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
2023-08-23 (수) 07:42자비와 참회는 동전의 앞뒷면이다
정찬주(소설가)
삽화 정윤경
나로서는 처음 보는 새가 현관 바닥에 10여 분쯤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날아갔다. 새의 크기는 아내가 산책할 때 신는 운동화 한 짝의 반만하다. 딱새나 박새보다는 크고 물까치보다는 작다. 아내가 새를 처음 발견하고는 걱정했지만 나는 새가 두 다리로 버티고 있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현관 유리창에 비친 소나무를 보고 날아들었다가 부딪쳐 그러고 있지만 곧 정신을 차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직박구리나 물까치가 전에도 여러 번 현관 유리창에 충돌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마당의 소나무가 실상이라면 현관 유리창에 어린 소나무는 허상일 것이다. 실상의 소나무를 보고 날아든 새는 살고, 허상의 소나무를 보고 날아든 새는 그 반대일 경우가 많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오온개공(五蘊皆空). 보고, 느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실제로는 다 공(空)한데, 허상에 혹은 그림자에 집착하고 휘둘려 살아서야 되겠는가.
그런데 나는 지금 날개 빛깔이 아름다운 새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새의 이름을 안다면 죽음의 문턱까지 왔다가 살아난 기특한 녀석을 더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다. 스스로의 힘으로 정신을 차린 녀석의 생을 축복해 주고 싶다. 잠시 후 지인의 응답이 왔는데, '무명새'라고 한다. 물총새의 사촌 같은 느낌의 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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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재에서 뿌리째 캔 뒤 쌍봉사 연못에 심은 수련꽃이 피고 지고 있다. 큰 대접만 한 홍련꽃이 작은 수련꽃을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다. 미녀는 잠이 많다고 하던가. 정오를 넘긴 수련꽃은 벌써 대부분 꽃잎을 오므리고 있다. 그래서 수련의 수자는 물 수(水) 자가 아니라 졸음 수(睡) 자를 쓰는 모양이다. 수련(睡蓮), '잠이 많은 연꽃'이다.
연꽃을 보면 늘 생각나는 초기경전 <숫타니파타>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법정 스님께서는 위의 세 구절에 팔만대장경의 뜻이 다 들어 있다고 내게 편지를 보내신 적이 있다. 나이 들어 늙으면서 생각해 보니 참으로 지당하고 고구정녕(苦口丁寧)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苦口丁寧-배려가 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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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화백에게서 그림 한 점을 선물받았다. 쌍봉사 철감선사 사리탑 좌우에 나와 아내가 들어가 있는, 탱화 기법으로 그린 족자 형태의 작품이다.
우리는 점심을 하러 장흥군 장평면의 한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내가 식사비를 냈고, 운전은 이 화백과 형제 같은 이건용 불화가가 해주었다. 이 화백은 일전에 내가 준 <서른부터 다가온 반야심경의 행복>을 6권이나 구입해 와서 서명을 받기도 했다. 책을 선물 받으면 더러는 이 화백처럼 그 책을 구입해 서명을 받아 가는데, 솔직히 나는 그런 사람에게 정을 더 느낀다. 그와 같은 선한 반응이 파문처럼 멀리 퍼지어 마침내 어려운 출판사나 작가에게 적잖은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구매는커녕 한 마디 촌평에도 인색한, 즉 피드백이 없는 무심한 사람은 왠지 얌체 같아서 관계가 시들해지고 만다.
식사 후, 식당 앞의 카페에 앉자마자 이 화백이 뜬금없이 고백을 한다. "형님, 저를 부처님 마음으로 산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죄가 많은 사람입니다."
세 가지 허물의 일화를 들려주었는데, 그중에 한 가지가 뇌리에 깊이 박힐 것 같다. 고1 때 가출하여 시각장애인 부부가 사는 집에서 두 달 동안 자취를 한 뒤, 월세를 떼먹고 도망쳐버렸다는 것. 시각장애인 아내가 해준 따뜻한 밥을 가끔 먹기도 했는데, 철없이 배은망덕한 짓을 해 문득문득 그 생각을 하면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고백이었다. 지금도 절에 가면 법당에 들어가 참회를 하고, 참회만으로 마음이 개운치 않아서 보호시설의 아동들에게 무료로 그림 수업을 해주고 있단다. 이야말로 이 화백의 참회 바라밀이 아닐까 싶다.
지난번 만났을 때는 비 오는 날 도로에 기어 나온 지렁이를 볼 때마다 햇볕이 나면 말라 죽을 수도 있으므로 풀숲으로 옮겨주었다는 얘기를 듣고 이 화백의 자비를 느꼈던 바, 오늘의 참회 얘기도 결국 서로 상통하는 사연이 아닐까 싶어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러고 보니 자비와 참회는 동전의 앞뒷면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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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화와 하늘나리꽃이 눈을 맑혀주고 있다. 복더위라고는 하지만 이때쯤 어김없이 피어나는 두 꽃을 보고 있으면 조금은 더위가 가시는 것이다. 부용화는 장흥 부용사 가는 길가에서 씨를 받아와 아내의 공방 화단에 심은 사연이 있고, 하늘나리꽃은 마당의 불단석 밑에 자생한, 다른 말로 하자면 나의 주거를 침입한 꽃이다. 나는 이처럼 잠입하듯 쳐들어오는 꽃들은 대환영이다.
다만, 약속 없이 불쑥 찾아오는 사람들을 경계할 뿐이다. 아직도 사립문에는 '집필중'이란 패(牌)가 걸려 있는데, 예의 없는 사람을 경계하기 위해서다. 그래도 나의 가풍(家風)은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괴팍하지도, 너그럽지도 않은 산중작가로 오는 세월을 막지 않고, 가는 세월을 붙잡지도 않으면서 늙어가고 있는 것 같다. 아침에 화순읍 한 치과에서 엑스레이 촬영 결과 잇몸 속에서 녹아 사라지는 이뿌리들을 보아선지 새삼 생로병사 중에 늙음(老)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