불타가 출세함이 우담바라화와 같으니 가장 희유하여 만나기 어려운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담바라 꽃을 보는 것이 상당히 드문 일이니, 신심을 깊게 하고 인욕 하면서 깨달음을 얻으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새기면서 23년 전에 나는 어떠했고, 지금은 어떤지를 자신에게 물어보며 비탈길을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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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이 있을 자리에 놓인 푯돌 “우담바라 핀 청계사”
 

청계사를 찾은 날이 평일이고, 단풍은 아직 때가 이른 탓에 산행 인파가 적었습니다. 그 덕택에 언덕길을 오르며 주변 풍광을 한가롭게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산 중턱까지 집과 카페가 들어찼지만 돌아볼라치면 낮은 산이 내려다보여서, 제법 높고도 깊은 곳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1795년, 정조 임금이 모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수원에서 베풀었습니다. 그때 혜경궁의 외가 쪽 조카가 회갑연에 참석하고 돌아갈 때까지의 과정을 <화성일기>라는 기행문으로 남겼습니다. 그 일기에는 글쓴이가 돌아가는 날, 밤이 늦어져 판교 쪽으로 산길을 재촉하며 걷다가 ‘눈빛이 등잔만 하게 불을 번득이는 큰 범과 맞닥뜨렸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근처 멀지 않은 곳에 판교 IC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글쓴이가 호랑이와 마주친 계곡이 이 근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바세계의 번뇌를 씻어내는 문

청계사에는 ‘오직 한마음으로 정진하라’는 뜻이 담긴 일주문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일주문에는 통상 절의 격 또는 위치를 나타내는 명칭과 이름을 쓴 현판을 걸어놓습니다. 청계사는 일주문 대신 절 입구에 “우담바라 핀 청계사”를 새긴 큰 푯돌을 놓았습니다. 

선혜 비구가 사과(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선혜 비구는 연등불에게 공양할 꽃을 찾던 중, 비구니 선녀가 우담바라를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생에 부부의 인연을 맺기로 약속하고 꽃을 얻게 됩니다. 선혜 비구는 그 꽃을 연등불께 공양하고, 다음 생에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게 됩니다. 선혜 비구는 삼계의 중생을 제도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신이고, 비구니 선녀는 야소다라부인의 전신입니다. 

일주문을 세우지 않고 큰 암석에 ‘우담바라 핀’을 새긴 뜻은 우담바라가 피어난 절임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나 귀한 꽃을 보는 희귀한 인연에 연연하지 말고, 이곳에서 세속의 번뇌를 씻고 들어오라는 의미를 지녔다고 생각합니다.

번뇌가 사라지면 문짝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어

일주문이 보이지 않았듯 천왕문도 보이지 않습니다. 

통상 많은 절이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을 가는 길목에 사천왕문을 세우고, 나무로 크게 조각한 사천왕상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청계사가 천왕문을 두지 않은 것은 비바람을 맞아도 썩지 않는 돌로 조성한 때문일까요? 아니면 하늘은 좌우상하가 모두 막힘이 없이 통하는 공간이기 때문일까요? 

번뇌가 있는 사람은 문짝이 없어도 사방팔방 어디에나 걸릴 터이고, 번뇌가 없는 사람은 사방팔방에 문짝이 제아무리 많아도 거리낌이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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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다문천왕, 지국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
 

수미산 중턱에서 멀리 떨어진 동·서·남·북쪽 산꼭대기에 살고 있던 지국천왕, 광목천왕, 증장천왕, 다문천왕은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수호하는 신이 되었습니다. 

사천왕은 부처님께 ‘권속과 함께 불제자들이 질병의 고통을 멀리 여의고 몸이 편안하고 즐거움을 받게 하겠다.’고 서약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너희들은 부지런히 보호하여, 좋지 못한 것은 없애 주고 편안케 해주어야 한다.’고 당부하셨지요. 때문에 사천왕과 권속들은 세간의 선악을 살피며, 불제자들을 괴롭히는 마군을 물리쳐주는 고마움을 베풀어 줍니다. 이를 알기에 불제자들은 천왕문을 드나들 때마다 합장하고 배례합니다. 

삼천대천세계 모두를 보여주는 설법전

사천왕상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만세루”가 있습니다. 만세루의 “세(歲)”자를 나이를 헤아리는 숫자로 치면 만년을 살아갈 집이 되고, “대(代)”를 뜻하는 세대(世代)로 헤아리면 삼십만 년을 살아갈 집입니다. 그렇게 오래오래 남았으면 하는 집은 어떤 집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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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루
 

만세루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래가기를 원하는 의미를 담은 누각입니다. 2층 집(한옥에서 “중층”) 만세루의 기둥만 있는 아래층을 통해 계단 끝에 올라서서 돌아보면 “설법전”이란 현판이 걸렸습니다. 설법전은 위층에만 붙여진 이름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주는 곳입니다. 내부도 보고 싶고, 누각에서 바깥 경치를 둘러보는 흥취를 느끼고 싶었지만, 법문이 한창 진행 중이어서 안으로 감히 들어서지를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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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전
 

부처님께서는 사부대중의 이해를 높이고 집중시키기 위해 법문하는 자리에 연화장세계를 펼쳐내기도 하시고, 어떤 때는 극락세계 또 어떤 때에는 지옥세계를 보여주기도 하셨습니다. 설법전은 어느 때 어떤 법문이 설해지느냐에 따라서 도리천궁이 되고, 도솔천궁이 되고, 마가다국 적멸도량도 되고, 기수급고독원이 되기도 합니다. 설법전은 사바세계의 작은 짜투리 땅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는 변화무쌍한 세계입니다.

부도밭

설법전의 오른쪽에는 부도밭이 있는데, 맨 앞에는 큰 오석으로 사적비를 세웠습니다.

사적비에는 ‘일심 청정하면 법계 청정이라, 한마음 청정함과 청풍을 세상에 펼쳐 지표를 삼는 전기를 경허 대선사의 출가 사찰인 이곳 청계사에서 시작한다. 우담바라는 깨달음과 해탈의 인연이 닿는 곳에 비로소 모습을 보이니 청계사가 선(禪) 중흥의 몫을 넉넉히 감당할 서상(瑞像)이요. 경허, 만공, 금오, 월산의 찬연한 선맥(禪脈)의 정통이 면면함을 증명케 한 일이었다. 신령함과 서기가 가득한 청계사로부터 근대 선의 장강(長江)이 시작되었으니, 대선사들의 위업을 계승하고 선 중흥을 열고자 비를 세운다’는 내용을 시작으로 청계사의 역사가 빽빽하게 새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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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경허스님, 만공스님 순으로 놓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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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가르침의 맥을 이어가는 기둥’으로 시작하는 경허스님의 탑비.
 

사적비 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경허, 만공, 보월, 금오, 월산 선사 순으로 부도와 탑비가 세워졌습니다. 경허선사의 탑비는 “전불심인 부종수교 조계사조 경허당 성우 대종사(傳佛心印 扶宗樹敎 曹溪嗣祖 鏡虛堂 惺牛 大宗師)”를 씀으로써, 경허 스님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대대로 이어가게 하는 역할을 해내셨음을 밝혀놓았습니다.

부도와 탑비는 우리나라 선맥(禪脈)이 경허 스님의 제자, 제자의 제자로 이어지고 있음과 스님들의 생애와 행적 그리고 청계사에서 훌륭한 스님들이 계셨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많은 전통사찰이 산을 계단식으로 깎아 절터를 마련하였는데, 청계사도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 ‘삼천 대천 세계에서 제일 큰 산인 수미산왕만한 칠보들을 가지고 널리 보시하는 것이, 남에게 금강경의 한 게송을 설해 주는 복덕을 따라오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수미산은 이 세계에서 가장 큰 산입니다. 그렇게 큰 산 수미산을 청계산으로 옮겨놓고 청계사를 지었습니다.

온 세계의 중심

청계사 부처님을 뵙기 위해 산길을 올라와 “우담바라 핀 청계사”라 쓰인 푯돌에서 세계의 중심, 수미산이 시작됩니다. 이곳을 넘으면서 부처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아래쪽은 중생이 살아가는 사바세계입니다. 

산을 오르는 비탈을 깎아 논밭을 만든 다랑이처럼 위로 오를 때마다 다른 세계가 펼쳐집니다. 수미산 자락인 푯돌을 지나 위쪽으로 올라서 수미산 중턱쯤이 사천왕천인데, 사천왕이 보이지 않는 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더 오른 곳이 만세루인데, 그곳은 사부대중이 모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배움이 이루어지는 세계입니다. 

이처럼 수미산을 오르면서 만나는 터는 또 다른 세계인 것처럼, 가람 배치는 또 다른 세계가 이렇듯 펼쳐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계가 뭐 이렇게 많으냐’고 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을 만나고, 다른 일이 벌어지는 자체가 다른 세계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소천세계이고, 중천세계나 삼천대천세계도 이곳에서 몇 걸음 걸으면 닿는 세계라 생각합니다. 

만세루를 지난 곳에 만들어진 마당은 또 다른 세계입니다. 

그 마당에는 또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계단이 있는데, 계단 옆에는 눈을 부라린 금강역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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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역사는 탑과 사찰의 문을 지키는 수문신(守門神)으로, 금강 같은 단단한 지혜로 망상의 악마를 항복시키는 금강저를 지녔습니다. 코끼리보다 백만 배나 힘이 세다는 것을 자랑하듯 울퉁불퉁한 근육을 뽐내며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힘이 센 금강역사도 ‘내가 세계의 땅덩이를 들고 네 개의 큰 바닷물을 단숨에 마셔 없앨 수 있어도, 부처님 공덕을 모두 찬탄하지는 못한다.’라 말했습니다. 그런데 금강역사의 모습은 금강저를 들고 악마를 굴복시키는 점잖고 위엄찬 모습이 아니라, 아이들이 즐겨 보는 만화의 주인공 같아서 보는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주려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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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마당 귀퉁이에 쓰임새를 잃어버린 채, 버림받고 팽개쳐진 주춧돌이 눈에 띄었습니다. 사각형의 초면에 원형의 주좌 지름이 1m 정도나 되어 상당히 굵은 기둥을 받쳤던 주춧돌임을 가늠하였고, 예전에 큰 법당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사적비에 ‘통일신라 말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충렬왕 때 조인규가 막대한 사재를 들여 중창이 이루어졌다. 조선 연산군이 도성 내의 사찰에 대한 폐쇄령을 내렸을 때 봉은사를 대신하여 선종 본찰의 기능을 담당하는 정법호지 도량이 되었다. 고종 때 큰 화재로 수십 칸이 소실된 것을 은곡 스님이 중건했다.’등이 쓰였습니다. 이런저런 것을 짐작하면 청계사가 이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큰 규모였고, 법당도 더 큰 법당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