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나를 알고자 한다면

                                                      정찬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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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정윤경

제주도 표선으로 귀농해서 시를 쓰는, 한때 암과 불편한 동거도 했던 정희성 시인의 시집 <중섭아재처럼>에 실린 '태평가'를 소개합니다.

풀을 벤 저녁에는 털게처럼 웅크리고 잤다

바람이 들었는지 쇄골이 서늘했다.

풀들은 꼿꼿했고 잠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새벽이면 생인손이 아렸고

손마디가 쓰르라미 날개처럼

떨렸다

내 푸석한 잠은 외롭고

풀을 벤 저녁에는

골바람이 따라 눕는 소리에도

뒤척였다

설핏한 꿈마저 자꾸

바스러졌다.

제목을 '태평가'라고 한 것은 반어법인 듯합니다. 실존의 절규를 짐짓 딴청을 피우듯 거꾸로 내민 말입니다. 화가 이중섭이 시인 정희성으로 환생한 것 같습니다. 정 시인은 동국대 국문과 동문으로서 제가 사랑하는 아우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시집을 구매해서 이불재 손님들에게 선착순으로 나누어주는 일은 유쾌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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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가 쏟아지는 오후 5시 30분쯤의 이불재 입구 풍경이다. 빛의 변화를 중시하는 인상주의 화가인 폴 세잔, 내가 사춘기 시절 그의 그림을 모방해 그리곤 했던 빈센트 반 고흐, 클로드 모네의 그림 같다. 

장대비가 그리고 있는 풍경이 한때 화가가 되려 했던 어린 시절을 소환하고 있다. 대학에 진학할 무렵 나는 화가의 길을 포기하고 작가의 길을 선택하고 말았다. 이것 또한 운명인 듯하다.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결과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지금의 나를 알고자 한다면 과거에 내가 무엇을 했는지를 보면 되고, 미래의 나를 알고자 한다면 오늘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보면 안다고 하는 <법화경>의 한 구절이 문득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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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축제 기간인 지난 8월 11일 오후 6시에 만해마을 강당에서 장편소설 <아소까대왕>(전3권)으로 유심작품상을 수상했는데, 오늘 광주에 홀로 계셨던 어머니를 이불재에서 모시고자 아내와 함께 전입신고하러 면사무소에 들렀다가 수상 축하 현수막을 보았다. 현수막이 하나만 걸려 있는 게 아니라 면사무소 건물 앞뒤는 물론 면소재지 초입에도 걸려 있다고 한다. 

시상식이 보름 이상이 지났는데, 아직도 걸려 있는 것이 마음에 부담으로 다가오지만 호의는 호의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참으로 고마워서 노삼숙 면장님을 찾아가서 감사를 드렸다. 면장님 제안으로 이양면 번영회와 이장단 이름으로 수상축하 현수막을 만들었는데, 면장님은 나를 보면서 '작가님은 화순군의 자랑입니다' 하고 순하게 웃으며 기뻐하니 글 한 줄이라도 더 정성을 들여 써야겠다는 서늘함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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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독자분이 문자로 옥잠화 사진을 보내면서 '화순 너릿재 옛길 옥잠화입니다. 아침 일찍 산책하다 보면 옥잠화 향기가 너무 향기롭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진각국사 혜심의 <인월대>란 시를 소개하며 인월대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우뚝 솟은 바위산은 몇 길인지 알 수 없고

그 위 높다란 누대는 하늘 끝에 닿아 있네

북두로 길은 은하수로 밤차를 달이니

차 연기는 싸늘하게 달 속 계수나무를 감싸네.

그래서 나는 "인월대가 월남사에 있었다고 전해지며 인월암은 송광사 산내암자입니다."라고 답변했다. 그리고 <인월대>가 "중국의 시성 이백의 상상력을 넘어선 우주를 희롱하는 대자유인의 멋드러진 시입니다."라는 촌평을 보냈다. 이에 "네. 월출산을 배경으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하고 답장의 문자가 왔다. 더불어 다음과 같은 추신을 달았다.

'최근 <서른부터 다가온 반야심경의 행복>을 읽는데 뜻을 해석하느라고 애를 먹었습니다. 오늘 다시 선생님의 책을 느리게 읽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마당 불단석에 피어 있는 옥잠화를 사진 찍어서 그 독자에게 보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음력으로 7월 15일 백중, 선방 해제 날이다. 선방 스님들이 옥잠화를 왜 해탈꽃이라고 부르는지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