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산 사람인가, 죽은 사람인가?

                                                              정찬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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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정윤경 

낮과 밤이 교차하는 일몰의 시간. 소용돌이치며 거쳐야 하는 여울목 같은 공간. 석양빛이 스러진 이불재 안팎의 유무정물(有無情物)에서 가을의 전언(傳言)을 듣는다. 포기하지 않고 뒤척이는 낙엽은 낙엽대로, 흥부 자식처럼 대책 없이 주렁주렁 매달린 감은 감대로, 붉게 지쳐가는 단풍은 단풍대로, 시린 개천에서 서성이는 산 그림자는 산 그림자대로, 빈혈 환자처럼 누렇게 야위어가는 풀잎은 풀잎대로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가을의 전언을 듣고 새기기 전에 석양은 야속하게 지고 말 터. 어둠이 스멀거리기 시작하면 나같이 아둔한 사람에게는 어느새 그 유무정들의 말은 자연의 비의(秘意)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연이 마침내 거룩하고 불가사의하다고 과장해서 말해왔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명명백백한 것은 자연이 인간과 달리 내 앞에서 스스로를 단 한 번도 숨긴 적이 없다는 점이다. 송두리째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사실이다. 진실과 아름다움의 충분조건이 있다면 바로 그런 투명함이겠지 하는 생각도 든다. 부처와 조사, 선사들의 깨달은 생이란 그런 투명함과 선명함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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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보성문협의 가을문학기행 일환으로 보성 차밭 입구에 있는 '정찬주 문학공원' 앞에서 <정찬주 작가와 함께 하는 '차꽃 시-문회> 행사를 했다. 나는 간단한 인사말만 하려고 가볍게 생각했다가 위승환 회장이 후배 문인들을 위해 금과옥조 같은 한 말씀을 부탁하기에 새벽에 부랴부랴 인사말 원고를 작성했다. 요지는 중간 부분에 넣었다. 그 부분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저는 스스로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등단한 지 40여 년이 넘은 작가입니다. 자랑할 만한 얘기는 아닙니다만 70을 넘긴 나이까지 매년 한두 권씩 소설책이나 산문집을 발간해와 지금은 1백여 권이 넘습니다. 작가로서 미련할 정도로 책을 내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글쓰기를 1백 미터 단거리경주가 아니라 마라톤경주라고 생각하자, 상업적인 이익을 탐하지 않고 나와 이웃에 도움을 주는 글을 쓰자는 것이 나의 초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는 30여 년 동안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를 주간 단위로 단 한 번도 놓아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선후배들은 저보고 언제 글을 써서 책을 냈느냐, 혹시 자판기가 아니냐고 하지만 사실은 연재를 꾸준히 해왔기에 저서의 권수가 많아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굳이 비법이 있다면 거친 권투경기처럼 횟수가 정해진 연재였던 것입니다. 저는 농담 삼아 후배들에게 글을 쓰지 않으면 전(前)자를 붙여야 한다고 조크를 합니다. 시인이 시를 발표하지 않으면 전 시인, 소설가가 소설을 발표하지 않으면 전 소설가라는 식입니다.(중략)

글을 쓰는 중노동은 자신과 사회 및 역사를 성찰하는 것이고, 성찰한다는 의미는 깨어 있는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대로 생각 없이 사는 게 아니라, 제 방식대로 주체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산다는 것입니다.

장성 백양사에 갔을 때 서옹 방장스님께서 저에게 살아도 죽은 사람이 있고, 죽어도 산 사람이 있다고 덕담을 해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제가 산 사람인지 죽은 사람인지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론은 주어진 신산한 현실에서 때로는 고집을 부리며 저답게 살려고 조금은 힘겹게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원로(元老)작가라는 말을 심심찮게 듣는 나이가 됐지만 아직은 갈 길이 먼 원로(遠路)작가가 아닐까 싶다.

화환을 보내준 박주선 전 국회부의장, 동국대 윤재웅 총장이 새삼 고맙다. 거대한 침묵 같은 내 문학비에 창작의 불꽃 같은 꽃이 활활 피어 있는 것 같아서이다. 보성문협을 이끌어가고 있는 전 회장 이남섭 시인님과 현 회장 위승환 동화작가에 대한 나의 고마움은 변함이 없을뿐더러 신뢰와 우정은 두말할 것이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