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면 입에서 연꽃이 피어나리라 

정찬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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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정윤경

강진군청 홈페이지에 연재하고 있는 장편역사소설 <깨달음의 빛, 청자>가 1부에 이어 2부로 들어서기 직전이다. 1부는 신라 말엽, 장보고가 당나라 월주청자 기술을 강진(탐진)에 받아들이는 우여곡절의 이야기이고, 2부는 고려시대로 진입하여 강진청자가 중국청자를 뛰어넘어버리는 천하제일의 명성을 얻어 가는 이야기이다.

2부에서 역사적 배경을 서술하려면 여러 사료들 중에서도 <고려사>(11권)는 필독서이다. 어제부터 1대 태조(왕건)에서 4대 광종까지의 내용을 속독했다.

그 결과 1부에서 2부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데 금쪽같은 영감을 얻었다. 역사적 사실에서 얻은 영감은 작가의 상상력을 배가시켜주는 것 같다. 이러한 기쁨은 소설 구상의 원천(源泉)이자, 집필의 에너지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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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육칠 년 전에 광주여대 교수직을 정년퇴임하고 자유롭게 사는 이웅의 고등학교 동창 친구가 조그만 오토바이를 타고 광주에서 찾아왔다. 캠핑카 뒤에 달고 다니는 오토바이라고 한다.

캠핑카로 전국을 두 바퀴 돌았다고 행복해한다. 캠핑카에 취사도구 1박스, 이부자리 1박스, 식량 1박스면 족하지, 더 이상은 필요치 않다고 껄껄 웃는다. 별명을 붙여준다면 '껄껄거사'가 잘 어울릴 것 같다. 휴대폰에 저장된 1천 개 이상의 이름들도 지우고 또 지워서 지금은 50여 개뿐이라고 한다. 이념과 생각이 다른 지인들과 과감하게 헤어졌다고 한다. 내가 히랍인 조르바 같다고 하자, 친구는 마지막 해외여행이 그리스(히랍)였고, 조르바 캐릭터를 창조한 그리스 문호 카잔차키스가 잠든 크레타섬까지 다녀왔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친구는 대자유인 조르바의 눈매와 생김새가 흡사하다.

교수 생활을 하는 동안 얼마나 고독하고 힘든 시간을 보냈으면 캠핑카를 구매해 방랑할 생각을 했고, 조르바와 같은 자유를 갈망했을까, 하는 짠한 생각이 들어 나는 친구가 유쾌하게 떠드는 동안 차를 따르며 말없이 경청해 주었다. 조르바는 춤과 웃음과 장광설로 자신의 처절한 실패를 조롱하듯 살았는데, 친구에게서도 그러한 면모가 언뜻언뜻 보였던 것이다.

2

이상호 화가와 이건용 화가가 약속한 시간에 왔다. 이상호 화가는 내 둘째 여동생과 초등학교 동창인데, 동국대 불교미술학과에 입학했다가 자퇴하고 조선대 미대로 다시 진학해, 전두환 독재시대와 맞서서 민중미술로 항거하다가 국가보안법 사범으로 남영동 대공분실까지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고서는 오랫동안 정신병원에서 살아야 했던, 시대를 잘못 만나 고초를 겪은 불운한 화가이다.

이건용 화가는 탱화를 주로 그리는데, 그림을 이상호 화가에게 배운 인연으로 25년 전부터 이상호 화가가 고문 후유증으로 발작할 때마다 달려와 이화가의 어머니와 함께 병원에 입원시키는 등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스님 느낌이 들고, 천왕문의 신장 같다고 하자, 부모님이 태고종 스님이라고 한다. 불화를 그리는 아내와 평범하게 살고 싶지 태고종 스님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지금은 부모님의 절인 율곡사 신축 건물에 보수 없이 단청 작업을 하고 있다며 웃는다.

이상호 화가는 다행히 5년부터는 부처님 가피(정신병원에서도 108배와 석가모니불 정근을 틈틈이 했다)로 발작 증세가 치유되어 개인 화실에서 그림에만 전념하고 있으며, 광주비엔날레 초대작가전도 가졌다고 한다. 감옥과 정신병원을 오간 참혹한 세월을 보냈으니 이제는 그림에만 매진하는 화가로서의 행복을 누리라고 나는 발원해 주었다. 휴대폰으로 나와 아내를 사진 찍는다. 쌍봉사 철감선사 사리탑 좌우에 나와 아내를 넣어 그림을 그려보겠다고 한다. 모진 고통 속에서 심성이 황폐해졌을 법도 한데, 참으로 곱고 순수한 부처님 마음 같다. 진흙에서 피어난 연꽃 같다고나 할까!

이불재를 떠난 뒤에 "형님, 시간을 내주어 고맙습니다."라는 문자가 왔다. 나는 언제든 와서 차를 마시라고 답했다. 마음속에 박힌 깊은 상처를 차로 녹여내주고 싶어서 그렇게 답했다.

3

장군처럼 콧수염과 턱수염을 기른 황순칠 화백이 다녀갔다. 황 화백에게는 몇 달 전에 내가 고담(古潭)이란 호를 지어 선물했다. 황화백은 운주사부터 시작해 전국의 돌부처님을 순례하며 그리고 있는데, 어떤 그림은 어찌나 큰지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서 붓질하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장마철이어서 작업을 잠시 중단하고 광주 화실에 내려와 있다가 차담이 그리워서 이불재를 찾아왔을 것이다. 이불재 차실을 들어서더니 고매(古梅)를 그려서, 호 받은 답례로 선물하겠다고 한다. 차실 출입문에서 마주치는 정면 벽에 직사각형의 길쭉한 고매도(古梅圖)를 걸면 제법 어울릴 것 같다. 나는 황화백에게 그림 작업을 하지 않을 때 틈틈이 읽으면 좋을 것이라며 나의 산문집 <서른부터 다가온 반야심경의 행복>을 서명해서 주었다. 그랬더니 두 시간 뒤에 다음과 같은 문자가 왔다.

'따뜻한 홍차와 형님 형수님 덕담에 행복했습니다. 주신 책 읽고 있습니다. 목사까지 감동시킨 글이 나오네요. 편하고 좋아요. 고담 황순칠 합장'

불퇴전의 기상으로 현장에서 그림 작업을 하고 자신의 화실에서 매년 피아노 개인 연주회를 갖는다는 황 화백, 술집에서 입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취미형 그림의 화가들과는 절교하고 산다는 황 화백, 광주 5·18민중항쟁 때 행상을 하는 어머니에게 붙들려 도청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황 화백의 진실한 화업(畵業)이 세상에 더 알려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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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재 연못에 핀 홍수련꽃을 보니 두 분의 말씀이 떠오른다.

제2의 부처로 불렸던 용수보살은 파사현정(破邪顯正), '삿됨을 부수어야 올바름이 드러난다'는 말씀을 남겼다.

반면에 종교를 부정했던 마오쩌둥조차 존경했던 육조 혜능대사는 '침묵하면 입에서 연꽃이 피어나리라'는 말씀을 남겼다.

눈앞의 난제를 두고 어느 분의 말씀을 취할지는 각자의 몫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