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란 무엇인가?

                                                     정찬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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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정윤경

제주도에 사는 시인 정희성 동문에게 보성의 명차 두 통을 보내주었더니 마침내 다음과 같은 시를 창착해서 보내왔다. 1년 365일 동안 매일 한 편씩 시를 쓰는 시인 아우님인데, 아마도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시사(詩史)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현재진행형의 열정적인 사건이 아닐까 싶다. 시인으로서 미답의 길을 가고 있는 시인 아우님에게 응원을 보낸다. 차를 보낸 것도 지치지 말라고 응원과 격려의 의미였다는 것을 밝힌다. 

차담

능소화 꽃목 하늘거리는 여름 다탁 

바람 한쪽 띄운 황차 한 모금

암 회복 기력에 좋다고 이불재 형님 

고이 싸 보낸 보성명차 풀어놓고

몇 여름 더 살아야 할 이유

온종일 물어보네

소금기 배어 간간한 성산포 달빛

한 두름 엮어 보내드려야지

계당산 넘어 탐진강 건너고 

여서도에서 한숨 돌렸을

보향다원 황차 배달길 되짚어

하루 한 편 찻심으로 시 씁니다

자랑도 딸려 보내야지

시작노트: 보성에서 나는 차 중에서도 이름난 것이어서 당신도 때맞춰 구해 귀한 손님과 차담 나눌 때 낸다는 보향다원 유기농 황차. 늦은 봄 선물 받은 것으로 곶감 빼먹듯 아껴 마십니다. 

쌉쌀하면서 은은한 잔향이 어김없는 보성 명차의 진면목을 느끼게 합니다. 화순 이불재, 정찬주 형님이 매일 지켜보시는 덕에 하루 한 편 시작에 게으를 수 없습니다.

* *

범대순 시집 <아름다운 가난>을 범희승 전남대 의과대학 핵의학 박사로부터 선물 받았다. 전남대 영문과 교수였던 시인은 작고하셨지만 시집은 아들의 손에서 영생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어제 아내의 도자기공방 수료식이 있었는데, 문동식 색소폰 연주자가 축하 연주를 한다고 찾아온 것이다. 범희승 박사와 전 광양부시장 문동식 선생과는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한다.

나는 수료식이 끝난 뒤 젊은 시절에 한 번 읽었던 <아름다운 가난>을 다시 음미했다. 시집은 1부와 2부로 되어 있는데, 1부는 해방 전후 궁핍한 시대의 가난을 아름답도록 짠하게 견디었던 풍경의 연작시들이고, 2부는 삶의 근원을 묻는 서정적 절규 같은 연작시들이다.

2부 가운데 내 눈에 들어온 지구별에서 가장 짧은 시(絶句) 연작들이다. 감상하는 이마다 다를 터이니 시집 <아름다운 가난>을 직접 구해 읽기를 바란다.

연작시1

노란 /은행잎

우는 /소쩍새

부딪혀 /붉은

석양 /가을빛

연작시4

소쩍새 /울고

종소리 /우는

뜻 /알아듣고

지는 /오동잎. 

연작시7

매화 /가지에

별이 /읊는 시

꽃이 /다 같이

따라 /외는 봄

연작시60

낙조 /저 붉은

슬픔 /다음엔

또 /무엇인가

가르쳐 /다오.

연작시66

국제 /전화로

저승 /불렀다

통화 /중이라

뒤로 /미뤘다.

연작시69

해보다 /진한

별이 /어딘가

있다고 /듣고

밤을 /보는 눈.

연작시70

바삐 간 /사람

어깨를 /짚는

가을 /서산에

타는 /저녁놀

연작시76

당신은 /국립

묘지에 /들고

원컨대 /나는

바람을 /다오.

* *

형제   

              김준태

초등학교 1ㆍ2학년 애들이려나

광주시 연제동 연꽃마을 목욕탕

키가 큰 여덟 살쯤의 형이란 녀석이

이마에 피도 안 마른 여섯 살쯤 아우를

때밀이용 베드 위에 벌러덩 눕혀놓고서

엉덩이, 어깨, 발바닥, 배, 사타구니 구석까지

손을 넣어 마치 그의 어미처럼 닦아주고 있었다

불알 두 쪽도 예쁘게 반짝반짝 닦아주는 것이었다

그게 보기에도 영 좋아 오래도록 바라보던 나는

"형제여! 늙어 죽는 날까지 서로 그렇게 살아라!"

중얼거려 주다가 갑자기 눈물방울 떨구고 말았다.

'시란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금쪽처럼 반짝이는 삶의 한 순간을 포착하는 언어의 고백이 시(詩)이지, 작위적으로 반짝이는 삶의 한 순간을 머리로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순금과 도금의 차이라고나 할까. 

그러고 보면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 다만 불가항력적으로 슬프고, 힘들고, 외롭고, 금강석 같은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하는 '눈 속의 눈'이 있고 없을 뿐.

김준태의 시 <형제>에는 현란한 비유도 없고, 시답게 꾸미려는 조작도 없다. 자신이 본 사실을 소박한 언어로 진술하고만 있다. 그러니 그의 언어는 모호하지 않고, 텃밭에서 막 딴 오이처럼 분명하고 싱싱하다. 시가 무엇인지를 새삼 깨닫게 하는 아침이다.

* *

방금 송광사 수련원장 현묵스님께서 문자로 보내온 송광사 허공의 무지개. 잠시 후에는 예고편에 이어 본편을 보여주듯 쌍무지개를 보내왔다. 이불재에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진 것을 보면 송광사 쪽의 날씨도 비슷했을 듯하다.

육십이 넘어서도 무지개를 보고 가슴이 설렌다면 시인(詩人)이라는 말이 기억난다. 현묵스님도 시심(詩心)이 충만한 분일 것 같다. 밀양 출신인 속가형님은 소설가, 동생 분은 한국화가라고 하니 스님도 형제간에 교집합이 있지 않을까 싶다. 어디 특정한 예술가만 그렇게 반응하겠는가. 스님께서 보낸 무지개가 나의 감성을 저울질하는 것만 같다.

허공의 다리 같은 무지개만 꼭 감성의 저울추가 되지는 않을 터. 자세를 낮춰야만 보이는 제비꽃, 엉겅퀴꽃도 내 가슴의 감성적인 산성과 알칼리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려주는 리트머스시험지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