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학종
2023-09-15 (금) 07:53어떠한 사제이든지
악한 원리를 제거하고
훔훔 거리지 않고
떫음을 여의고
자제하고,
지혜에 통달하고
청정한 삶을 성취한 자,
세상에서 융기가 결코 없는 자라면,
이치에 맞게 하느님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하리.
-전재성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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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미디어붓다)
이 시는 <쿳다까니까야> ‘우나다(Udāna)-감흥 어린 시구’의 첫 번째 ‘깨달음의 품’ 1-4. 니그로다의 경(Nigrodhasutta)에 나온다.
이 시를 해석하기에 앞서 먼저 ‘우다나’에 대해 알아보자. 우다나는 경율론 삼장의 대장경 가운데 경장에 속하는 경전으로 경전 가운데에서도 <쿳다까니까야>라는 소부경전에 속한다. <쿳다까니까야>는 열다섯 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숫타니파타, 담마파다, 자타까, 우다나, 이띠붓따까 등이 여기에 속한다.
우다나는 부처님의 궁극적 깨달음과 열반에 대한 감흥 어린 시구와 그 인연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다나는 북전 한역장경에는 없는데, 대신에 한역경전 가운데 아함경, 불본행집경, 방광대장엄경, 수행본기경, 찬집백우경 등에 흩어져 나타나고 있다. 우다나라는 제목은 어원적으로 ‘숨을 내쉬다, 발언하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인데,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감흥 어린 발언, 또는 환희로운 앎에 기초한 시구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우다나의 주석을 쓴 담마빨라는 ‘강한 기쁨의 진동으로 터져 나오는 발음’이라고 해석했다.
이 시는 부처님께서 우루웰라의 네란자라 강 언덕 아자빨라니그로다 나무 아래에서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얻고 가부좌를 하고 앉아 해탈의 지복을 경험하고 있을 때 마침 훔훔 거리는 한 브라만이 가까이 다가와서 인사하고 안부를 여쭙는 데서 비롯되었다.
안부 인사를 마친 브라만이 부처님께 물었다.
“벗이여 고따마여, 어떻게 브라만이 되며, 어떠한 성품이 브라만을 만드는 것입니까?”
부처님은 질문을 하는 이 브라만의 뜻을 헤아려, 때맞춰 위와 같은 감흥 어린 시구를 읊으신 것이다.
시어 중에서 ‘사제’와 ‘하느님’은 공히 브라만을 의미한다. 훔훔 거린다는 시어는 오만하고 성내는 기질이 농후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흥, 흥’하면서 비난하여 말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브라만은 자신의 긍지를 나타내기 위해 흥 또는 훔(hum)이라는 소리를 내는 자이다. 반면 부처님은 훔훔하고 말하는 것을 여읜 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부처님은 훔훔 거리는 것을 삼가라고 하셨는데, 후대 대승불교에서 진언이나 주문 등을 받아들여 훔의 반복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는 점이다. 예컨대 관세음보살 육자대명왕진언 ‘옴마니반메훔’에서 훔을 ‘번뇌와 망상이 사라진 청정의 세계’로 해석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부처님께서 볼썽사나운 브라만을 빗대어 말씀하신 ‘훔, 훔’이 대승불교에 와서는 정반대로 받아들여진 셈이다. 시어 ‘떫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떫음을 뜻한다. 시어 ‘자제’는 계행의 수호를 통해서 마음이 제어되는 것을 말한다. ‘지혜에 통달’했다는 시구는 네 가지 흐름, 즉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도에 들어 성자의 경지를 성취함으로써 번뇌를 종식시킨 자를 나타낸 것이다. 청정한 삶을 성취했다는 것은 길(팔정도)의 청정한 삶을 이루었다는 것이고, 다섯 가지 융기는 탐욕(rāga)의 융기, 성냄(dosa)의 융기, 어리석음(moha)의 융기, 자만(māna)의 융기, 견해(diṭṭi)의 융기를 의미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탐·진·치 삼독심으로 대표되는 번뇌를 소멸하지 못하면 중생, 즉 재생의 고리를 결코 끊지 못한다. 부처님은 삼독심과 함께 자만(māna)을 끊지 못하면 또한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가르치셨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자만의 특징은 오만함이다. 거들먹거리고 의기양양하여 허파에 바람이 든 사람처럼 치솟아 고개를 치켜드는 게 특징이다. 자만의 역할은 건방짐이고, 그 나타남은 허영심이고, 그 가까운 원인은 사견과 결합되지 않은 탐욕이다. 자만의 매듭에 걸리면 존재에 집착한다. 자만을 철저하게 알지 못하게 되어 다시 태어난[再有]다.
견해(diṭṭi), 즉 삿된 견해는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보시, 희사, 공양의 공덕이 없다는 견해, 업의 과보가 없다는 견해, 금생도 내생도 없다는 견해, 부모 공양의 공덕이 없다는 견해, 이 세상과 저세상을 스스로 수승한 지혜로 알고 드러내는 바르고 바른 도를 지닌 사문·브라만이 세상에 없다는 견해 등이다. 다시 말해 업과 업의 과보, 생사윤회의 세계(삼계), 생사윤회의 세계를 알고 볼 수 있는 성자를 부정하는 견해이다.
이 시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시에 등장하는 사제, 즉 브라만은 외도(外道)가 아니라 정법을 실천하여 ‘네 가지 흐름에 든 수행자’를 가리킨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